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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근성이란 말과 그 강조를 굉장히 싫어한다. '헝그리 정신'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이 강조점으로 인해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해야 했는가. 사회적 책임의 문제를 개인에게 환원하는 이 것이야말로 국가주의, 집단주의, 마초주의의 현신 중 하나가 아닌가. 하지만 현실이라는 프레임 내에서 싸운다는 것은 결국 조건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면서 뛰어드는 것일 수 밖에 없다. 결국 같은 평행우주 상에서 맞붙는 거니까. 그 상황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결국 근성의 문제로 돌입하게 된다. 이 곳에 와서 스스로 근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프레임 자체를 그 순간 깨지 못할 바에야 결국 근성이 필요할 수밖에. 그래서 나름 노력했다. 이제 학기 막바지다. 1주일 후면 모든 시험이 끝난다. 말인 ..
냉소주의는 비겁함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어느 한 곳에도 정체성을 고정시키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는 탓이다. 일례로, 집단 속에서는 개인을 지켜야 한다며 버티는 한편, 파편화된 인간들 사이에서는 공동체의 복원을 주장한다. 결국 개인주의자도 아니고, 공동체/집단주의자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서 균형 잡기를 시도하는 탓에 냉소라는 '제3의 길'로 빠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스스로 인간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항상 헷갈리곤 한다. 어쩔 때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다가도, 어느 새 팩 토라져 인간들을 저주하고 욕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양 극단에서 진동하며 살아가는 바, 늘 그 종착역은 적당한 '거리두기'가 되기 일쑤다. 이런 개인의 성격..
1920년대 중반에 Ku Klux Klan이 워싱턴 한복판에서 부활했다는 것을 아시는가. 오늘 미국사 수업을 듣다 알게되었는데, 지금으로부터 84년 전, 워싱턴 한복판에서 파시스트 인종주의자들의 행진이 있었다. 알다시피, 지난 달 그곳에서는 최초의 아프리칸-아메리칸 대통령인 오바마의 취임식이 열린 곳이었다. 부활한 쿠 클럭스 클랜에서는 단순한 '백인 우월주의'가 아니라 '백인, 개신교, 토종 우월주의'가 모토로 제창되었었다. 여기서 토종은 물론 인디언이 아닌 이주민의 후예들. 그 당시 이들의 힘은 공화당의 가톨릭 후보를 견제하며 민주당의 개신교 후보의 적극적인 지지자들로써 가공할만 했다고 한다. 공포를 느꼈다. 허연 보자기를 뒤집어 쓴 개떼같은 인간들이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건물을 뒤로하고 사열하여 행진하..
어릴 적, 사립 탐정이 되고 싶었다. 추리 소설의 영향일까, 머리를 써 문제를 해결하는 이들의 모습이 그렇게도 멋져보였드랬다. 셜록 홈즈가 싫어졌다. 그는 무언가 오만하고 정의로운 체 하지만 차가웠다. 차라리 까칠하지만 따뜻한 아르센 뤼팽이 좋았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이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뤼팽에게 끌렸다. 경찰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촌스러운 파란색 제복을 입고 교통 정리나 하는 것을 꿈으로 가지기에는 어렸다. '경찰청 사람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우락부락해서 범죄자들한테 욕이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민중의 지팡이, 라는 표현이 참 좋은 건줄 알았다. 민중의 뜻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된 것은 대학 들어와서 이지만, 그저 지팡이 역할을 한다기에 호감이었다. 고생하는 것을 알기에 애틋한 마..
너는 말했다. 네게 기댈 곳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홀로여야만 한다고. 그래야만 치열해 질 수 있고, 네가 살 수 있다고. 그래, 맞는 말이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해야 한다. 오기와 독기로 무장해 남에게 수 없이 많은 상처를 주더라도 네 자신을 지켜야 한다. 아무도 널 지켜줄 수 없다. 잠깐 동안이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누구도 결코 영원은 장담할 수 없다. 가족, 형제, 자매, 애인, 그 누구도 이제는 너의 항구적인 지지자일 수 없다. 세상이 변했다. 한 때 현실을 도피했었다. 사랑과 우정, 낭만과 연대를 믿었다. 내가 손을 내밀면 네가 잡아줄 줄 알았고, 내가 네게 애정을 보이면 네가 환대로 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세상엔 이미 너무도 많은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