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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목수정이라는 글쟁이가 있다. 작년에 이런 책을 써서 알게 된 사람인데, 이번에 레디앙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한국이 낳은 천재 음악가'로 꼽히는 사람 중 한 명인 정명훈이라는 사람의 내면에 대해 알 수 있는 글이다. 물론 '주관적'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애초에 '객관적'이고자 쓴 글이 아니지 않는가. 예술가와 양심은 사실 다른 차원의 문제다. 둘이 함께 간다면 좋겠지만, 병립하지 않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정명훈의 태도에 대한 비판은 '지휘자 정명훈'이 아닌 '인간 정명훈'에 대한 비판이 되어야 한다. 물론 그 내용은 단순하다. '멍청이.' 이 비판은 단순히 그를 인격적으로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닫힌 냉전적 사고, 인간적 저질성, 걸맞지 않는 귀족 의식 등에 대한 비판이..
냉소주의는 비겁함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어느 한 곳에도 정체성을 고정시키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는 탓이다. 일례로, 집단 속에서는 개인을 지켜야 한다며 버티는 한편, 파편화된 인간들 사이에서는 공동체의 복원을 주장한다. 결국 개인주의자도 아니고, 공동체/집단주의자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서 균형 잡기를 시도하는 탓에 냉소라는 '제3의 길'로 빠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스스로 인간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항상 헷갈리곤 한다. 어쩔 때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다가도, 어느 새 팩 토라져 인간들을 저주하고 욕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양 극단에서 진동하며 살아가는 바, 늘 그 종착역은 적당한 '거리두기'가 되기 일쑤다. 이런 개인의 성격..
어느덧 도착한지 일주일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이 곳에서도 시간은 정말 빨리 간다. 이러다가 곧 돌아갈 때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마 계획대로라면 다녀왔다는 retreat에 대해 쓰는 것이 정석의 수순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1주일'이라는 제목으로 포스팅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짧게 나마 적어보려고 한다. 사실 지난 1주일 간의 생활은 그간의 포스팅으로 자질구레하게 써 놓아서 특별히 덧붙일 말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아무래도 '블로그'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 같다. 인터넷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지난 월요일 저녁 이래로, 나의 모든 생활은 '블로그'라는 이 한 단어로 집약될 수 있다. 거의 모든 활동의 시작을 블로그로부터 해서 블로그로 끝내고, 온갖 ..
참을성이라는 건 어떻게 하면 길러질까. 이젠 좀 길러졌나 싶었는데, 또 아니네. 괜히 혼자 조바심내고, 기다리고, 원망하고, 아쉬워하고, 걱정하게 되고. 아직도 '개인성'이라는 것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글을 하나 신나게 쓰다가 접었다. 내 글의 의도는 아니지만, 그것을 비판으로 받아들일 것 같은 사람들이 마음에 걸려서. 이걸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보다 글밥먹고 사는 건 참 어려운 일 같다. 지금은 꿈꾸기만 하는 건데 이 정도라니. 어제 문득 깨달았다. 나는 허세 덩어리. 그렇다고 장근석처럼 간지가 나지는 않는구나. 하지만 뭐, 이 허세라는 녀석은 좀처럼 떨어지지도 않고, 사실 그렇게 버리고 싶은 생각도 없고. 이미 내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데 어찌 '너 싫어'라고 할 수 있겠..
‘한국 지성의 죽음’이란 이 글의 제목은 주말 잠결에 부고처럼 나에게 찾아왔다. 무심코 받았다가 눈을 부비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기껏 ‘나의 죽음’뿐이다. 물론 내가 한국 지성의 대표는커녕 지성 축에 끼인다고도 절대로 생각하지 않지만 ‘한국’ 지성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이 글은 그런 이유로 내가 지성이라는 가정 하에 쓰는 지극히 서글픈 개인적 유서 같은 것에 불과하다. 나 자신을 지성이라고 말하기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음은 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되는데, 지성을 ‘권력과 자본을 위시한 모든 권위와 압력으로부터 독립한 자유로운 아웃사이더 아마추어 자유인-교양인-全人의 심성과 실천’이라고 보면 더욱 그렇다. 지성을 이와 다르게 정의하는 예도 많지만 이 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