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겨레] 엄숙함은 가고, 즐거운 혁명이 오다 / 손호철 본문

스크랩 / Scrap

[한겨레] 엄숙함은 가고, 즐거운 혁명이 오다 / 손호철

zeno 2008. 6. 7. 00:22

“배후는 너다”. 3일 장대비 속에 열린 촛불집회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어린 여학생의 등에 붙은 구호였다. 꺼질 줄 모르고 번져가는 촛불시위에 대해 “촛불은 누구의 돈으로 샀는지 조사해 보고하라”는 유치한 수준의 대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통렬한 야유였다.

이날 있었던 정부의 기만적 미봉책 발표로 촛불시위가 흔들리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와 달리 이날 시위에는 2만명 이상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이번 촛불이 쉽게 꺼질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즐거운 신호였다. 그러나 진보적 정치학자로서 이번 시위에서 정말로 즐거웠던 것은 두 가지다. 우선 ‘즐거운 혁명’이다. 20세기 초의 페미니스트 운동가였던 엠마 골드만이 지적했듯이 “만일 내가 춤을 출 수 없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운동은 그동안 너무 근엄주의에 빠져 있었다. 과거의 엄숙주의를 벗어난 발랄하고 즐거운 혁명, 그것은 충격이었다. 두 번째, 정치권과 시민사회운동의 ‘운동권력’이 사라진 것이다. 나 역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으로 그동안 많은 시위에 참가해 단상에 올라가고, 발언도 했다. 그러나 시위를 주도하는 운동권력과 단순히 시위에 참여하는 일반 참여자 간의 분리는 우리 운동의 심각한 문제였다. 이번 시위의 경우 정치인들과 운동권력들이 단상에서 사라지고 시민들의 생생한 발언들이 이어졌다는 것은 중요한 역사적 발전이다.

동시에 이번 시위를 전혀 새로운 것이고 세상을 바꾸고 있는 굉장한 것으로 그리는 일부의 경향에 대해서는 우려가 생겨났다. 우선 실시간 중계하는 인터넷 텔레비전의 등장 등 새로운 운동매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물론 이는 중요한 발전이다. 그러나 1970년대의 복사기를 비롯해 2002년 인터넷, 2003년 시위집결에 사용된 휴대폰 문자 등 새로운 매체는 계속 진화해 왔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사실 밤늦게까지 시위대를 따라다니며 고민을 한 것은 이번 시위가 촛불시위의 원조인 2002년 효순·미선양 추모 촛불시위, 그리고 2004년 탄핵규탄 촛불시위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점이다. 아마도 중고생, 특히 여학생들이 대거 참여한 것 이외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미 2002년과 2004년에 나타난 것이 강화된 것일 뿐이다. 2002년 촛불시위 역시 효순·미선이라는 두 여중생이 미군 탱크에 죽은 것과 관련해 한 네티즌이 온라인상으로 제안하고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폭발적인 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2004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결과 2002년 대선은 인터넷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이 승리한 인터넷 대선, 새로운 감수성의 2030세대의 대선이라고 평가됐다. 많은 평론가 역시 이에 기초해 운동의 미래에 대해 장밋빛 그림을 제시했다. 그러나 2008년 대선은 이와는 전혀 다른 그림을 보여준 바 있다. 그리고 그 결과 문제의 현 대통령이 사상 최대의 표 차이로 승리했다. 결국 2002년과 2004년의 촛불시위가 확실한 정치적 주체화로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번 시위에도 불구하고 통합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지지율이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국민들이 직접 정치를 만들어가는 촛불시위를 정당이나 선거라는 제도정치에 묶어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걱정은 쇠고기 이후다. 이후 앞으로 줄줄이 생겨날 이명박 정부의 한심한 정책마다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모여야 하며, 또 모일 것이냐는 점이다. 밤 12시, 빠르게 집으로 돌아가는 시위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를 엄습한 것은 2002년부터 2008년 대선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과 비슷한 현상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걱정이었다. 물론 쇠고기 문제를 매듭짓고 이명박의 신자유주의적 공안국가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촛불을 들고 있는 아름다운 시민들, 그들이 5년 뒤에는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이들이 지속적인 힘으로 작동하도록 정치적 주체로 확실히 자리 잡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진정한 화두다. 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

-------------------------------------------------------------------

  이번 잇따른 촛불집회 관련 기고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면서, 와 닿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