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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년 9 월 제 86 호 / [연재] 지식인을 위한 변명, 첫 번째 :: ‘디-워 논쟁’ 의 중심에 선 진중권, 지식인의 새로운 모습 본문

저널 / Zenol

2007 년 9 월 제 86 호 / [연재] 지식인을 위한 변명, 첫 번째 :: ‘디-워 논쟁’ 의 중심에 선 진중권, 지식인의 새로운 모습

zeno 2007. 9. 10. 00:16

조홍진 기자 / zeno@snu.ac.kr

사진 정원일 기자 / jwi820@snu.ac.kr

바야흐로 ‘지식’의 시대다. 이제 상품이 된 지식은 인터넷상의 시장에서 버젓이 거래된다. ‘수유+너머’ 같은 연구공간은 대중과 유리된 지식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선언을 했다. 대중이 지식의 소비자와 생산자의 역할을 모두 담당하고 새로운 지식 체계를 만드는 ‘대중지성’이 일컬어진다. 한국의 우수한 인터넷 인프라는 네티즌이라는 새로운 집단을 탄생시켜 각자가 자신의 지식을 표출할 수 있게 했다. 그 중에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색깔을 갖추어가며 ‘사이버 논객’의 명성을 쌓아 나가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여론을 이끌고, 지식을 보급하는 소임을 담당하는 지식인들의 역할 역시 아직도 요청된다. 각자의 입장에서 여론에 회자되는 사안에 대하여 논리로 무장한 그들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대중과는 생산적 의견을 주고받고, 배치되는 대중과는 설전을 감내하며 자신의 입장을 견지한다. 주요 언론에 투고된 칼럼이나 꾸준히 나오는 그들의 대중서는 이런 대중과 지식인의 긴장적 관계를 지속시키며 지식인의 존재 의의를 확인시켜 준다.

이번 학기 <서울대저널>은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하고자 한다. 2007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소위 ‘지식인’으로 불리는 이들을 매 호 한 명씩 선정해 그의 사상과 목표, 그가 생각하는 지식인상과 대중과의 관계 등을 알아본다. 이렇게 엮은 지식인의 ‘지적 지도’를 통해 독자들은 단편적 인상만 남아있거나 거리감을 느껴왔던 지식인들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불고 있는 ‘디-워 논쟁’의 한가운데에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지식인 논객’ 중 하나인 진중권이 서있다. 공교롭게도, 그는 대중의 일원인 네티즌일 뿐만 아니라 지식인 대열의 전방에 서 있다. 그의 직설적인 말과 글은 지난 90년대 이래로 안티조선 운동 등 여러 사안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솔직하다 못해 자극적이기까지 한 그의 태도에 대중의 호불호는 극명하게 나뉘었다.

 

지난 8월 23일 여의도에서 만난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하지만 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상투적인 ‘이미지’의 수준에 머물러있다. 사람들은 그의 말과 글에서 나타나는 ‘무례한’ 태도는 기억할망정, 그가 무슨 이야기를 했고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 지에는 무관심했다. 최근 ‘디-워 논쟁’에서도 그는 ‘진꼭지’라는 감정적 성토의 대상만 되었을 뿐이었다.

지식인 진중권

그런데 정작 그는 스스로를 ‘지식인’이라는 특별한 범주에 가두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지식인은 특정 학문에 대한 연구자인 전문직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사람들이 문자를 모르던 계몽주의 시대에는 지식인이 문자를 아는 사람으로서 의미를 가졌었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해방적 서사를 떠드는 그런 지식인의 시대는 갔어요.” 그래서 ‘유쾌한 미학자’인 그의 ‘썰’은 비트겐슈타인 언어철학에서 시작되어 정치학의 공동체주의-자유주의 논쟁, 취향의 객관성과 주관성을 다루는 미학까지 정치, 철학, 예술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든다.

혹자는 미학 대중서를 쓰는 한편 여러 분야에 대한 평론을 지속하는 그의 행보가 분리된 것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진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지식인은 학문 스페셜리스트로부터 다른 영역으로까지 뻗어 나가는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야 해요. 스페셜리스트가 먼저 되어야 컨텐츠를 가질 수 있고, 이후 제너럴리스트로서 다른 영역과 접속시켜 새로운 정보인 하이브리드를 생산해 낼 수 있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시각이 형성되고, 이 때 전문 지식이 여러 영역에서 놀이로 표현될 수 있게 돼요.” 현재 그는 그 길을 걷고 있다.

진중권은 요즘 ‘기술적 상상력’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아직 이 분야는 신천지라 일종의 ‘블루 오션’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한국의 인터넷 인프라는 큰 어드밴티지다. “예를 들어, 한국의 인터넷 세계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은 대부분이 말 그대로 ‘세계 최초’잖아요.” 그의 이런 관심은 최근의 저서 등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무례한 진중권

진중권의 말과 글은 직설적이다. 그만큼 날카롭고 경쾌하며 솔직하다. 이는 곧 그의 지지자의 양산으로 이어지고, 그와 비슷한 스타일의 논객들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입장에서 그의 스타일은 도발적이다. 그로 인한 당혹감은 불쾌감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스타일의 문제일 뿐, 정녕 무례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모두가 똑같은 화법에 따라 말하기를 바라는 건 ‘스타일의 독재’”라는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은 스타일의 자유라는게 그의 논리다.

그가 생각하는 토론의 예의는 획일화된 스타일로부터 나오는 파시즘이 아니다. “상대의 논리를 왜곡하지 않고 정당하게 반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토론의 예의입니다. 상대 논리의 예봉을 피해 엉뚱한 말로 논점을 흐리거나 궤변을 늘어놓는 것은 토론의 진행을 막으니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무례’한 것이죠.” 진중권에게 그런 사람은 지루하다. 그래서 그의 말은 단도직입적이다.

그의 펜 끝이 개인이 아닌 집단을 향할 때는 과연 어떨까? 이 때에도 그의 무기는 춤춘다. 그의 촉수가 향하는 집단은 주로 대중이다. 황우석 사태 때도 그러했고, 이번 ‘디-워 논쟁’에서도 심형래를 극렬히 지지하는 대중을 향해 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대중이 수가 많으므로 진리다’라는 식의 진리합의설 등이 파시즘적으로 번져나가는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이런 파시즘은 다수가 수를 근거로 소수를 억압하는 ‘권력’이 되기에 위험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상대의 논리를 왜곡하지 않고 정당하게 반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토론의 예의입니다. 상대 논리의 예봉을 피해 엉뚱한 말로 논점을 흐리거나 궤변을 늘어놓는 것은 토론의 진행을 막으니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무례’한 것이죠.”

그의 ‘스타일’을 무례함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이라며 분노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대중을 하찮게 여긴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은 하지도 않은 말을 놓고 온갖 비난을 하며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이번 ‘디-워 논쟁’에서도 여러 토론 자리에서 상대편의 공격을 같은 논리로 수차례 반박했다.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문제시하지 않는 대중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일부가 그들을 선동하여 엉뚱한 분노를 쏟아 붓는다는 것이다.

그는 지식인과 대중이 딱 부러지는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오피니언 리더도 학문을 바탕으로 견해를 이야기 하는 칼럼을 쓰는 전문가일 뿐이니 그가 하는 얘기를 모든 대중들이 알아들을 필요는 없죠. 지식인이 상대하는 대중은 최소 대중서나 나아가 학술서까지 읽고 지식인과 소통할 수 있는 이른바 교양층이니까요.” 그가 볼 때 아직도 한국은 그런 교양층이 얇다. 그래서 다수의 대중이 ‘디-워 논쟁’과 같은 화제가 제기되어야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고, 평소에 소통하는 관계가 아니었기에 대중이 지식인의 논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감정적인 대응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 지식인과 대중은 ‘느슨한 관계’로 묶인다. 대중의 지적 상류층인 교양층이 두꺼워져야 사회 수준이 높아지고 다른 문화적 측면도 함께 발전할 수 있다.

진중권이 바라는 것

그의 사상은 한 마디로 정리하기 힘들다. 워낙 다방면을 넘나들기에 스스로도 자기의 사상을 한 가지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사상, 진보-보수 논쟁은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다. 특정 사상만을 고집하기보다는, 때에 따라 분석 도구나 내용 등을 취사선택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틀을 통해 책을 읽고 현상을 설명한다.

그는 궁극적인 목표도 설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때 그 때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생산해주고 할 일을 하는 것일 뿐이지 사회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지는 않다. 그의 생각이 사회를 바꾸어가는 데 만족할 뿐이다. 다만 그가 오래전부터 견지해 온 주장은 있다. “한국이 허구적 매크로 공동체주의인 민족주의 · 국가주의 등에서 빠져나와, 해방된 개인들에 기반한, 약자들에 대한 보호가 충분한 상태의 사회적 연대감의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가 젊은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사회적 분위기에 반하더라도 자기가 정말 옳다고 생각하거나 하고 싶은 거라면 ‘자기 자신’을 늘 관철시키라는 것이다. 이미 남들이 다 하는 건 따라가도 대부분 늦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 아이큐가 높지도,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 했던 것도 아니에요. 그저 제 머리를 믿고 썼을 뿐이죠.” 이 때 질문은 정직하게, 모르는 건 집요하게 파고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남들과 똑같으면 평범해질 뿐이다. 외로움을 견뎌야 한다. 공동체주의가 지배원리인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주체적 개인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비굴해지지 말고 ‘성격’있게 낙관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는 삶의 방식이자 존재미학의 문제이다.

진중권과 우리

진중권은 끊임없이 진화한다. 때로는 평론가로, 때로는 학자로 사회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심지어 인터넷에서도 당당히 실명을 내걸고 논객으로 나선다. 그의 생각은 일관성을 잃지 않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과 발맞추어 계속 진화한다.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자처하지 않는 그는 거창한 사상을 내걸지도, 목표를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래서 특정 이념에 매몰되지도, 특정 인물에 포섭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조금씩 세상을 바꿔나가고, 끈질기게 자신의 의견을 세상에 피력할 뿐이다.

세상은 아직도 지식인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시대가 요청하는 지식인은 과거 한국의 민주화운동 시기 동안 민중을 이끌었던 모습이 아닌 대중과 소통하며 한국을 보다 나은 수준의 사회로 끌어올리는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바른 개인주의가 개개인을 억압하는 공동체주의를 극복하기를 염원하는 진중권은 시대가 요청하는 지식인 상에 상당히 가깝다. 그가 지금껏 스스로 진화하는 한편 한국의 여론을 보다 올바른 쪽으로 이끌었던 것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미래를 조금은 낙관할 수 있지 않을까.

<미학 오디세이 1, 2, 3> (휴머니스트, 2003)

‘유쾌한 미학자 CJK’의 화려한 등장을 알린 책이다.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주요 미술작품들을 딱딱하지 않은 문체로 미학적으로 해설해낸 훌륭한 미학 교양서이다.

<호모 코레아니쿠스> (웅진 지식하우스, 2007)

진화한 진중권의 면모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책이다. 최근간임과 동시에 모처럼 한권에 그의 생각이 응축적으로 녹아 있다. 조금 진부한 진보적 시각의 한국인 비판일 수도 있으나 최근 자료를 근거로 한 그의 ‘썰’은 상쾌한 지적 자극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