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에 아는 사람의 소개로 저런 책을 쓰는데 공저자로 참여했다. 사실 '책'을 매개로 한 사교육 시장에 동참하는 것 같아 고민했었는데, 결론적으로 그렇게 번 돈 좋은데다 쓰고, 이런 기회를 통해서라도 내가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전달되면 내가 욕을 좀 먹더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참여했었다. 아래 링크는 그 전문.
알라딘에서 내 이름을 검색해보니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17살, 나를 바꾼 한 권의 책>에 공저로 참여했다." 이렇게 나오는데 기분이 묘하다.
김영사 관계자분께서 혹시 이 글을 보시고 저작권 문제 때문에 곤란하다면 연락 주시라. 사실 당시 정식 계약을 체결한 것이 아니었기에 선인세 가량으로 '소정'의 금액만을 받았었고, 저작권과 관련하여 협의를 거치지 않았다. 따라서 내게도 어느 정도 내 의향에 따라 공개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공개하는 것이다.
사실 퇴고도 거치지 않은 글이라 말 그대로 '거친' 글이지만, 혹여 읽고 관심이 생기는 사람이 있다면 얘기하고픈 마음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1% 정도는 출판계 관련인이 보고 관심을 표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런 건 없더라. 초고가 그대로 책에 실리기에 한국 출판계를 좀 얕보기도 했었는데, 이걸 보면 또 아닌듯도. 사실 난 아직 저 책을 읽지 않았다.)
눈앞이 깜깜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귓가엔 유혹의 목소리만이 감겨왔다. 지금 당장에라도 이 모든 것을 그만둬 버리고 싶었다. 아무도 도움이 되지 못했고, 내 스스로의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것이 힘들었고, 누군가 답을 내려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만신창이의 상태로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지만, 결국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주변에는 암흑만이 맴돌았다.
한국형 판타지의 초석을 쌓았다고 평가되는 이우혁의 『퇴마록』말세편 1권「부름」에서 주인공 박윤규 신부가 내내 겪었던 상황이다. 음울한 이미지로 가득해 독자를 답답하게 만드는 책,『퇴마록』은 바로 그런 책이었다. 이는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내 10대의 어느 날과 너무도 유사하게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늘 똑같은 일상과 목표와 방향이 없는 공부, 권태로운 삶에 질릴대로 질려 있었다. 아무도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주지 못했고, 아무도 날 이끌어주지 못했다. 홀로 답을 찾아보려고도 했지만, 고작 10대의 소년에 불과했던 내게 ‘솔로몬의 지혜’란 존재하지 않았다.
보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당시 내게 가장 큰 문제는 삶의 의미를 도무지 찾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왜 사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따위의 나름 철학적인 문제를 어렸을 때부터 고민해왔었지만, 경험도, 지식도 일천한 내게 만족할 만한 답변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의 공교육이 으레 그렇듯이, 학교 교육은 소위 말하는 ‘입시 교육’에 치중되었을 뿐, 내 내면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을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무엇이 그리 불안했던지, 무료한 와중에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쫓김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란 ‘방황’ 뿐이었다.
『퇴마록』말세편 역시 주인공들의 ‘방황’으로 시작된다. 으레 이 책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사람들은 으레 ‘판타지’라는 이 책의 장르만으로 내용을 예단하곤 하지만, 사실 국내편과 세계편, 그리고 혼세편을 거쳐 퇴마록은 여타 판타지 소설들과 차별화됐다. 단순히 민담, 심령 등을 소재로 삼아 재미를 추구하던 것에서 벗어나 세계를 움직이는 동력,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개인의 삶의 태도 등을 논하는 ‘철학적’ 수준까지 올라간 것이다.
그래서 말세편은 세상의 종말을 예감하여 이를 막고자 하는 주인공들의 활약상을 조명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겪는 내외적 고난을 그려낸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말세편은 주인공 박 신부의 방황으로 시작된다. 말세의 조짐을 알지만, 어떻게 올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퇴마행의 근원인 종교(기독교)를 통해 이를 밝혀내고자 하지만 그에게 하느님은 도통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 한편, 영적 능력을 보유한 박신부와 달리 육체적 능력만이 유일한 자산인 이현암은 수련을 쌓는다. 말세가 도래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수련의 결과인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어떤 상황에든 대처하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암의 곁에는 혼세편에서 말세편으로 넘어오며 강한 능력을 잃어버렸지만, 어떻게든 자신이 사랑하는 퇴마사 일행에게 도움이 되고자 애쓰는 현승희가 있다. 그녀는 그나마 남은 능력인 염력이 자신의 노화를 재촉하는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자신을 희생한다. 마지막으로 뛰어난 주술 능력에 그간 성숙한 내면까지 갖춰 ‘적그리스도’를 참칭하며 말세의 짐을 혼자 지고자 하는 소년 장준후가 있다.
이들을 비롯한 퇴마사 일행에게 말세는 ‘해동감결’이라는 비전서에 의해 암시된다. 이들은 이 예언서에서 점치는 파국을 막고자 전세계를 누비며 말세를 준비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교황청과 성당기사단을 비롯한 전세계의 많은 종교 단체들과 엮이고, 아하스 페르쯔, 맥달, 치우천왕 같은 역사적 인물들과 조우한다. 퇴마사 일행은 7,000년의 역사를 넘나들며 역사의 비밀을 파헤치고 말세를 대비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난관은 끝이 없다.
장장 19권에 달하는 긴 시리즈인 『퇴마록』은 말세편으로 종결된다.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권선징악적 주제는 결국 독자에게 휴머니즘을 호소하고, 이는 특히 주독자인 10대들에게 일종의 삶의 지침을 제시하게 된다. 특히, 무엇보다도 주인공 중 가장 어린 장준후는 선천적 소질에 후천적 영재 교육이 더해져 갖춘 엄청난 능력에 시리즈를 걸쳐 내면의 성숙까지 갖춰 일종의 ‘성장’을 보여준다. ‘소년’이 ‘청년’이 되는 것이다. 단순히 능력이 뛰어나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성숙도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 것은 『퇴마록』의 숨겨진 의의로 꼽을만하다.
퇴마록이 무엇보다도 내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학문’에 대한 관심을 키워줬다는 점이다. 풍부한 자료 조사와 가설 구성, 적용을 통한 플롯 형성을 보며 난 학문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단순히 소설 작법에 따라 구성된 여느 소설과 달리 풍부한 인류학적, 고고학적 자료 조사에 근거해 스토리를 짜고, 이를 하나의 재미있는 ‘썰’로 풀어낸 것이 학문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이후 종교, 역사, 철학 등에 걸쳐 다방면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지금은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다. 하지만 내 관심사는 단순히 요즘 이른바 ‘대세’인 금융과 재무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학·사회학·경제학·역사학·철학·문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이른바 ‘인문사회과학’을 꿈꾸는 것이다. 실제로, 그에 충실한 공부를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물론 세상이 요구하는 바와 다르기에 항상 흔들리곤 하는 결심이지만,『퇴마록』이 처음 내게 보여주었던 학문의 세계는 아직 ‘유토피아’로 남아 있다.
이런 내 꿈이 어떻게 종결될지는 모른다. 『퇴마록』이 장애물과 반전을 거듭하다 결국 열린 결말로 끝났듯이, 인생에는 많은 고난과 역경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답답하고 불안하기만 하던 사춘기 시절, 내게 학문의 길을 열어주었고, 세상을 보는 관점, 삶의 태도를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던『퇴마록』이 있었기에 내 ‘말세’는 오지 않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성장하는 장준후는 내게 친구였고, 나는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사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 와서 글을 쓰자니 내가 제목을 단 기억도 딱히 안 나고, 알라딘에서 검색해 본 결과 나온 출판사 책 소개 등에 실린 내용과 내가 전달하려고 했던 내용이 엇갈린다. 이래서 아직 영글지 않은 이들이 책을 쓰는건 무리인가. 누가 자신의 책을 '수치의 역사'라고 표현했는데, 어째 시작부터 수치스럽게 한 것 같아 기분이 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