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090224 인간에 대한 예의 본문

저널 / Zenol

090224 인간에 대한 예의

zeno 2009. 2. 24. 17:55
  사람들은 늘 내게 말한다. 자기도 다 아는 이야기를 마치 나 혼자 아는양 주제 넘게 충고하지 말라고. 실제로 내가 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교과서'적이다. 도덕에 기반하여, 개인주의에 기반하여, 상식에 기반하여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념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기껏해야 '휴머니즘' 정도?
  나의 말과 행동의 기저에는 하나의 원칙이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황금률. 네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남에게도 해주어라. 네가 하기 싫은 것이 있다면 남에게도 하지말라.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정작 항상 원칙으로 삼으며 지침으로 삼기는 힘든 내용이다. 생각해보라. 당신에게 누군가 '넌 왜 그렇게 뚱뚱해? 못 생겼어? 성격이 지랄맞어? 매력이 없어?' 따위의 말을 하면, 상처받지 않겠는가? 안 받는다고 하는 그대, 솔직히 말해보라. 당신 내면의 '작은 아이'는 그런 말들과 또 그런 말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는 거짓된 '어른의 자아' 때문에 더욱 더 작아지고 병들고 있지 않은가. 
  나를 계몽주의자로 만들지 말라. 나에게 짜증을 내지도 말라.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또 당신과의 대화 혹은 생활 속에서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최소한의 상식에 기반하여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인데 왜 그러는가. '쓸 데 없는 생각'이라고? '피곤하게 왜 그래'라고? '다 알고 있는데 너만 혼자 아는 것 같이 굴지 말라'고? 그렇다면 알면서 왜 안 하는가. 나치 독일 시절, 독일인들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을 알면서 방조했고, 그/녀들 스스로는 양심적으로, 혹은 합리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런 문제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인류 최악의 학살,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끔찍한 기억의 원형에 닿은 그것, '홀로코스트'였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요구하는 것은, 황금률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성'이라 불리는 그 최후의 희망을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꾸 내게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말을 되뇌이게 하지 말아달라. 알면서 안 하는 것은 비겁이고, 유식을 가장한 무식은 죄악이다. 미친 세상에서 최후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인간성에 대한 감수성을 지켜내고자 부단히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인간에 대한 예의, 최소한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것으로부터, 상대의 무례한 말과 행동에 제동을 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