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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회학]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막스 베버 테제 및 논쟁 본문

학문 / Science

[종교사회학]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막스 베버 테제 및 논쟁

zeno 2006. 11. 18. 22:04

목차


1.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1) 개괄

  2) 자본주의

  3) 종파적 특성

  4) 자본주의 정신

  5) 직업

  6) 프로테스탄티즘(칼뱅주의)의 윤리와 금욕주의

  7) 기타 종파

2. 막스 베버 테제에 대한 논쟁

  1) 에른스트 트뢸치

  2) 베르너 좀바르트

  3) R. H. 토니

  4) 윈드럽 S. 허드슨

  5) H. M. 로버트슨

  6) 아민토레 판파니

  7) 알버트 하이머

3. 막스 베버 테제와 그 논쟁의 학문적, 역사적 영향

  1) 막스 베버는 무엇을 말하려 했나

  2) 막스 베버 테제에 대한 비판의 성격

  3) 유럽 자본주의의 모순과 막스 베버

  4) 의의

4. 마치며



참고문헌


1.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1) 개괄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자신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근대 자본주의 발전과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연관관계를 분석하였다. 그에 따르면,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 동력은 화폐의 증가 등 단순한 경제적 요인이 아니었다.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프로테스탄티즘, 그 중에서도 칼뱅주의의 ‘예정설’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 내의 중심 세력인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금욕주의’를 바탕으로 직업 노동에 헌신적으로 종사함으로써 자본주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때, 그는 칼뱅주의의 이러한 윤리가 소위 ‘자본주의 정신을 만들어 내었고, 이것이 결국 자본주의 발전의 추동력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2) 자본주의



인간이 금전욕 ․ 영리욕에 따라 이윤 획득을 위한 무제한적 탐욕을 추구한 결과 나타난 투기 자본주의, 약탈 자본주의, 식민지 자본주의, 모험가적 자본주의 등은 근대 이전 어느 시대의 어느 곳에서나 존재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선 서구에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가 등장했다. 바로 ‘합리적 자본주의’가 등장한 것이었다. 베버는 이를 “근대적 삶에서 가장 운명적인 힘”이라 불렀다.

베버에게 있어 근대화는 곧 합리화였다. 따라서 그에게 합리적 근대 자본주의는 사회의 전반적인 근대화 혹은 합리화 과정의 역사적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당시 근대화는 서구 문화에서만 발생한 특수하고도 독특한 현상이었다. 따라서 베버는 근대화, 곧 합리화를 서구만의 특수한 현상이고, 이로부터 비롯된 자본주의 역시 서구만의 특유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합리화는 근대적 자본주의를 기존의 여타 자본주의와 구분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이 때, 자본주의는 일차적으로 경제영역에서의 합리화이자 근대화였기 때문에 베버는 근대성 혹은 합리성을 자본주의의 상위 개념으로 보았다.

베버가 생각하기에, 근대 자본주의는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낳은 자본주의 정신의 실체였다. 종교개혁 이전 가톨릭적인 사회 체제에서 사람들은 이윤 추구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를 위한 노동을 경멸하고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만을 인정하였다. 이런 현상을 ‘전통주의’라 일컬었을 때, 이 당시 노동자에게 근대 자본주의적인 ‘공장 노동적 조직화’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공과 사를 정확히 구분하는 체계에 적응할 수 없었고, 분업적 숙련 노동에 익숙해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본주의 성립 초기에 자본가들이 생산성 향상을 위해 도입한 성과급제나, 반대로 임금을 인하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큰 이윤을 추구한 방법 모두 전통주의적 노동자들을 상대로는 모두 실패했다.

그래서 합리적 부기 같은 경영방식의 합리화가 이루어졌다. 부기 방식의 합리화는 “기술적 요인들의 계산가능성에 의존”한 서구 자본주의의 합리성의 가장 큰 요소인 합리적 기술 또는 기술의 합리성의 대표적인 실례였다. 자본주의는 이런 합리화를 통해 ‘노동의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조직화’와 ‘합리적 산업조직’을 모두 만들어 내었다. 게다가, 때마침 이루어진 “오직 서양에서만 비교적 잘 이루어진 법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완성도”는 자본주의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이만으로는 자본주의 발전의 동력을 설명하기에 힘들었다. 그래서 베버가 제시한 것이 ‘자본주의 정신’이었다. 그는 그 정신으로 인해 생겨난 합리적 경제윤리 ․ 직업윤리 ․ 생활윤리 등이 근대 자본주의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3) 종파적 특성



종교개혁은 인간의 삶에 대한 교회의 지배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형식을 다른 형식으로 대체시킨 것이었다. 기존의 지배 형식은 실제 생활에서 신도들이 별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느슨한 것이었지만, 종교개혁으로 인해 등장한 프로테스탄티즘은 가정생활 일체와 공적인 생활 전반에 걸쳐 엄격하고 진지한 규율을 요구해 왔던 것이다. 이로 인해 종파에 따라 직업적 분화가 형성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자본주의적 기업의 자본 소유자, 경영자들 중 가톨릭 계통의 사람들보다도 프로테스탄트 계통의 사람들이 현저하게 많다는 사실을 내포한 독일의 직업 통계와 자녀들을 인문계 학교에 입학시키는 부모들은 가톨릭교도가, 그리고 실업계 학교에 입학시키는 부모들은 프로테스탄트교도가 월등하게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있었다. 그래서 베버는 “프로테스탄트는 지배층으로서든 피지배층으로서든, 다수로서든 소수로서든 경제적 합리주의를 향한 특수한 경향을 가지고 있던 데 반해 가톨릭은 어느 경우든 간에 예나 지금이나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

베버는 이런 서로 다른 생활 태도에 대한 원인을 양 종파의 외적인 역사적 ․ 정치적 상황이 아닌 각각의 내적 특성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트보다 비세속적이고 금욕적이어서 그 신자들이 현세의 재화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는 통념이 있지만, 베버는 이러한 통속적인 도식으로는 결코 자본주의 정신이 가톨릭이 아닌 프로테스탄트에서만 나타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 예로, 프랑스 가톨릭교도들은 하층에서 매우 향학적이고 상층에서 종교에 정면으로 적대적이었다. 마찬가지로 독일 프로테스탄트들은 세속적 경제생활에 매몰되어 있었고 그 상층이 종교에 거의 무관심했다. 다라서 “이른바 가톨릭의 비세속성이나 프로테스탄티즘의 유물론적인 세속성 따위처럼 애매한 표상으로는 문제 해결에 아무런 출발점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베버는 ‘노동의 정신’이라고 불리든 ‘진보의 정신’이라고 불리든 그 명칭에 상관없이 그러한 정신을 프로테스탄티즘이 일깨운 것은 분명하지만 이 정신은 세속적 향락이나 계몽주의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프로테스탄티즘이 갖고 있는 갖고 있는 순수하게 종교적인 특성이 결국 그의 사회학적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중 하나인 ‘이념형’으로서 자본주의 정신이 되었고, 이는 결국 ‘자본주의적 에토스’이자 ‘프로테스탄티즘의 에토스’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 양자는 실제적인 의미가 같기 때문에 서로 교환 가능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4) 자본주의 정신



자본주의 정신은 기존의 가톨릭적 ‘전통주의’ 에토스처럼 이윤추구 활동을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이윤추구가 불가피한 악이거나 인생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자본주의에서처럼 도덕 이외의 것으로 보아 무제한의 본능과 충동에 따르도록 묵인하는 것도 아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이런 모험적 자본주의의 영리활동을 비난하였다. 기존의 ‘전통주의’와는 확실히 결별하여 이윤추구의 행위를 옹호하며 그것을 ‘에토스’의 차원, 즉 하나의 경제윤리이자 직업윤리로 승화시킴으로써 정당화하고 윤리화하는 것이다. 이 윤리가 결국 합리적 근대 자본주의의 바탕이 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 강조한 것은 일정한 직업을 자신의 천직, 즉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개인의 쾌락이나 향락을 희생하면서 엄격한 규율과 조직 아래서 자기 자신의 직책에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금욕주의적 직업윤리’였다. 다시 말해, 프로테스탄트에게는 자신의 직업이 무엇인가와 무관하게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직업 의무’가 부과 되었다. 왜냐하면 “직업의무의 행사로서의 부(富)의 추구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명령된 것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 때, 개인적 허영 또는 자유로운 자기실현, 무제한한 개성의 발휘 등은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프로테스탄트가 벌어들인 부의 생산적 사용만이 촉진될 뿐, 소비적 사용은 억제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그때껏 어느 사회에서도 제시되지 않았던 독특하고도 강력한 직업윤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5) 직업



세속적인 직업을 의미하는 독일어의 Beruf나 영어의 calling이라는 말 속에는 즉 신으로부터 주어진 소명이라는 종교적 관념이 들어가 있다. 베버에 따르면 이런 어감은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한 민족들에게서는 잘 나타나지만, 고전적 고대에서나 가톨릭이 우세한 민족들에게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요컨대 ‘소명으로서의 직업’이라는 개념은 중세 가톨릭 혹은 고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종교개혁과 더불어 프로테스탄티즘이 출현한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직업을 의미하는 현재와 같은 의미에서의 Beruf라는 말은 성경 번역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로 루터가 신구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우리가 쓰는 세속적 직업의 개념으로 Beruf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때부터 세속적인 의무의 수행이야말로 신에게서 축복 받을 유일한 것이고 그것만이 신의 뜻이며 “모든 직업은 신 앞에서 단적으로 같은 가치를 갖는다.”는 견해가 등장한다.

루터는 세속적 윤리를 경시하지 않고 세속적 의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세속적 직업노동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인간 노동과 직업윤리에 깊은 의의를 주었다. 그러나 그의 한계는 ‘순응’을 강조한데에 있었다. 그가 생각한 직업 노동이란 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각 개인은 그에게 주어진 직업과 신분 같은 사회적 지위에 순응하여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신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과 주어진 환경에 대한 무조건적 순응’을 강조하였고, 이는 ‘루터가 전통주의에 빠져들고 있다’는 베버의 비판의 빌미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직 신앙만으로’(sola fide), 즉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구제된다고 하는 내면적 구제만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신앙이 현실의 삶으로부터 유리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루터는 주어진 사회적 지위에의 순응과, 세속적 권력에의 복종을 강조하였으므로 적극적인 직업윤리를 발전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베버가 제시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적극적 직업윤리는 칼뱅에 의해서 비로소 금욕주의적 형태로 형성될 수 있었다.




  6) 프로테스탄티즘(칼뱅주의)의 윤리와 금욕주의



칼뱅주의는 16 ~ 17세기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서 정치투쟁과 문화투쟁을 가장 격렬히 수행하였고, 정치적 압박 또한 가장 심하게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칼뱅주의는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베버의 이념형적 고찰에 가장 적합한 사례다.

칼뱅주의에서 제시한 예정설은 “이 세계의 일과 인간생활의 모든 일이 신에 의해 미리 규정되어 있어서 신의 의지에 완전히 지배되고 있다는 사상”1)이다. 다시 말해, 인간 개개인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신의 의지로 미리 정해진다는 것이다.

이 교리에서는 “신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말로써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한다. 모든 것은 신의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다. 운명을 변경하거나 알려고 하는 것 자체는 신을 모독하는 행위가 된다. 그 결과, 신의 존재는 비인격적인 존재로서 변모하며, 모든 피조물은 “메울 수 없는 심연으로” 신과 격리되어 있다. 여기서 신의 이러한 극단적 비인격성과 함께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신의 영역에 대하여 알 수 없다는 신에 대한, 특히 신의 구원의 영역에 대한 불가지성을 확인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예정설의 교리는 무한한 신의 영역에 대한 숙명론적 포기2)를 낳게 된다. 칼뱅주의의 이런 생각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뒷받침된다.

신이 자신의 운명을 정해 놓았지만, 스스로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 혹은 그 무엇도 개인을 도와줄 수가 없다. 심지어 설교자도, 성례도, 교회도 도와줄 수가 없다. 설교자가 도울 수 없는 이유는 선택자만이 신의 말을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며, 성례도 소용이 없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주관적 신앙의 외적인 보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도 구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외형상의 교회에는 속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속하여 교회 규율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나 성례에 의한 구원의 완전한 폐기가 결정적인 가톨릭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이는 루터주의에서는 결코 철저하지 못한 것이었다. 또한, 이는 신과 개인 자신이 직접적으로 대면한다는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으로 인해 가톨릭적 ‘마법’ ․ ‘주술’로부터 ‘탈’하게 되는 ‘탈주술화’ ․ ‘탈마법화’가 비로소 완결되게 된 것이다.

  한편, 각 개인은 ‘자신은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심지어 신으로부터 까지’ 떨어져있다는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다. 베버는 이러한 전대미문의 개인적 고립감이 서구 근대인의 개인주의적 경향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내면적 고립이 곧 모든 육체적, 감정적 요소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귀결되었으며, 이는 모든 감각적 문화 일반을 근본적으로 적대시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는 근대 사회의 ‘비환상적 ․ 현실적’이고 비관주의적인 개인주의의 뿌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대표적인 예는 버니언(Bunnyan)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론으로 돌아가, 칼뱅주의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러한 고립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다시금 ‘예정설’에 따라 직업노동에 헌신함으로써 불안감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예정설에 따르면 현세는 신의 영광을 위해 오직 그 목적만을 위해 존재한다. 선택된 기독교인은 현세에서 최선을 다해 신의 계명을 수행하여 오로지 그의 영광을 증대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신이 사람들에게 바라는 바는 사회적 실행이다. “왜냐하면 신은 사회적 형성이 자신의 율법에 맞게 이루어져 그 형성이 자신의 목적에 일치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행하는 사회적 활동은 신의 영광을 증대시키기 위한 활동이 되는 것이며, 현세 전체의 사회에 도움이 되는 직업노동 역시 동일한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일반 신도들의 “어떻게 나는 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은 ‘목회적 권고’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답변되고, 신도들의 직업 활동을 이끌 수 있었다. 먼저, 누구라도 자신을 선택된 자라고 생각하고 모든 의심을 악마의 유혹으로 단정하여 무조건 그리고 의무적으로 거부하라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부단한 직업노동이 자기 확신의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즉 이 두 번째 ‘권고’에 따르면, 직업 노동에 의해서만 종교적 의심이 사리지고 은총의 확실성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구원에 대한 증거에 집착하는 신도들에게 내려진 최종적인 답변은, ‘세속적 노동에 충실하라’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노동이 금욕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던 서양 교회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은 단지 금욕의 수단이라는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신이 지정한 삶의 자기 목적”이라는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라는 신의 명령을 최선을 다해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욕이 결여돼 있다는 것은 단적으로 신에 의한 구원의 은총이 결여돼 있다는 말과 같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바울의 명제는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적용된다. 부유한 자들이라도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의 섭리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하나의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준비했으며, 그러므로 그 누구라도 자신의 소명에 최선을 다해 노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는 신이 이윤의 기회를 주신다면, 그것은 신의 의도이므로 따라서 그 기회를 사용하여 신의 부르심, 즉 소명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관련 베버는 박스터를 인용하여, “육욕과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신을 위해서” 부유해지도록 노동해야 한다는 프로테스탄트적 관념을 설명한다. 여기서 부의 추구가 사악한 것으로서 위험시 되는 것은 “게으른 휴식과 죄 많은 삶의 향락에 대한 유혹”일 경우에만, 즉 “근심 없이 안일하게 살기 위한 것일 경우”에로 한정된다. 신을 위한 경우라면 부의 추구는 허용될 뿐만 아니라, 더 적절하게는 명령되는 바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윤추구에 대한 섭리적 해석이 명백해진다.

신을 위한 경우라면 모든 부의 추구는 도덕적으로 허용된다. 더 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신에 의해 “명령된 것”이다. 돈은 증식되어야 한다. 가난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병들고 싶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선이자 신의 영광을 해치는 것으로 비난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노동능력이 있는 자가 구걸하는 행위는 당연히 용납될 수 없다. 그것은 나태의 죄악이며 형제애의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간주된다. 베버에 따르면 중세의 윤리는 구걸을 용인했을 뿐 아니라 탁발승단에서는 그것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또한 걸인들은 유산자들에게 보시를 통한 선행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하여 그들조차도 하나의 신분으로서 간주되어 대우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는 바로 구걸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시각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직업의 금욕적 의의를 강조한 것은 근대의 전문화된 직업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했듯이 이윤추구에 대한 섭리적 해석은 근대 기업가의 활동을 정당화했다. 영리활동은 근대 기업가의 ‘소명’이라 할 수 있다.

베버에 따르면, 영리활동을 ‘소명’으로 보는 것이 근대 기업가의 특징이라면 노동을 ‘소명’으로 보는 것도 근대 노동자의 특징이다. 요컨대 종교적 금욕의 힘은 근대적 기업가에게 건전하고 양심적이며 아주 근면한 노동자들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생활의 반성과 합리적이고 조직적 생활 태도와 같은 합리적 ․ 금욕적 태도는 종교개혁 이전 중세까지는 수도원의 수사들에게만 강조되던 계율이었지만,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들에게는 이러한 금욕이 세속에서부터 강조되었다. 이러한 금욕주의의 기원은 바울의 기독교적 원시공동체인데, 그리고 이를 정착시킨 가톨릭 수도원의 금욕주의를 루터가 이어받고, 칼뱅주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이를 다시 세속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 교인이 일생동안 수도승이 되어야 한다”는 강제적인 주장을 교리로 삼은 칼뱅주의는 베버에 의해 ‘세속적인 종교적 귀족주의’로 명명되었다. 한편, 수사와 같은 성직자만의 금욕을 강조한 가톨릭은 ‘탈세속적 혹은 정신적인 종교적 귀족주의’라고 명명되었다.



  7) 기타 종파



칼뱅주의 외에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을 주장한 종파로는 ‘경건주의’ ․ ‘매서디즘’ ․ ‘침례교’ 등이 있다. 먼저, 경건주의(pietism, 敬虔主義)란 17세기 말경 독일 루터파 교회의 정통주의적 고정화(固定化) 경향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프로테스탄트적 종교운동을 가리킨다. 이 종파 역시 예정설과 금욕적 직업윤리를 강조하였지만 칼뱅주의와 비교해 볼 때 종교 이론상으로 철저하지 못한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루터의 영향과 신앙의 감정적 성격이 잔존함으로써 칼뱅주의에 비해 생활의 합리화가 훨씬 낮았다.

감리교 또는 감리회라고도 불리는 매서디즘(Methodismus)은 1729년 영국에서 존 웨슬리에 의해서 시작된 기독교 교파인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매서디즘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생활의 방법적인 조직화를 강조한다. 이 역시 칼뱅주의 및 경건주의와 더불어 금욕적 성격을 공유하지만, 경건주의처럼 칼뱅주의에 비해 취약한 금욕적 직업윤리를 갖는다.

한편, 베버에 따르면 침례교 및 그 계통의 교파들 역시 세속적 금욕을 강화하는 성격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살펴본 다른 교파들과 마찬가지로 금욕주의적 직업윤리의 체계화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2. 막스 베버 테제에 대한 논쟁



막스 베버의 논문 발표 이후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학문적 논쟁의 초점이 되어 왔다.

막스 베버는 베르너 좀바르트의 ‘자본주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발전시켜 이 특이한 ‘정신’의 기원 혹은 원천에 대하여 칼뱅주의의 종교적 윤리의 일종의 부산물로서 나타난 것이라는 가설적 명제를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여러 상이한  많은 학자들(사회학자, 역사학자, 경제사가,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들의 관심을 끌게 됨. 이들 학자들 중 일부는 베버의 입장을 공격하였고, 일부는 지지하였다. 또 다른 일부는 수정된 형태로, 또는 주의깊게 조건부 형태로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베버의 방법론을, 혹은 그의 결론을, 혹은 그 모두를 오해하거나 그릇 해석하였다.

베버에 의해 제기되고 답변된 문제들에 관한 학문적 견해가 현재까지 어떤 양상을 보이고 있는가를 지금부터의 발표를 통해 조감해보도록 하자.

1909년에 독일의 학자 라흐팔(F, Rachfall)은 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티즘보다도 훨씬 더 오래 된 것이며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을 야기하는 데는 프로테스탄티즘 보다도 다른 요인들이 휠씬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베버의 명제를 공격햇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 1912년에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는 <기독교의 교회 및 교단의 사회 이념>에서 베버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베버 명제에 대한 그의 지지가 효과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그것은 “베버-트뢸치 명제”라고까지 불리우기도 한다. 그렇다면 트뢸치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살피도록 하자.

  1)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



<기독교의 교회 및 교단의 사회 이념(Die Sozialen der Christlichen Kirchen und Gruppen)(1912)> 에서 그는 기독교의 발생, 성장, 변모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 나타난 그 성장의 정지가 어느 정도까지 사회적으로 결정지어졌는가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는 모든 종교적-교조적-신학적 인자를 그것이 발생한 사회적 조건의 반영적 기능으로 파악하였다.

칼뱅주의 경제윤리는 근대적 경제 정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캘빈은 교역과 산업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의 영역내에서 기독교의 정신이 표현될 수 있고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화폐 경제 체제와, 직업적 노동의 형태에 기초를 둔 산업적 생산을 인정하였다. 이런 생각은 제네바라는 도시의 특수한 경제적 상황, 즉 부르주아적이면서도 매우 소규모적인 경제적 조건속에서 가능하였다. 즉 루터 파나 가톨릭 윤리에서와 달리 자본주의가 칼뱅주의의 윤리 속으로 침투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제네바의 당시 상황 덕분이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기독교의 사회적 교리 가운데서 근대의 경제적 상황의 기초를 아무런 유보 조건 없이 받아들인 유일한 형태였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칼뱅주의는 양자간에 ‘친연성’을 지니고 있다.3) 칼뱅주의 윤리학은 재부의 축적에 대해 지적, 윤리적 뒷받침을 마련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배금주의를 거부하는 한도 내에서는 그 활동을 조직화하고 강력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내적으로 지원해줄 수도 있었다. 

한편 베버에게 영향을 주었던 베르너 좀바르트도 자기대로 연구를 계속하여 1913년에는 그 나름의 결론을 내놓았다. 그는 근대 자본주의의 전개가 자기가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일찍 시작되었다고 결론지었는데 이는 베버에 대한 라흐팔의 비판에 힘을 보태 주는 것이었다.

 

  2)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



<부르주아>(1913)에서 그는 문제를 보는 시각이나 방법론에 있어 베버와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베버의 주장과 다르게 스페인, 아일랜드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에서 가톨리시즘은 자본주의를 조장하고 촉진하였다. 스콜라 철학의 합리주의는 자본주의적 성장에 큰 자극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검약을 강조하고 나태를 금지하며 장사에 있어서의 정직을 중요시여긴 그들의 가르침은 자본주의 발전에 귀중한 밑거름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스콜라 학파는 고리 대금업의 금지를 통해 역설적으로 근대 부르주아적 자본 개념을 지지하고 화폐가 자본으로 전화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후기 스콜라 학자들은 자본의 투자와 단순한 금전의 대부를 뚜렷이 구별 짓고 있으며, 후자의 경우에 대가를 받는 것은 합법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이는 칼뱅주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프로테스탄티즘의 어떤 요소들은 무의식중에 그 성장을 용이하게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이런 영향을 끼친 윤리적 태도들은 스콜라 철학의 원리와 동일한 것이며, 프로테스탄트가 보여준 엄격성의 원인은 17세기 이르러 종교적인 감정이 더욱 깊어졌기 때문일 뿐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발달에 끼친 영향은 결코 대단한 것이 될 수 없다.

좀바르트의 이 연구가 발표되었을 무렵, 이 문제는 학문적인 격렬한 논쟁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많은 논지자들이 베버의 명제에 대해 부여하는 평가는 그들 자신의 경제적 지향성이나 종교적 소속 관계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하여 베버의 명제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당파적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3) R. H. 토니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Religion and the Rise of Capitalism)>(1926)에서 토니는 경제사가를 대표하는 견해를 보인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과 자본주의의 발흥 사이에 인과 관계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정신 창출에 있어서 칼뱅주의의 역할을 유일한 것으로서 강조한 것은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간의 광범위한 관계를 설명하는데 적절하지 못하다. 베버는 그것을 실제 역사적으로 그랬던 것보다 더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처럼 다루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그것의 불변성과 일관성을 과장하고 있다. 칼뱅주의 운동 후기 단계로부터 원용한 자료들을 다루는 데 있어 베버는 캘빈이 죽은 후 한 세기 동안 칼뱅주의가 겪은 심원한 변화를 충분하게 고려하지 않고 있다. 16~17세기의 일반적인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조건들 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티즘 운동 전체가 자본주의 발달에 원인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의 정신”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산물로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후기 프로테스탄티즘의 어떤 측면에서 그 것이 그 에너지를 분기케하고 그것이 이미 지녔던 정력적인 기질을 강화시켜 준 것은 사실이다.






  4) 윈드럽 S. 허드슨(Winthrop S. Hudson)



<프로테스탄티즘와 자본주의 정신>논문에서 허드슨은 토니의 접근 양식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칼뱅주의에 대한 베버의 개념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는 17세기 프로테스탄티즘와 16세기의 칼뱅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한 것은 과도한 단순화이다. 또한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토니의 성격 규정은 왜곡된 것이며, 그 왜곡은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것이다. 소명의 개념을 그 전체적 맥락에서 고립시켜 이용하였기 때문에 왜곡이 일어났고, 이 왜곡이 잘못된 해석을 낳았다. 직업적 활동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적 추진력은 소명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 및 그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칼뱅주의적 관졈의 보다 광범위한 맥락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5) H. M. 로버트슨4)의 비판 : 『막스 베버와 그 학파에 대한 비판』



베버의 심리학적 요소에 대한 강조는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으나, 베버의 논증은 올바른 역사적 분석에 의한 건전한 논증이 아니다. 자본주의 정신은 종교적 충동에서 유래한 것이라기보다는 물질적 조건에서 발흥한 것이다.



ㆍ베버의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규정은 자의적이다 : 베버에게 자본주의 정신은 자신의 종교에서 도출된 결론에서 얻어진 ‘합리적’인 것이었는데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본가는 자신의 사업과 종교를 분리시키는 세속적인 사람들이다.

ㆍ‘소명’에 관하여 : 부를 향한 소명 같은 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필요없는 것이다.5) 오히려 ‘소명’은 개인보다는 공공의 이득을 추구하는 개념으로서도 분석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티즘 내부에서도 보수적 견해는 매우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ㆍ카톨릭의 세속적 금욕주의 : 베버가 주요한 개념으로 다루었던 프로테스탄트의 세속적 금욕주의 역시 카톨릭에서 강조되고 있던 것이었다.6) 결론적으로 프로테스탄트가 특별히 지녔던 경제적 교리는 없는 셈이 된다. 카톨릭의 영향을 인정한다면, 종교개혁 이후에 독립적인 두 교리의 공통 원인을 찾아서 그것을 자본주의 정신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중세기는 그 안에 변화를 내재하고 있었으며7), 자본주의 발흥의 물적 원인인 회계학, 부기기술은 오히려 ‘소명’보다 자본주의의 생성을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ㆍ교회의 자본주의 적응 :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양자에서 나타나는 이중적 태도, 즉 자본주의에 대한 보수 혹은 우호적 태도는 교회의 자본주의 적응에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도시와 상업의 발전단계에 적응하여야 했고 새로운 계급에게 새로운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경제적 발전 자체가 부르주아의 승리를 가져다 주었으며, 많은 부분은 이에 관련하여 분석되어야 한다.




  6) 아민토레 판파니8)의 비판 : 『가톨리시즘, 프로테스탄티즘, 자본주의』



이미 프로테스탄트 혁명 이전에 자본주의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 정신의 원인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문제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의 촉진제였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ㆍ프로테스탄티즘은 자본주의 형성에 긍정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 종교개혁 지역에서 자본주의적 방식이 발달할 수 있었으나, 이것이 그들의 종교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본다. (오히려 그들의 종교는 경제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성이 강했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티즘에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이 합당하다.9) 다만 종교적 관용과 자유에 있어 긍정적이었던 이들이 근대적 감정을 양산했다는 분석은 가능할 수 있다.10)

ㆍ자본주의 정신은 프로테스탄티즘 이전의 문제다 : 이들의 삶이 이들의 교리를 변화시켰다는 평가가 더 적합하다. 자본주의 정신은 프로테스탄티즘 이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종교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있으나, 이것을 최초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자본주의 정신은 인간 속에서 항상 맹아적 형태로 존재해 왔으며, 휴머니즘에 의한 가톨리시즘의 제약이 약해짐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기업가의 도덕이 지상에서 합법적 기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종교가 깨닫는 단계를 대표할 뿐이다.




  7) 알버트 하이머11)의 비판 :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경제관』



여기서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이 자본주의적 성향에 취한 태도에 방점을 찍고 베버 테제를 분석한다.



ㆍ종교적 요인에 관한 분석 실패 : 칼뱅과 루터를 경제관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칼뱅이 좀 더 자본주의적인 경제관계(화폐경제, 교역, 산업 등)에 더 집중하여 교리상에 그것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견해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칼뱅의 전성기의 저서와 루터의 경제분야에 관련한 교리 사이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일치점이 발견되는데, 이웃의 복제에 대한 관심이 중요하다. 즉 베버 테제에서의 칼뱅 교리는 왜곡된 것이다. 전반적으로 칼뱅, 루터, 쯔빙글리까지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경제관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이자용인, 근면, 직업의 신성성 등은 프로테스탄티즘 이전에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탈리아 가톨리시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12) 프로테스탄티즘과 가톨리시즘의 경제관은 엇비슷하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나아가, 로버트슨과 판파니의 견해에 찬성하며, 칼뱅주의가 자본주의 형성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생각한다.13) 



3. 막스 베버 테제와 그 논쟁의 학문적, 역사적 영향



  1) 막스 베버는 무엇을 말하려 했나



그는 경제현상을 고립적으로 취급하는 태도를 반대하였으며, 경제와 전체 문화 사이의 상호관련을 중시하였다. 그는 현대 유럽문명과 자본주의 분석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그 점에서 ‘합리주의’를 중시하였으며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를 그 주요 분석 도구로 삼은 것이다.

그는 유물론적 방법이 유용하다는 것은 인정했으나, 경제적 결정론에는 단호히 반대하였고 이 책에서도 그 시각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시도는 종교에 의해 이루어진 관념이 전적으로 현실 자본주의의 기초가 되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중 하나’일 수 있다는 다원주의적 분석의 일환이라 하겠다. 다양한 문화적 인자들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모색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즉 제한된 시도이다. 모든 비판은 이 점을 고려하고 수행될 필요가 있다. 그가 세계 종교에 대한 연구를 했다는 사실을 이 측면에서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2) 막스 베버 테제에 대한 비판의 성격



- 왜 강한 논쟁이 일어났나? : 막스 베버 자신이 이 테제를 논쟁적으로 저술하였으며, 바로 불꽃 튀는 논쟁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강한 논쟁의 중요한 이유로 들 수 있는 것은, 우선 그의 전공을 무시한 분석이라는 점 때문에 엄청난 영역에서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종교-특히 기독교’와 ‘자본주의’가 근대적 서구 경제의 기원을 해석하는데 모두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도 그러하다. 종교적 관념의 영향력을 주요하게 봄으로써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큰 반대를 불러일으켰으며, 가톨릭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 비판의 주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베버의 규정은 잘못이다.

2. 베버는 카톨릭의 교리를 잘못 해석했다.

3. 프로테스탄티즘와 근대 자본주의와의 연관성에 대한 베버의 견해에 대한 근거는 충분치 않다.

4. ‘합리적’ 자본주의와 그에 선행하는 자본주의적 유형의 차이를 이해하기 힘들다.

5. 프로테스탄티즘와 근대 자본주의간의 인과관계가 잘못되었다. : 이 부분이 논쟁의 핵심부라고 평할 수 있다.



  3) 유럽 자본주의의 모순과 막스 베버



- 19세기 중엽 칼 맑스가 나타나 방향성을 잃은 유럽 자본주의에 도전한다.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며, 자본주의의 모순은 계급투쟁로서만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모순은 러시아혁명과 1차 세계대전을 통해 현상화된 것으로 유럽인들에게 느껴졌다. 이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막스 베버의 역할을 찾을 수 있다.



- 베버는 이에 유럽 자본주의사회가 가치상실과 소외로 대표되는 불안정한 사회로 진단하고, 개인의 사회적 행위에 초점을 맞춘 연구를 진행함으로서, 가치지향적 합리성을 제시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정신에 대한 탐구를 서두른다. 그 결실 중 하나가 이 테제인 것이다. 유럽 자본주의의 형성과 쇠락이 ‘필연’이라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관에 대해 다원적 분석과 자본주의의 종교적 가치지향성을 지적함으로서, 자본주의의 병폐에 처방전을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4) 의의



- 사회학, 역사학 방법론에 기여 : 사회학과 역사학에서 도식적 결정론이나 사회진화론을 극복한 주장이라는 데 큰 의의가 있으며, 종교와 경제의 관계에서 총체적 역사인식의 관점의 맹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막스 베버의 주장은 중요하다. 논쟁을 통해 종교와 경제와의 관계에 대한 환기가 일어났고, 마르크스주의의 대척점으로서의 막스 베버의 방법론이 등장했다.



- 새로운 형태로의 변형 : 많은 비판에 의해 새로운 규정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칼뱅주의가 경제에 미친 영향은 부정하지만, 정치에 미친 영향을 긍정하는 주장이 나타났다.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근본적으로 근대지향적 운동이 아니며, 이를 직접원인으로 보기보다는 유럽사회의 근대적 재구성 속에서 논의해야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4. 마치며



지난 20세기 말 동아시아에서 새로이 발전한 자본주의의 형태는 베버가 다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베버의 생각처럼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발시킨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종류의 종교윤리인 ‘유교윤리’가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유교 사상의 권위자인 미국 하버드대의 투웨이밍 교수는 ‘신유교 윤리’(the New Confucian Ethic)라는 말로써 20세기 후반에 동아시아 5개국(한국, 일본, 대만, 홍콩 및 싱가포르)이 고도 성장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는 이를 서구 선진국의 자본주의 정신 즉,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에 버금가는 ‘동아시아의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말한 것이다.

동아시아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지난 90년대 말, 여러 나라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진 ‘외환위기’로 인해 일부 퇴색되기도 하였지만, 아직 유교윤리가 동아시아 자본주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다. 또한, 베버의 논지가 이후 벌어진 논쟁에 의해 지지와 비판을 받으며 오늘날에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잃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종교 현상을 경제 현상에 연관시킨 점과 그 개연성은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티즘의 등장이 절대적으로 합리적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을 촉발시켰다고만은 할 수 없겠지만, 어느 정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는 이의를 표할 수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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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2일 기독교와 유럽문명 발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