목록연애 (15)
.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신기하다. 요즘 대학생들은 ‘연애’를 새로 시작해도 성적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 경우, 연애를 시작하면 언제나 성적은 가파른 하향곡선으로 추락했다. 어디 성적뿐인가. 매사에 예민하게 반응해서 부모님에겐 늘 불효자가 되고 친구들에겐 ‘왕따’가 되었다. 신기한 게 또 있다. 아주 실용적인 학문이라면 또 모르지만, 문예창작학과처럼, 예술 창작을 연마하는 학생들도 이른바 모범생 타입은 모든 교과목에서 균일하게 상위권을 유지한다. 시 창작, 소설 창작은 물론이고 희곡, 평론, 아동문학 창작 과목까지 성적에서 편차가 없다. 이것 또한 지향이나 선생에 따라 과목별 편차가 심했던 젊은 날의 나와 아주 대조적이다. 나는 때로 요즘의 ‘젊은 그들’이 부럽다. 그들은 확실히 우리 세대보다 안정적이고, 감정의 기복을 무난하게..
처음 만난지 오랜 시간이 흘렀구나. 처음엔 이렇게 될 줄 몰랐지. 이런 관계가 될 줄은. 문자를 하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그게 사귀는 거 아닌가도 했지. 넌 참 많이 우는 아이지. 하지만 내 앞에서 운 적은 없어. 내가 둔해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난 네 눈물을 한번도 닦아주지 못했어. 단 한번도. 그게 가장 슬프고, 아쉽고, 미안하고. (사실 미안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안녕, 안녕, 안녕. 그 사람 때문에 네가 우는 걸, 힘들어 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구나. 내가 더 이상 널 신경쓸 자격도, 처지도 안 되니까 떠나는 수밖에. 그동안 고마웠어. 널 미워하지 않아. 사랑했으니까. 안녕.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다가 장근석이 너무 불쌍해서 감정 이입한답시고 써봤는데, 에이 영..
마이 짝퉁 라이프 - 고예나 지음/민음사 pp. 101 - 103 "유치하게 뭐하는 짓이냐?" "원래 사랑은 유치한 거야." "놀구 있네." R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지금 내 심정은 상당히 미묘하다. 나는 열등생처럼 왠지 모를 패배감에 젖어 든다. 사랑이란 상품은 돌고 돌아야 하는데 늘 구매하는 사람만 구매한다. 나는 사랑을 쟁취하는 자들에게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R의 미니 홈피에 가면 남자 친구가 이벤트를 해 준 사진이 올라와 있다. 화살표를 땅에 붙여서 길을 인도하고 마지막에 도착한 목적지엔 하트 모양으로 세워 놓은 양초들에 불빛이 반짝인다. 그리고 촛불 가운데엔 남자 친구가 장미꽃 다발을 들고 서 있다. 사진은 분명 보라고 있는 것이다. 숨기고 싶은 것들은 올리지 않는다. 그 남자는..
태어난 지 400여 년이 되도록 인기가 식을 줄 모르는 희대의 바람둥이가 있다. 구전민담이 1630년, 스페인의 신부이자 극작가인 띠르소 데 몰리나에 의해 『돈 후안,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의 초대Burlador de Sevilla y convidado de piedra』로 정리되며 탄생한 ‘돈 후안’이다. ‘귀족’신분과 그에 따르는 ‘명예’를 도구 삼아 욕망에 충실히 수많은 여자들을 농락한 돈 후안은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는 많은 작가들에 의해 재창조됐고, 많은 민중의 성원을 받으며 죽지 않았다. 1844년, 역시 스페인 출신의 호세 소리야 이 모랄에 의해 『돈 후안 테노리오Don Juan tenorio』로 다시 태어난 그는 조금 변형된 욕망에 따라 난봉을 거듭하다 다시금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