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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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 Zenol

090119 개강

zeno 2009. 1. 20. 16:29
  종강한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개강이다. 사실 힘들던 지난 학기가 끝난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긴 하지만, 생각보다 그 한 달이 짧으면서도 길었다. 하루하루가 정말 빨리 갔지만, 그렇게 30여 일이 모인 한 달은 꽤나 길었다. 하루하루를 나름 충실히 살았던건가.
  이제 내일이면 본격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 지난 열흘 간은 '적응기간'이었다고 하면 될 것 같다. 아직 한국과의 단절, 과거와의 단절이 다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 어처구니 없게 사람이 6명이나 죽었는데 어찌 한국과 연이 끊어지겠는가! 그리고 블로그에 업로드할 생각인 지난 학기 레포트가 3개나 남아있다. - 어쨌든 물리적 시간의 흐름으로 인하여 개강을 하게 되었다. 장강의 물결은 도도하게나마 계속 흐르기 때문인가.
  '천민'이라는 신분 때문에 - 이 곳에 온 것에 대해 '유학'이니, '교환학생'이니 하는 잘못된 표현이 붙여지기도 했지만, 현지에 와서 알게된 사실은 '천민'이라는 지나친 표현에 걸맞진 않더라도 분명히 '차별의 대상'이긴 하다는 것이다. 현재 나는 어떠한 수업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다. 등록되고 싶으면, 먼저 돈을 내란다. 그것으로 등록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해당 수업에 자리가 나야만 받아줄 수 있단다. 고등학교 때 <맨큐의 경제학>에서 열심히 봤던 '가격 차별화price discrimination'의 전형적인 상품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최적의 이윤을 위해서는 인간도 상품으로! - (고용 불안정성이 아닌) 수강 불안정성에 놓인 처지이다. 뭐 애초에 경제학 수업만 들으려고 온 것은 아니니까, 라고 자위하고도 싶지만 1학점당 425달러 씩, 생활비와 기숙사비를 제외한 순수 학비로만 5000달러가 넘는 돈을 내야 하는데 단순히 넘어갈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다른 과의 과목을 청강할 생각이지만, 그래도 일단 등록하기로 되어 있는 수업에 제대로 등록은 되어야 할텐데, 이건 뭐 갑갑하다. 일단 이번 주에 수업을 들어가 본 뒤에 빨리 결정해서 결제하는 수밖에.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보면서도 '어쩔 수 없잖아'라는 말로 또 현실과 타협하는 것만 같아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데 딱히 설레진 않는다. 오히려 겁이 난다. '영문'에 가위 눌린 탓이다. 아직 - 신분 탓에 수강할 수 있는 수업이 확정되지 않은 탓에 -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매주 논문을 비롯한 영문으로 된 글을 수백 쪽씩 봐야 할 것 같아서이다.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 같은 투정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글로도 매주 수백 쪽을 보는 건 벅찬 일인 것을! 그래도 뭐 내가 선택한 거니까, 해야겠지. 다행히도 하다 힘들면 포기하면 되고. 참고 꾸준히 보다 보면 아무래도 좀 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그리고 이번엔 좀 도망가는 것을 참아볼테다. 사실 스스로가 도망가는 것에 참 익숙해진 것 같다. 고등학교 때도 공부하다 12시만 되면 '건강'을 빌미로 잤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항상 잠은 챙겨잤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뒤쳐진 것 같아 조금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늘 '경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노력은 하지만, 또 경쟁을 통해 척도화되는 능력/실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이들 때문에 최소한의 수준은 갖추어야겠다고 생각하다보니 그렇다. 그래도 여기선 좀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으니까, 시도해봐야지.
  자유롭게 공부하고 싶어서 청강하고 싶은 과목들을 골랐다. 수강과목까지 세어보니 총 13개. 이건 뭐 말이 안 되는구만. 중복되는 것을 추리고, 지나치게 무리인 것을 추리면 뭐 대략 수강 4과목에 청강 3과목 정도를 하지 않을까 싶다.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면 더 줄 수도 있고. 청강을 아예 포기할 수도 있고. 사실 1주일 전에 시간표 짤 때 까지만 하더라도 참 호기롭게 굴었었는데,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까 좀 겁이 난다. 그래도, 뭐, 잘 지나가겠지. 글을 쓰다가 용산 참사 때문에 또 다시 울컥해서 머리가 하얘졌다. 아니, 그냥 할 말이 없을 뿐인가. 그저 네 달 뒤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져 있기를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