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 진중권 본문

저널 / Zenol

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 진중권

zeno 2007. 8. 31. 15:24

p. 142
무정부주의는 예술, 해방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다.

지나치게 급진적인 비판은 당장 가능한 개혁조차 우습게 보고, 그 결과 본의 아니게 현상(status quo) 유지에 복무하는 결과를 낳을 수가 있다.


p. 192
포스트모던의 유행이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죽여놓았다. 그러니 게으른 자들의 반발을 무릅쓰면서까지 굳이 민중을 대변하는 지식인을 부활시킬 필요는 없다. 그들은 무덤 속에서 자게 내버려두자. 그래, 이제 지식인을 민중을 대변할 필요 없다. 이제는 민중도 다들 똑똑해져서 자기 표현을 하는 데 굳이 지식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식인도 굳이 민중을 위해 희생할 필요는 없다. 더더군다나 그들을 책임질 필요도 없다. 그러니 이제 딱 하나, 자기만 책임지면 될 일이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조여오는 권력의 망 속에서 망가지지 말고 자아를 배려하라. 우리의 지식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존재미학, 즉 자존심의 최소한을 지키고 제 존재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예술이다.
 
p. 198
공포. 그것은 사람들을 이성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게 만든다. 공포에 질린 사람에게 유일한 정의는 생존이고, 그 생존을 위해 그들은 무슨 일이든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기 마련이다.
 
p. 236
그동안 민주화 과정 속에서 국가 권력은 연성화했어도, 회사, 공장, 학교, 군대 등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여전히 이 낡은 국가주의 습속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개인을 곧바로 국가적 목표에 종속시켜버리는 이 국가주의 생체 권력의 집요한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우리 사회가 아직 완수하지 못한 자유주의적 과제다.


p. 249
주체성이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집단과의 동일시 속에서만 자아실현을 하는 법이다.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다른 한편으로는 크고 작은 집단주의. 이 둘의 기괴한 결합이 평균적 한국인의 '정체성'이다. 즉 개성과 주체성이 없는 적나라한 이기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연대나 책임을 모르는 집단주의자.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은 패거리의 정체성이다. '에고'는 있어도 '주체'는 없다. 그리하여 제 조그만 이익을 지키는 데에는 남에게 질세라 악착같이 달려들어도, 정작 자기의 견해를 얘기해보라고 하면 변변히 제 생각을 말로 풀어낼 줄 모른다. 우리 사회에는 '집단'은 있어도 '사회성'은 없다.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다는 그 친절함은 정확하게 자기가 속하여 친분이 있는 집단의 동그라미에서 멈춘다.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당하든, 평균적인 한국인은 그들에게 아무 연대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슬프지만 그게 우리의 자화상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자화상을 지우러면 먼저 개인들이 지연, 혈연, 학연과 같은 마이크로 집단주의, '한국', '한국인', '한민족' 어쩌구 하는 매크로 집단주의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집단에 함몰되는 것은 봉건적 주체(?)의 특성이다. 근대적 주체가 되려면 먼저 쓸데없이 자신을 원소로 포함시키려 달려드는 크고 작은 집단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야 한다. 나아가 "민족중흥의 역샂거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허위의식을 벗고, 이 공허한 애국주의를 사회적 책임 및 사회적 연대의 의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해방된 개인의 자유로운 결사." 해방된 갱니은 패거리 속의 노예들과는 달리 주인이 되어 제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선택한다. 그런 개인은 제 개성과 주체성을 유지함녀서도 동시에 사회적 책임감과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다.
이런 개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가능하다. 다만 인간관계의 점성이 높은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사는 게 좀 피곤할 뿐이다. 푸코의 말대로 권력은 정말 도처에 있다.

p. 266
이렇게 <조선일보>의 반운동권 선전에 동원될 수 있었던 데에는 임 교수의 민족주의론 자체의 심각한 결함도 한몫했다. 서구에서는 'Nation'이라는 표현 속에서 '민족'과 '국가'가 구별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서구의 민족주의는 곧바로 우익 이념이 된다. 반면 우리처럼 식민지를 거친 사호에서는 민족과 국가가 분리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가령 일제시대를 생각해보라. 당시 위레엑 '민족'은 있었어도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민족'과 '국가'(=당시는 일본)의 구분과 대립이 존재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저항적 민족주의자들은 졸지에 좌익이나 용공으로 몰려야 했고, 과거의 친일파들은 반공을 무기로 휘두르는 국가주의자로 변신하여 서로 대립해왔다. 식민종주국인 서구와 식민지였던 한국 사회 사이에 가로놓인 이런 거대한 상황의 차이에 대한 충분한 숙고 없이 민족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p. 328
"나는 왜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박완서 씨의 이 물음에 내가 대답해도 될까? 간단하다.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도록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악 앞에서는 침묵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고 도덕 감정이 없겠는가? 그리하여 그 커다란 악에는 도덕 감정을 표출하지 못했던 그들이 그 커다란 악에 대항하는 미소한 자들이 저지르는 사소한 악에는 그토록 민감한 것이다. 이때 커다란 폭력 앞에서 침묵함으로써 주체이기를 포기했던 그 사람들은 비로소 안심하고 도덕적 판단의 주체, 즉 인간다운 인간으로 설 수가 있는 것이다. 억압이 있는 곳에서는 가해자와 동일시해야 비로소 사소한 도덕적 판단의 주체라도 될 수 있다. 이 알량함이 인간 조건의 심오한 비극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