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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집]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본문

평 / Review

[서신집]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zeno 2008. 12. 25. 21:59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6점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재혁 옮김/고려대학교출판부


  pp. 44 - 46.

  그리고 내 생각에는 남성에게도 모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모성 말입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남성의 행위도 일종의 분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그의 창조가 내적인 충만으로부터 이루어질 경우, 그것은 분만인 것입니다. 그리고 남녀 양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위대한 개혁은, 아마도 남자와 처녀가 모든 그릇된 감정과 혐오감에서 벗어나, 서로 반대되는 존재로서 상대를 찾지 말고 같은 형제자매로서, 이웃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연대하여 그들의 어깨에 부과된 어려운 성을 소박하고 진지하고 끈기 있게 함께 짊어지고 나아가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가능할지 모를 모든 것을 고독한 사람은 지금부터 준비하고 그들보다 실수가 적은 그의 두 손으로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카푸스 씨, 당신의 고독을 사랑하고 고독이 만들어내는 고통을 당신의 아름답게 울리는 비탄으로 견디도록 하세요.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멀리 느껴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것이 당신의 주위가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의 영역이 이미 별들 바로 밑에까지 다다를만큼 커졌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당신의 성장을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성장의 뒤쪽에 처져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하십시오. 그리고 그들 앞에서 확실하고 태연하게 행동하도록 하고, 당신의 의심으로 그들에게 고통을 주지 말 것이며, 그들이 이해 못할 당신의 확신이나 기쁨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지도 마십시오. 당신 자신이 지금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다 해도 조금도 변하지 않을, 그들과의 그 어떤 소박하고 진실한 공통점을 당신이 먼저 찾으세요. 당신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사랑하고, 당신에겐 친근하기만 한 고독을 두려워하는 나이든 분들에게는 관대하게 대하세요.

  pp. 56 - 57.

  친애하는 카푸스 씨,

  성탄절이 되어 당신이 이 축제 분위기의 한복판에서 평소보다 훨씬 힘겨운 고독을 견디고 있다면, 내가 어찌 당신에게 인사말 한마디 없이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의 그 고독이 위대한 고독인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그 사실을 기뻐하십시오. 위대함을 지니지 못한 고독이 대체 무슨 고독이란 말인가?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으십시오.) 고독은 단 하나뿐이며, 그것은 위대하며 견뎌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의 누구에게나 고독을 버리고 아무하고나 값싼 유대감을 맺고 싶고, 마주치는 첫 번째 사람, 전혀 사귈 가치조차 없는 사람과도 자신의 마음을 헐고 하나가 된 듯한 느낌에 빠지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고독이 자라나는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고독의 성장은 소년들의 성장처럼 고통스러우며 막 시작되는 봄처럼 슬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꼭 필요한 것은 다만 이것, 고독, 즉 위대한 내면의 고독뿐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 몇 시간이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 바로 이러한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 어른들이 중요하고 대단해 보이는 일들에 얽매여 분주하게 돌아다닐 때 어른들의 너무나 분주한 모습과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서 우리가 느꼈던 고독, 바로 그런 고독을 느껴야 합니다.

  p. 80

  슬픔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하여 사람들이 슬픔을 시끌벅적한 곳으로 들고 갈 때, 오히려 그 슬픔은 위험스럽고 나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표피적으로 그리고 아둔하게 치료한 질병처럼 그런 슬픔들은 물러나는 척하였다가는 짧은 잠복기가 지나고 나면 전보다 훨씬 무섭게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슬픔들이 가슴속에 집적되어 인생이 되면, 그 인생은 제대로 살지 못한 삶, 거부된 삶, 실패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삶으로 인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머리가 미치는 곳보다 좀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면, 우리의 감지력의 망루를 지나 좀더 멀리까지 내다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슬픔들을 우리의 기쁨을 대할 때보다 훨씬 더 큰 신뢰로 참아 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슬픔이란 무언가 새로운 것, 무언가 미지의 것이 우리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우리들의 감정은 어쩔 줄 모르는 당혹감 속에서 입을 다물고, 우리의 내면의 모든 것은 뒤로 물어서고, 적막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 새로운 것이 그 적막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침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의 모든 슬픔들은 우리가 마비로 느끼는 긴장의 순간들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마비로 느끼는 까닭은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소스라치게 놀란 감정들이 살아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우리의 내부로 들어온 낯선 것과 단 둘이서만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친근하고 익숙한 모든 것들이 한순간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는 변화 과정의 한중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p. 95

  마음속에 늘 충분한 인내심을 지니십시오. 또한 소박한 마음으로 믿으십시오. 어려운 것을 더욱더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고는 삶이 당신에게 벌어지는 대로 놔두십시오. 내 말을 믿으십시오. 삶은 어떠한 경우에도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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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 준 책. 그래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