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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실 지난 주 로쟈의 블로그에서 서평과 소개를 읽으며 가장 끌렸던 것은 프랑스 사학자 엠마뉘엘 토드의 를 소개한 글이었다. 개인적으로 관심 가는 주제인 데다가 저자가 지금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 새로운 관점의 역사서들을 냈던 엠마뉘엘 토드라는 점, 현재 한국에 적용가능한 시의성을 지닌다는 점, 지적 난이도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점 등 여러가지 점에서 호기심이 생겼다. 지금 알라딘에서 검색이 안 되는 것을 보니 아직 출간되지 않은 듯 하다. 역사학이 이런 범위에까지 확장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하나의 놀라움이다. 역시 학문의 세계는 꽤나 넓고 깊다. 사실 그 중에서도 "토드의 책이 일으키는 이러한 반향은 독보적인 학문적 성과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랑스 지식인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촛불은 아름다웠다. 어른들이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뇌까리며 느물거릴 때 촛불을 들기 시작한 여중생들도,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사람들이 이룬 거대한 대열도, 그들이 보인 유쾌한 직접 민주주의의 풍경도. 제정신을 가진 누구도 그 아름다움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왜 이렇게 달라진 게 없을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외치고 행동했는데 이렇게 달라진 게 없을 수 있을까? 딱히 달라진 건 없더라도 사회진보의 열기가 살아나는 계기라도 되었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다들 맥이 빠져버린 모습이니 대체 어찌된 일일까?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렇지만 다들 너무 이기적인 것 같다. 촛불 시위 피켓엔 “이명박 너나 미친 소 쳐먹어” ''내 인생 좀 펼쳐보려고 하니 광우병 걸렸네“ 등 내가 죽..
대학 와서 가장 절실하게 느끼고, 또 가장 많이 내뱉곤 하는 말이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간단한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2년 전 봄, 홉스봄의 를 처음 읽었을 때, "책을 탐독하고 서투른 시와 소설을 끼적거리며 루소를 숭배했던 젊은 지식인"이란 구절에 밑줄을 쳤었다. 내 스스로를 표현하는 데 적합한 말이자, 지향할 바로 여기는 마음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2년 반 가량이 지나 요즘 다시 봐도 이 구절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름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하다는 말이다. 사람은 정말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근데 그거 아시는가? 사실 저 구절 앞에는 "젊은 보나파르트처럼"이라는 말이 본래 붙어있다는 것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폴레옹의 이름을 듣거나 볼 때면 '황제'라는 이름에..
조홍진 기자 / zeno@snu.ac.kr 사진 정원일 기자 / jwi820@snu.ac.kr 바야흐로 ‘지식’의 시대다. 이제 상품이 된 지식은 인터넷상의 시장에서 버젓이 거래된다. ‘수유+너머’ 같은 연구공간은 대중과 유리된 지식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선언을 했다. 대중이 지식의 소비자와 생산자의 역할을 모두 담당하고 새로운 지식 체계를 만드는 ‘대중지성’이 일컬어진다. 한국의 우수한 인터넷 인프라는 네티즌이라는 새로운 집단을 탄생시켜 각자가 자신의 지식을 표출할 수 있게 했다. 그 중에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색깔을 갖추어가며 ‘사이버 논객’의 명성을 쌓아 나가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여론을 이끌고, 지식을 보급하는 소임을 담당하는 지식인들의 역할 역시 아직도 요청된다. 각자의 입장에서 여론..
p. 142 무정부주의는 예술, 해방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다. 지나치게 급진적인 비판은 당장 가능한 개혁조차 우습게 보고, 그 결과 본의 아니게 현상(status quo) 유지에 복무하는 결과를 낳을 수가 있다. p. 192 포스트모던의 유행이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죽여놓았다. 그러니 게으른 자들의 반발을 무릅쓰면서까지 굳이 민중을 대변하는 지식인을 부활시킬 필요는 없다. 그들은 무덤 속에서 자게 내버려두자. 그래, 이제 지식인을 민중을 대변할 필요 없다. 이제는 민중도 다들 똑똑해져서 자기 표현을 하는 데 굳이 지식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식인도 굳이 민중을 위해 희생할 필요는 없다. 더더군다나 그들을 책임질 필요도 없다. 그러니 이제 딱 하나, 자기만 책임지면 될 일이다. 그 정도는 할 수 ..
p.30 오늘날, 사태는 명약관화하다. 기업은 대학으로 하여금, 낡아 퇴색한 인문주의를 포기하고, 그 대신 기업 진단가나 중간 관리자, 전문가 등을 공급해 줄 전문화된 학습을 시행하도록 하기 위해 대학에 손을 뻗치려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