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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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 Zenol

성년의 날

zeno 2009. 5. 18. 17:34
  그러고보니 성년의 날이다. 작년에는 챙겨주는 사람들 덕분에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었는데, 벌써 돌아온 것을 보면 역시 시간은 참 빠르다. 그런데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최근 뉴스에서 보도된 바 있는 명문대 의대 출신의 자살자가 알고보니 두어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나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다.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고2 때, 역시 두어 다리 건너 알던 모 과학고의 학생회장이 자살한 이후 1주일 정도 일종의 공황장애를 앓았었다. 그의 고민이 이해될 것 같았기에,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정도의 내용이었다.
  이런 일이 아마 한국 사회에서 유별난 경우는 아닐 것이다. 성공, 부, 학력 등을 지상가치로 치는 사회에서 이런 일이 왜 없었겠는가. 다만, 최근 세대와 관련된 담론이 수면 위로 떠올랐기에 하나의 현상으로 분석하고 처방을 시도해 볼 만하다고 여겨질 뿐이다. 이 곳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가 일종의 경제학 모델링에 관한 것인데 그러다보니 우석훈이 자신의 블로그에서 종종 하던 이야기가 이제는 조금 이해될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그 출발점은 이래야 할 것이다. 김규항이 여러 차례 지적한 적 있듯이, 부모들은 자신들의 아이들이 남들 위에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돈벌이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게 뒷바라지 하는 것이 '행복'해지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잇따르고 있는 소위 '명문대', 혹은 '예비 -사'들의 자살은 그/녀들의 부모의 생각이 '착각'에 불과했음을 암시해준다. 사실 이건 사회과학적 모델링을 할 것도 없이 자명하다. 인문학적 감수성 혹은 윤리적 감수성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과정'이 행복하지 않은데, '결과'가 행복할 수 없으리란 건 자명한 일 아닌가. 물론,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결과주의'의 틀 아래에서 이 같은 강요와 억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회의 여론이 '헝그리 정신'의 조장이나 '(유사) 가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모두 포함한 개념으로서의) 내셔널리즘'으로 모아져왔다. 하지만 '껍데기'만 '성년'이 된 이들, 부모의 통제 하에 성장하여 온 이들, 주체성을 갖지 못해 '캥거루 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강력하게 표출하는 이들에게 '근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 경제성장을 일궈낸 세대가 낳은 것이 바로 현재 청년층을 이루고 있는 세대다. 하지만 그/녀들은 선대에 비해 나은 가족의 뒷받침 - 물론 '다 너의 행복을 위해서야'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강요와 억압 - 의 세례를 받은 탓인지 근성과는 꽤나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지난 10여년 간 재편된 사회는 그야 말로 무한경쟁의 시대를 낳았고, 그/녀들은 살아남기 위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전개중이다. 거기서 도출되는 자연스러운 결과가 투입된 자원의 많고 적음을 차치하고, 최대한이기보다는 최장기적으로 안정적인 복지가 보장되는 삶을 희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로의 철저한 순응, 자폐적 대중문화, 탈정치화 등의 일견 다양하지만 사실 몸통은 하나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 그럼 이에 대한 처방은 무엇이 될 것인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주체화이다. 자신들의 문제는 결국 자신들의 손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특히, 현재와 같은 상황을 우석훈과 박권일 식의 '인질경제론'으로 보자면, 인질은 스톡홀름 신드롬에 빠지기보다는 직접 자신을 위협하는 괴한을 제압하거나, 아예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그 과정이 바로 주체화이고, 그 결과물이 주체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인질들간의 연대다. 수 많은 인질 중 한 명이 혼자 살아보겠다고 뛰쳐나가다가는 총을 맞고 죽기 십상이지만, 인질들이 조직되어 위협자를 제압하려고 나서는 등의 대안을 모색하면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이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이 인질들간의 신뢰를 쌓는 것이다. 우석훈의 표현을 다시 빌자면, '우정과 환대의 공간'을 형성하는 것. 이기심, 경쟁, 물신 등의 기존 사회의 문법 대신 애정, 연대, 배려 등의 가치가 모색되어야 한다. 물론 관념의 차원에서 논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이미 몸속에 켜켜이 쌓여있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은 몹시 지난한 일이다. 하지만,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혹은 선택해야 할 길이다. 그 출발점은 당장 내적 갈등으로 인해 자살의 기로에 서 있는 동료 인질에게 손을 건네는 것이다. 뛰쳐 나가려는 옆 인질을 붙잡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고, 동시에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옆 사람이 죽으면, 다음 대상은 당신이 아니겠는가. 거창하게 연대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지 않더라도, 사랑이라는 닭살 돋는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내가 살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자, '성년'이라는 이름의 인질로서의 족쇄를 차게 된 동료들을 환영하자. 일종의 '운명 공동체'에 놓인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는 서로 돕는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의 연원도 자조self-help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성년이 된 당신들을 환영한다. 다만, 그 환영이 웰컴 투 더 헬이 아니라 웰컴 투 더 퓨처가 되기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