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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 Zenol

반지성주의

zeno 2009. 5. 16. 09:56
  익숙한 환경과 인간관계에서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를 중심으로 한 모든 것에 대해 '낯설게'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 결과물 중 하나는 스스로가 굉장히 '관념적'이라는 사실이다. 예전부터 어느 정도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역시 나의 언어는 관념적이다. 그것이 종종 일상에서의 생활에 균열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최근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한 지인에게 내가 항상 괴로움을 겪는 이유 중에 하나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동시에 받았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진동하게 되고, 그것이 또 다른 고통을 낳는다'는 식의 설명을 했더니, 답변은 아니나 다를까, '머리아프다'는 식이었다. 이야기는 내친 김에 비슷한 언어들의 반복적 변주가 되었다. 이에 대한 상대의 약간의 반감과 '그럼 너 여기서 수준차이나서 어떻게 답답한 거 참았냐'는 반응에 대해 '사용하는 언어가 다를 뿐'이지 '수준이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그 결과는, '재수없다.'
  반지성주의였다. 한국의 경제학도들과 한국 경제에 대해서 논하기보다는 술과 연애, 게임에 대해 논해야 하듯이, 인문사회과학도와의 대화 역시 '지성'이라는 단어와 다른 차원의 공간에 존재하는 언어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반지성주의 운운하는 것이 근대적 계몽주의의 시각을 철저히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안다. 탈근대가 운위되는 현 시대에서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수준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문제라고 받아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것이 오히려 '오만함'으로 받아들여지는 반지성주의적 풍토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계몽이되 계몽이지 않아야 하고, 다르되 평등을 지향해야 하는.
  오늘 고종석의 책을 읽다가 나와 같은 논리구조를 통한 입장 도출에 도달한 그의 표명을 보아서 잠시 옮겨 놓는다. "영국인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에서 펼친 주장을 나는 거의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도킨스가 그 책에서 성직자나 신자들에게 보인 경멸과 조롱에까지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 무신론이 도킨스의 무신론보다 여려서가 아니라, 동류에 대한 내 연민이 게몽을 향한 도킨스의 열정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도킨스보다 더 거만하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경건해진다. 도킨스라면 그들 앞에서, 그들의 '무지'와 '미몽' 앞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차리라. 그러나 나는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겼을 간절함과 순박함에 가슴이 저리다. 그들을 슬기로운 사람이라 여겨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사람이라 여긴다. 그 기도가 평화나 박애 같은 공적 가치를 위한 것일 땐 특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