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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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zeno 2009. 1. 13. 15:30

PM 01:00 (한국시간 2009년 1월 10일)

집을 나섰다. 동생의 렌즈를 점검받고 점심을 먹으며 ‘공항 가는 길’이 늦어졌다. 02:10 가량 출발했다. 예상보다 청담동과 압구정동에서 차가 많이 막혔다. 03:40 경에 공항에 도착했다.

빵빵하게 채운 이민가방이 결국 공항에 내리자마자 말썽을 부렸다. 바퀴가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균형이 잘 잡히지 않는 것이다. 서둘러 체크인 카운터로 갔다. 지난 밤, 인터넷을 통해 미리 체크인을 해둔 턱에 다행히 보딩패스 발급은 빨리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가방! 애초에 가방을 개당 23kg씩 2개를 가져갈 수 있는 현실적 제약 내에서 짐을 좀 줄이고자 큰 이민가방 하나에 짐을 다 챙겨보고자 했는데 이것이 달아보니 32kg이었던 것. 사실 지난 밤 짐을 사던 때까지만 하더라도 23kg 제한 내에서 무난히 짐을 쌀 것 같았는데, 계획했던 것들을 다 챙긴 뒤 생각나는 대로 뒤에 우겨넣었던 것이 아무래도 화를 부른 것 같다. 특히, 집에서 10년 넘게 써오던 체중계 위에서 가방의 무게를 재려고 무리하다가 부수고 말았던 터라 집에서 나오기 전에 최종 계량을 해보지 못했다. 결국 카운터 직원의 조언에 따라 상자를 하나 사서 10kg 가량을 덜어내어 부치는 짐을 2개로 만들었다. 아무래도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려서 기숙사까지 갈 때 고생할 것 같다. 밴을 타고 갈 생각이긴 하지만, 기숙사 바로 앞에 내린다고 해도 이 짐들을 운반하는 게 결코 쉽지는 않을 것 같다.

 

PM 04:10

최근에 완공된 탑승동에 가서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본래의 탑승동과 신탑승동을 연결하는 전철만 30분이 걸린다기에 황급히 가족들과 이별하고 탑승동으로 향했다. 한 시간 뒤인 05:10이 보딩 타임이라 보안 검색과 출국 수속, 이동까지 하는데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가족들은 내가 출국한 뒤 40분 뒤인 06:20에 방콕행 비행기를 타고 태국으로 건너가 여행을 할 계획이라 공항에 함께 왔다. 솔직히 가는 마당에 이리저리 일들이 생기니 좀 정신이 없다.

 

PM 04:40

알고 보니 체크인 카운터에서 신탑승동까지 30분가량이 걸린다는 거였다. 내가 오해했던 전철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보딩 타임도 조금 남아서 괜히 너무 일찍 온 것 같아 조금 아쉽다. 면세점을 둘러봐도 딱히 살 것이 없다. 위스키를 한 병 살까 생각했었지만, 며칠 전에 술 먹고 죽은 것도 조금 마음에 걸리고, 딱히 마음에 들거나 아는 술도 없고, 생각보다 술들이 비싸다. 카메라 렌즈도 꽤 비싸고, 나머지 명품들은 봐도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그래서 탑승구에 조금 일찍 갔는데 한산하다. 만석이라더니 아직 시간이 조금 일러서인가.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다 보니 전자사전에 들어갈 건전지를 안 산 것이 생각났다. 서둘러 편의점을 찾았는데 없어서 전자제품 매장으로 갔다. 건전지를 찾다가 트랜스(컨버터)를 보니 이것도 사려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미국은 (낙후된 국가라서) 아직도 110v를 사용하기 때문에 트랜스가 필요하다. 이런 중요한 것을 까먹다니! 역시 불안하다... 공항에서 건전지는 안 판단다. 폭발 위험성 때문인가. 아쉽게도 미국 가서 사야겠다.

 

PM 05:30

탑승구로 돌아와 희대의 막장드라마 ‘너는 내 운명’의 재방송을 보며 보딩을 기다렸는데 많이 늦어졌다. 게다가 내 예상과는 달리 이코노미석의 후측부터 탑승하는 바람에 더욱 늦었다. 초조한 마음에 괜히 탑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아! 늦게 타면 볼 만한 신문이 다 떨어졌을 텐데! 탑승구를 통과해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보안 검색을 또 실시한다. 그러게 평소에 좀 착하게 살지, 엄하게 아무나 때리고 다니니 보복당할까 봐 저렇게 벌벌 떤다. 생각보다 검색이 허술하다. 가방의 가운데를 잠시 열어보더니 짐으로 가득 찬데다가 내가 “책이에요.”라고 하니 바로 통과시킨다. 무의미하게 탑승시간을 지연시킬 뿐이다.

 

PM 06:00

이륙한 뒤 예상과 달리 저녁이 아닌 땅콩을 준다. 배가 좀 고픈데 아쉽다. 하지만 훌륭한 기내 엔터테인먼트 서비스 덕에 그간 보고 싶었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본다. 생각보다 괜찮다. 박스오피스에서 그렇게 망할 정도는 아닌데. 다만 후반부에 곽경택 식의 촌스러움이 조금 묻어난다. 영화가 끝날 때 쯤 저녁이 나왔다. 쌀밥에 고추장 양념을 한 생선구이가 주메뉴. 맛이 괜찮다. 빵 맛이 조금 아쉬움. 곁들인 타이거 맥주도 나쁘지 않다. 이게 싱가폴 거였군! 한국에서 사 먹을 때보다 맛이 낫다. 후식으로 나온 끌레도르 아이스크림도 괜찮다. 씹히는 치즈 덩어리가 조금 싫기는 하지만. 영화가 끝타 ‘놀러와’를 틀엇다. 아쉽게도 한국에서 지난 가을에 봤던 빅뱅편이다. 그래도 그냥 봤다.

기내 엔터테인먼트 서비스를 가장 잘 보여주는 리모컨. 비행기가 몇 년 사이에 급속도로 진화한 것 같다.

 

PM 09:25

한국 영상들 보는 것도 조금 지겨워 일기장을 꺼냈다. 애초에 여행기를 쓰려고 꺼낸 건데 어쩌다보니 미국에 가는 다짐, 약해지지 않기 위한 자세 등에 대해 적었다. 갑자기 돌아가고 싶은 기분, 반년간 잘 지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필휘지로 쓰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아니, 억지로 나아지려고 한 것.

집에서 출발한 뒤 지금까지를 정리하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즉, 지금은 10:25경) 한국 노래를 듣고 있는데 꽤 방대하다. 성시경, 조성모 등의 데뷔 앨범, 90년대를 풍미한 가수들의 앨범, 최근의 앨범까지 다양하다. 지금 듣고 있는 ‘한국 드라마 사랑 노래’ 컴필레이션에 있는 노래들은 대부분 아는 것들이라 듣기 괜찮다. 다만 영어를 죄다 한글로 옮겨놔 제목이 조금 웃기고 낯설다. 음색들도 일부 다른 게, 나중에 다른 가수가 부른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스윗 소로우) 8. 난 믿어 -> I believe (신승훈) 10. 보고싶어 -> 보고싶다 (김범수) 11. 아마도 사랑은 -> Perhaps Love (Howl & J) 13. 내 사랑이 되어줘 -> Be My Love (클래지콰이) 14. 눈꽃 -> 눈의 꽃 (박효신) 17. 그녀는 -> She is (클래지콰이) '>

어느새 도착이 5시간 여 밖에 남지 않았다. 애매하다. 도착하면 오전 11시 경이라 시차적응을 위해 하루를 버티려면 좀 자둬야 하는데 졸리지가 않다. 술도 그다지 땡기지 않고. 차라리 아예 자지 말고 도착해서도 커피를 마시며 버텨볼까.

아, 아까 까먹고 못 적었는데 탑승을 기다리며 인상 깊었던 것이 탑승객의 절반 이상이 인도계로 보였다는 것. 거뭇한 피부가 아마 맞을 것 같다. 싱가폴 사람들은 내가 알기로 저렇지 않으니까. 인도에 가는 건지, 미국에 가는 건지... 최근 미국 내 인도 인구가 늘고 있는 건가 궁금증이 생겼다.

 

PM 10:30

역시 한국에서 보고 싶었던 ‘울학교 ET’를 봤다. 자세한 평은 다른 글로. 간략하게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발화를 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감독의 장르 선택이 부적절했다. 차라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더라면. 괜히 내 자신의 입장에서 독해하게 되어 우울하면서도, 또 다시 일종의 전의를 다지게 되었다.

 

AM 01:30 (한국시간 2009년 1월 11일)

2시간 정도 한국 노래를 들으며 잠을 잤다. 졸리진 않았는데 억지로 자려고 하니 또 잠이 오더라.

 

AM 03:30

일어나 밥을 먹으며 ‘달콤 살벌한 연인’을 봤다. 이번에는 치킨 누들을 먹었는데, 정말 맛이 없었다. 배도 고픈 터이고, 도착해서 어찌될지 모르니 일단 먹어뒀다. 영화는 결국, 끝나기 전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터에 다 보지는 못했다. 전에 대충 봤던 거라 뒷부분을 알고 있었는데, 앞부분을 좀 자세히 보니 맥락이 더 잘 이해가 된다. 박용우 캐릭터는 지나치게 극단화된 듯.

 

AM 11:00 (한국시간 2009년 1월 11일 AM 04:00 / 미국시간 2009년 1월 10일)

결국 샌프란시스코에 착륙했다. 입국심사가 무려 70분가량이나 걸렸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왜 옮겨가는 줄마다 앞에서 문제가 생겨서 지연되는지. 30분가량은 아낄 수도 있었는데, 운이 정말 나빴다. 나중에 보니 미국 시민권자들은 나 같은 비시민권자들에 비해 훨씬 빠르더라. 당연한 것 같지만, 그래도 기분은 좀 나쁨. 난 결국 손가락 스캐닝을 당했거든.

 

PM 12:30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밴을 탔다. 짐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지하철 타고는 찾아갈 자신이 없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힘들게 살고 싶지는 않다. 지하철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한다니! 밴은 혼자 타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버클리를 가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서 간다. 여기서도 역시 GPS가 활용되고 있다. 하긴, 워낙 땅도 넓고 복잡하니까. 운전은 중국계로 보이는 사람이 했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PM 01:10

앞으로 한 학기동안 거주하기로 계약한 International House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매우 후졌다. 이게 5700$라니! 좀 해도 해도 너무한다. 고등학교 때 기숙사는 물론이고 서울대 기숙사만도 못한 것 같다. 토론토대에 가 있는 친구는 비싸지만 - 그래도 내가 내는 것보단 훨씬 싸더라. 한 절반에서 2/3 정도? - 시설이 좋아서 만족한다는데, 난 이건 뭐, 제네바에서 갔던 후진 호텔이나 베네치아에서 갔던 여인숙 수준의 호텔에 비싼 돈을 내고 들어가는 기분. 한 학기동안 이곳에서,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태어나서 처음 보는 외국인이랑 써야한다고 생각하니 갑갑하다. 룸메이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01:30부터 짐을 풀기 시작했다. 03:10경에 끝이 났다. 총 제한인 46kg을 다 채우지 않은 탓인지, 내가 짐을 충분히 싸지 않은 탓인지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간단히 씻고 03:30에 나가 오현진 씨 - 이번에 같이 미국에 간 서울대 경제학부 생 중 한 명이다. 준비하면서 서로 이메일로 연락을 많이 했던터라 그나마 좀 친밀감을 느끼게 됐다. 사실 짐까지 정리하고 나니 할 일도 없고, 무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직 기숙사가 정식으로 개사한 것이 아니라 사람도 없고, 시설들도 제대로 안 열어서 갑갑하다. 그나마 얘기라도 몇 마디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연락을 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연락할 사람이 이 사람밖에 없다. - 한테 전화하고 40분가량을 주변을 돌아다녔다. 필요한 것도 좀 사고 - 특히 국제전화카드를 사려고 했다. 기숙사 내에 자판기는 고장 났고, 가게는 문을 닫았다. - 구경을 하려 했는데 돌아다니다가 포기하고 들어왔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어서 그런가 갑자기 너무 피곤하고, 어디를 어떻게 가야될지를 모르겠으니 가는 길마다 다니는 사람도 없이 한적한 전원 풍의 집들만 단조롭게 계속 나온다. (아, 오현진 씨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놀고 있단다. 6시 쯤 들어오겠다 그래서 기숙사 방에서 기다리고 있기로 했다.)

방으로 돌아와 시간을 때우려는데 너무 졸리다. 밤까지 버텨야 하는데 큰일 났다. 가족들에게 약속한 대로 전화를 했는데 - 국제전화카드를 못 사서 결국 로밍한 모바일로 했다. - 안 받는다. 흠!

 

PM 08:00

3시간가량을 침대 위에서 - 기내에서 받아온 - <주간동아>를 보며 보냈다. 중간에 몇 번 졸기도 했다. 역시 너무 피곤하다. 다 보고 나니 7시 반쯤 되었는데, 약속한 사람은 오지도 않고, 전화를 하려면 또 1층까지 내려가서 50센트나 써야 해서, 기다리면서 시간도 때울 겸 여행기를 컴퓨터로 정리했다. 그런데 아직도 오지 않는 군.

흠, 이제 뭘 하지 그리고 내일은 뭘 하지. 사실 비행기에서 내린 뒤로 물 몇 모금 빼고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긴장해서 그런가, 배가 딱히 고프지 않다. 중간에 공중전화를 사용하기 위해 잔돈이 필요해서 산 환타 오렌지 맛 - 미국에서는 온스 단위로 음료수를 계량해 1.25달러짜리가 591미리다. 기묘하군! - 이 눈앞에 놓여있긴 하지만, 빈속에 탄산음료를 마시면 속 쓰릴 것 같고, 별로 땡기지도 않아 건드리지 않고 있다. 본래 저녁때가 되면 한국에서 가져온 비상식량을 먹으려고 했다. 햇반 하나 덥혀서 참치캔 하나랑. 근데 뭔가 아깝기도 하고, 오기로 한 사람이 있으니까 괜히 혼자 먹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같이 먹기로 한 건 아니지만) 그러다 보니 여덟시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한국에서 가져온 책들을 읽거나 - 두 권 정도가 있는데 솔직히 둘 다 읽기 아까워서 참아보고 싶다. 오자마자 읽어버리면, 앞으로 지내는 데 좀 한글로 된 책이 많이 그리울 것도 같다. 한국어 활자중독인가? - 공부를 좀 하거나 잠을 자거나 - 좀 졸아서 그런지 지금은 그렇게 졸리진 않지만 그래도 지금쯤 자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시차 적응하는 데 좋을 것 같다. - 1층에 내려가서 혹시나 무선 인터넷이 되는가 살펴보거나 - 사실 인터넷이 안 되니 답답하다. 인터넷이라도 되면 기분이 좀 나아질 텐데, 솔직히 지금 기분이 좋지는 않다. 괜히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 - 다시 공중전화로 가 오현진 씨에게 전화를 하거나 - 지금 인터넷, 할 일, 학업 등에 대해서 대책이 아무 것도 없어서 좀 그녀가 절실히 필요하다. -_-; - 그냥 내일 관광한다고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 정도를 할 수 있다. 아, 밥을 먹을 수도 있겠다. 건강을 위해서. 이래저래 다 마냥 땡기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