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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화, 세계시민주의 본문

저널 / Zenol

새로운 세계화, 세계시민주의

zeno 2008. 4. 29. 16:33
   한미 FTA 비준이 예상되고 있고, 국내 1위 기업 삼성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기업 중 하나가 된 오늘날 세계화는 어느덧 우리 일상을 구성하는 어휘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1997년 겨울에 밀어닥친 IMF 외환위기는 한국이 더 이상 결코 세계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나라가 아님을 전국민 모두에게 각인시켜주었다. 이런 세계화가 과연 진정 무엇인가에 대해서 ‘단일한 합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논자마다 제각기 정의가 다르고, 입장도 다르다. 하지만 모두들 오늘날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경제적 세계화의 기저에 이른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만큼,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오늘날 세계화의 알파요, 오메가다.
  이 흐름은 대체로 20세기 초에 등장해 약 반세기 가량 전세계적인 복지국가 열풍을 일으켰던 ‘케인즈 혁명’을 딛고 일어나면서부터 시작됐다. 영국의 대처 정부, 미국의 레이건 정부 등에 의해 주도된 신자유주의는 지난 수십 년간 비대해진 정부 규모의 많은 부분을 시장에 이양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주장을 근간으로 하여 시장과 그 주체인 기업의 힘을 급속도로 키웠다. 뿐만 아니라 이 조류는 이른바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를 통해 미국의 재무부, IMF 같은 국제경제기구 등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혹은 경제적 세계화를 전세계에 천명하며 기존 사회 틀의 급속적 변화를 추진했다.
  이 경제적 세계화의 중심부에는 TCC(Transnational Capitalist Class)가 위치하고 있다. Sklair가 고안한 개념으로써 ‘초국적 자본가 계급’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이들은 호칭 그대로 국적에 구애받지 않고 기업을 운영하거나 혹은 그와 연관된 일을 통해 이윤을 획득하고 이들에게 보다 큰 이득을 안겨줄 경제적 세계화의 지속 및 확대를 추구한다. 그들은 비슷한 생활 양식, 교육 수준, 소비 경향 등을 공유하며 ‘세계 시민’을 자처한다. 이들의 네트워크는 기업을 중심으로 국가, 세계기구 등에까지 뻗쳐 ‘사적 소유권’에 대한 그들의 권리와 금융 투자를 통한 이윤 극대화 가능성을 증진시킨다. 
  이들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이들에게 지속적인 번영을 약속하는 듯 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들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적 내적 원리에 따른 구조적 한계와 부작용이 현실로 나타난 탓이었다. 실제로, 1990년대 후반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로부터 시작한 외환위기는 전세계적인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경제적 위기와 그로 인한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의 피해는 TCC 내부의 분화를 낳았다. 지금껏 TCC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 세계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진전이 전세계 사람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리라 생각했던 일부 지식인들이나 정치가들의 믿음이 깨진 것이다.
  이는 세계화주의자 내부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낳아 기존 TCC의 입장과 충돌을 빚었다. 실제로, 이 논쟁은 TCC가 지금껏 전제해오던 두 가지 가정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먼저, 첫 번째 가정은 TCC로 대표되는 자본 소유자들의 부의 지속적 축적과 이를 가능케 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정책이 모든 사회적 조건을 개선하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WTO (혹은 미국 재무부), IMF, World Bank로 구성된 이른바 ‘불경한 삼위일체Unholy Trinity’ 주도하에 기존 복지국가적 국민국가Nation-State들의 신자유주의적 사회 재편이 이뤄졌지만, 기대됐던 사회 발전 혹은 불평등의 개선이 이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계급Class과 성Gender, 그리고 국가State에 따른 기존 불평등은 세계화의 경향에서 개선되기는커녕 중층의 문제를 양산하였다.
  두 번째 가정은 세계의 자원이 무한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기술 발전이 자원의 희소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강력한 반론에 부딪혔다. 대표적인 자원인 석유의 가격은 끝없이 치솟았고, 자원 고갈에 대처하기 위해 기술 발전을 통해 개발된 바이오 연료가 오히려 더 많은 자원 고갈을 낳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 아프리카의 수단 등을 사앧로 자원외교를 추진하는 등 많은 부작용이 뒤를 이었다. 게다가 20세기 말엽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지구 온난화’ 등의 환경 문제가 급속도로 진전되어 가시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서 식자라면 현재 지배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은 경제적 세계화가 과연 자원의 희소성을 극복하고 삶의 질 개선 혹은 사회 발전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반론에 대해 IMF를 비롯한 TCC의 동조세력은 ‘Top-Down Reform’이라 불리는 방식의 개혁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개혁안은 결코 본질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신자유주의’라는 본래의 기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노동 유연성 증가와 그에 따른 사회경제적 조건 하락, 국민국가의 약화를 틈탄 초국적 거대자본의 성장 등은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스티글리츠를 비롯한 이른바 ‘대안세계화론자Alter-Globalist’들에 의해 비판받았다. ‘불경한 삼위일체’의 주도하에 이뤄진 신자유주의적 ‘One-fits-all’ 모델이 실제 적용 결과 애초 예상과는 달리 사회 발전을 가져오지 못한 탓이었다. 실제로, 스티글리츠는 그의 저서『세계화와 그 불만Globalization and Its Discontents』에서 에티오피아에 적용된 신자유주의 모델은 기존의 경제 발전 모델을 망쳐놓아 도리어 에티오피아의 성장을 저해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거론했다. 뿐만 아니라, 가까운 사례인 한국의 경우에도 지난 10년간 확대 적용된 신자유주의는 경기 침체를 지속시키고 사회적 양극화를 증가시켰을 뿐, 결코 사회 발전을 이뤄내지 못했다. 이처럼, 현지 상황에 대한 충분한 조사와 연구 없이 뉴욕 같은 경제적 세계화의 수도의 책상에서 이뤄진 결정에 따른 경제적 세계화가 고작 Top-Down Reform이라는 개혁안만으로 하나의 논리를 모든 경우에 적용하는 ‘연역적 방식’의 한계를 극복할지는 의문이다.
  이는 결국 경제적 세계화가 사회 구성원의 일부인 TCC의 이익에 봉사할 뿐, 실제 사회 발전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이뤄진 개혁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방식으로도 이뤄진 세계화는 아무런 투입-산출이 없이 단순히 투기자본의 매도-매수 주문에 따라 이윤을 창출했고, 이는 대부분 거대 투자자본과 그들 배후에 있는 기업, 그리고 그 기업들의 주인Owner이나 경영자CEO 들에게 귀속되었다. 이런 세계화는 결코 사회의 분배 상태를 개선할리도, 애초에 그런 목적을 가졌을 리도 없었다. 주식거래의 목적은 애초에 투자자에게는 이익을, 기업에게는 자본금을 가져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식의 금융 세계화는 TCC의 배를 불릴 뿐, 사회 발전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세계화의 또 다른 근간을 차지했던 초국적기업Transnational Corporation의 성장은 역시 사회 발전을 담보하지 못했다. 기존에 국민국가 틀 안에서 이윤을 추구하던 기업들은 세계화의 흐름에 맞추어 덩치를 키우고 세계 시장에 뛰어들었다. 각 국 정부는 이들 기업들의 성장을 국가 정책을 통해 지원했고, 이는 경제적 세계화의 가속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수많은 초국적 기업들이 등장 및 성장했고, 그 기업들이 속한 나라의 국민소득은 높아졌다. 하지만 그것이 그 국가 혹은 사회의 사회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각 기업들이 각 나라의 ‘대표 선수’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경쟁한 것이었기에 자연스레 이윤은 그 국가가 아닌 기업으로 귀속됐고, 이는 곧 이 기업을 소유·경영하는 TCC의 부로 축적됐다. 그 과정에서 초국적기업들이 납세의 의무를 다했더라면 혹여 그 사회의 발전이 이뤄졌을지도 모르나, 대다수 기업들은 교묘히 법망을 피해 탈세하기 일쑤였다.
  이런 경제적 세계화가 사회 발전을 이뤄내지 못한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이주 여성 노동자’다.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 계급의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었다. 20세기 중반 동안 진행된 사회 복지의 확충은 이들의 삶의 질을 일부 개선하였지만, 그렇다고 노-자 대립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여성은 인류가 이 땅에 들어선 이래 한번도 ‘가부장제’라는 이름의 남성중심주의/남성우월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다. 신분제가 철폐된 근대 이후에도 여성 해방은 이뤄지지 않았고, 참정권을 비롯한 기본적 인권은 20세기 초 여성들의  ‘투쟁’을 통해서야 비로소 획득되었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동안 급격히 성장한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 신장을 상당부분 이뤄냈지만 아직도 사회 전반에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이 엄연히 잔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자 노동자인 그녀들의 권익은 당연히 침해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세계화가 그녀들에 대한 불평등을 가장 심화시킨 것은 그들이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이주는 당연히 보다 나은 사회경제적 조건을 위해 빈국으로부터 부국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이주 결과 이들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자리는 그 부국의 ‘3D 업종’ 뿐이었고, 이는 곧 그녀들이 결코 애초에 얻고자 하였던 충분한 사회경제적 개선을 획득하지 못하고 억압받았음을 의미한다. 결국 그녀들은 ‘이주·여성·노동’이라는 3중의 억압에 갇혀 결코 사회 발전의 과실을 섭취하지 못했다. ‘제3세계의 노동 착취’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억압과 그에 따른 불평등은 결국 TCC가 주도하는 초국적기업의 경제적 세계화로 인해 더욱 강화·확대재생산 될 뿐인 것이다.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이론Risk Society Theory’을 참고하자면 TCC 주도의 Top-Down Reform은 결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초래한 문제와 사회 발전의 답이 될 수 없다. 벡이 고안해 낸 ‘위험Risk’은 근대적 원리의 급진화로 인해 초래된 것이다. 그런데 Top-Down Reform은 근대적 원리의 하나인 ‘시장Market’의 확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즉, 시장의 급진화라는 신자유주의로 인해 초래된 문제에 신자유주의가 대안으로 제시되고 잇는 것이다. 실제로, ‘불경한 삼위일체’가 많은 나라들에게 제시한 개혁안이나 한국 사회에 지난 10년간 도입된 신자유주의적 개혁 조치 등은 근대적 원리인 시장에게 사회의 주도권을 넘길 것을 요구하고 있다. 즉, 벡의 입장에서 볼 때도 Top-Down Reform은 결코 현재 문제의 해결과, 이를 뛰어넘는 사회 발전을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신자유주의적/경제적 세계화에 대한 대안이 요청된다. 이 대안은 ‘반세계화Anti-Globalization’가 될 수도 있으나, 이는 엄격히 말해 ‘대안Alternative’이 아닐뿐더러, 이미 상당히 세계화Globalize 된 세계World를 보다 발전시키는 방향도 아니다. 따라서 그 대안은 ‘대안 세계화Alter-Globalization’일 것이다. 이 때, 이 새로운 세계화의 주체는 기존 세계화에서처럼 초국적기업 혹은 세계 경제기구들로 구성된 ‘불경한 삼위일체’,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TCC가 될 수는 없다. 이들의 존재 목적 자체가 ‘사회 발전Social Development’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대안 세계화를 이끌어나갈 주체로는 이미 큰 기대를 받고 있는 ‘국가State’와 또 다른 기대주, ‘시민사회Civil Society’를 꼽을 수 있다.
  사실 이 둘 중 누가 진정한 주체가 될지, 아니면 이 둘의 협력을 통해 대안 세계화를 이룩해야할지는 논쟁거리이다. 국가라는 것은 결국 또 다른 근대적 원리의 결과물인 국민국가인데, 이 본질과 관련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모두 포괄하는 의미의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내셔널리즘의 폭력성은 최근 전세계에서 이뤄진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과정에서 티베트의 자유를 주장하는 시위대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방하는 친중 시위대가 상대에게 행한 폭력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근대 국가는 주권 형성 및 유지 과정에서 내외에 ‘적Enemy’을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폭력성과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가 꼭 완전한 대안이 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시민사회 내부의 NGO 및 SMO 들이 지난 수십여 년 간 벌어진 반/대안세계화 운동을 주도해왔지만, 그들 내부에서 다른 나라 혹은 다른 집단끼리 공조와 연대를 제대로 이룩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똑같은 NGO라 하더라도 속한 나라의 경제 수준에 따라 반/대안세계화 운동의 주도권 등이 결정되는 ‘남북문제’가 발생하는 등 시민사회 내부의 역량이 충분하지 못함을 입증하는 사례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어떤 주체가 진정으로 신자유주의와 이를 이끄는 TCC의 고삐를 잡을 수 있을지는 논쟁적이다.
  하지만 진정한 사회 발전을 위해서 대안 세계화가 필요함은 자명하다. 소수의 TCC가 아닌 다수의 ‘세계시민Cosmopolitan’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윤 극대화Profit Maximization’가 아닌 ‘행복 극대화Happiness Maximization’ 혹은 ‘후생 극대화Welfare Maximization'이기 때문이다. 이를 달성하는 것이 곧 사회의 발전일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세계화는 결국 전세계의 모든 인간이 동등한 주체로서 만나 교류하고 공존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시장이나 국가 같은 것은 개인의 권리를 억압할 수 있기 때문에 통제되거나 장기적으로 소멸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혹은 시장의 역할은 본래의 효율적 자원배분 기능에 충실하도록, 국가의 기능은 자유로운 개인만이 남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권리의 침해를 막는 정도에 제한될 필요가 있다.
  즉,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가 궁극적인 대안으로 도출된다. 물론, 이는 극도의 추상성을 갖고 있다. 시장의 강대함을 통제하면서 세계시민사회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개입 없이 시민사회 내부의 자정 작용을 통해 국가의 필요성을 줄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인 세계시민사회를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각 국민국가 혹은 EU 같은 지역 공동체의 시민사회의 성숙 및 시민사회 간의 교류가 전제되어야 한다. 시민사회가 결코 즉각적인 처방은 될 수 없지만, 장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시민사회 간의 교류는 예를 들면 ‘민주주의’ 등에 대한 공유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공유지점이 있어야 차후에 본격적인 통합을 할 때 혼선을 예방할 수도 있고, 이로부터 더 많은 분야로의 교류 확대가 이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의 경제적 세계화 흐름 내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달라 다른 나라 사이뿐만 아니라 같은 나라 내에서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대안 세계화의 선결과제인 제대로 된 합의 및 공유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TCC의 주도 아래 이뤄진 경제적 세계화는 결국 사회 발전을 이뤄내지 못했고, 이는 TCC 내부에서의 분화로 이어졌다. 오히려 세계화가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강화시켰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제시된 Top-Down Reform은 본질적인 기조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 결국 해당 지역 혹은 국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보편주의’의 덫에 빠져 일방적인 개악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안 세계화’가 필요하고, 이는 궁극적으로 세계시민사회라는 이름의 새로운 ‘세계화’를 통해 가능하다.
  모든 사회의 혁명적 변화는 ‘급진적 정치학’으로부터 시작됐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세계에 민주주의를 널리 퍼뜨렸고, 20세기에 등장한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를 일소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가부장제를 철폐하지 않은 채 여성을 배제한 ‘남성들의 민주주의’를 이룩했다. 한편, 페미니즘은 주류 사회에 통합되며 일부 영역에서 성차별주의를 혁파하는 대신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남성중심적 문화의 변혁을 포기하였다. 어느 순간 ‘자유주의적 개혁주의’로 변한 이 변화들이 ‘미완’에 그치고 만 것이다. 이제 새로운 혁명적 변화가 요청된다. 소수 TCC에 의한 다수 민중의 삶의 억압은 세계시민사회라는 또 다른 형태의 ‘급진적 정치학’을 통해 혁파될 수 있다.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는 변화의 움직임이지만, ‘급진성Radicalism’을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이 단어의 어원인 radical의 또 다른 의미는 ‘근본적인’이 아닌가. ‘개혁’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미완’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