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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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 / Review

[소설] 마이너리그 <★★★☆>

zeno 2009. 3. 30. 12:57
마이너리그 - 6점
은희경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p. 53

  사람들은 자기에게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멈추고 돌아보니 그렇게 의식없이 보내버린 시간이 쌓여서 바로 자기 인생이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뭐라고? 나는 좋은 인생이 오기를 바라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아직 인생다운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내가 무턱대고 살아왔던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이었다고?

  p. 128

  나의 신중함과 완벽주의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진취성이 부족하다는 거였다. 그런 판단의 저번에는 팀장이 개띠 동기의 대학 선배라는 사실, 그리고 둘다 고향이 같다는 사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학연과 지연만 패거리를 만들고 세를 형성하는 게 아니었다. '알티'라고 불리는 ROTC들, 무슨무슨 특수한 군부대 출신들, 그리고 같은 동네 조기축구회까지 조금의 공통점이라도 있으면 서로의 기수를 확인한다, 반지를 마주대본다, 허리춤을 뒤적거리며 버클을 확인한다 하면서 이산가족이라도 상봉한 듯 호들갑을 떨며 금방 근친적 감격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에게서 나는 팀워크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자주 받았다. 나는 팀워크란 말이 꼭지가 돌도록 함께 취해서 어깨동무를 한 채 연탄재 위에 엎어진다거나, 자기 일 끝내놓고 옆에서 괜히 자리라도 지켜준다며 커피를 뽑으러 들락거리거나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정신만 산란하게 하는 비효율적인 겉치레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팀워크가 없는 게 아니라 책임의 소재와 그 영역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월급쟁이 사회의 팀워크란 깡패집단과 다를 바가 없다. 개인의 조건과 취향이 고려되지 않는다. 단체로 2차와 3차까지 가야 하고 단체로 싸우나에 가야 하고 단체로 미아리에 가서 쇼를 봐야 하고 때로 단체로 여자를 사서 서로의 옆방으로 들어간다. 그런 것들이 다 팀워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었다.

  p. 171

  텔레비전에서는 연속극이 시작되었다. 고뇌하는 젊은 청년이 친구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부르짖었다. 우리는 순수를 잃어버렸어!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단 말야, 알겠어? 나는 그 젊은이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신이 순수하지 않다는 고민은 순수한 나이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자기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고민하는 삶이야말로 의미있는 삶인 것처럼.

  p. 223

"너 지금 누구 편이냐? 지금이 어느 땐데 혼자만 잘난 척이야?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잘난 척하는 놈들은 꼭 그러더라. 일이 잘못되면 한발짝 물러나서 토나 달고 분석이나 하고."

  내 기억이 맞다면 은희경의 작품 중 처음으로 읽은 책이다. 사실 지난 여름 원주의 한 찜질방에서 읽기 시작했었는데, 역시 이 곳에 와서 있는 것을 보고 읽게 되었다. 중견 작가의 노련함이 돋보였다. 심심한 문체로 한자어들로 구성을 짜가며 한 사내의 삶을 그려내는 것이 나의 삶과 어느 정도 교집합을 이루는 것 같다. 아, 사실 감상은 읽고 바로바로 달아야 하는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