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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 Zenol

오래된 미래

zeno 2008. 12. 27. 21:56

  주로 2000년대에 나온 책을 읽는다. 간혹 1990년대 후반에 나온 책도 읽곤 하지만, 역사학, 문학, 철학, 사회과학 등 주로 읽는 책의 대부분은 나온지 10년 내외의 것들이다. 
  예전에 나온 책들을 읽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시평류는 시의성을 잃은 것이 많고, 너무 낡은 논리와 정보를 담고 있는 책들도 많고, 조판 자체가 가독성이 떨어지기도 하고, 책 자체가 너무 안 예쁜 경우도 있고, 책을 많이 안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래서 간혹 보는 오래된 책 중에 현재적 의미가 충분한 것들을 보다보면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가히 '오래된 미래'라고 할만한!
  정운영이 20여년 전에 쓴 <광대의 경제학>을 잠시 들춰보다가 역시 놀랄만한 구절들이 있었다. 41쪽의 "'위기' 강변의 위기"란 글에 "나는 현재를 반성하여 미래에 대비하자는 주장은 흔쾌히 수긍하지만, 그러나 미래에의 대비를 이유로 - 흔히 빙자하여 - 현재를 구속하려는 발상까지를 수락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는 구절이 있다. 2년 전 쯤에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마시멜로 이야기>를 마냥 깠던 적이 있는데, 어째 오늘 이 구절을 읽다보니 그 책이 떠올랐다. 그 책의 요지는 결국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현재를 구속하자, 는 것인데 정운영은 무려 20여년 전에 그런 내용을 예측했던 것인가! 라고 하면 지나친 오바고, 그만큼 마시멜로 이야기의 메시지가 지극히 '상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의 반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친 김에 하나 더 소개해보자. 36쪽의 "'안정과 복지'의 논쟁에 대한 하나의 단상"이라는 글에 있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안정이 물가와 같은 '경제적' 안정만이 아니고 또한 복지가 선거를 의식한 '정치적' 복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면, "안정이 바로 복지이다"라는 주장보다는 "복지가 곧 안정이다"라는 인식이 더 요긴하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성장의 혜택을 나누는 과정에서 아주 체계적으로 소외되었기에 안정으로 지켜야 할 방 한칸 마련하지 못한 집단과 계층이 겪는 좌절과 분노를 복지의 시혜로 다소나마 보상한다면, 그때 그것이 일구어내는 사회안정은 물가의 안정 따위로 이룩한 복지 증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도식적으로 말해서 안정 없는 복지는 다소 불안할 뿐이지만 복지 없는 안정이란 크게 위험하기 때문이다." 평소에 즐겨하는 말의 내용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작금의 한국 상황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우려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내년 상반기, 한국을 뜬 사이에 모 경제학자가 예언한 것과 같은 일이 벌어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데 - 구체적인 내용이나 사람의 언급은 피한다. 요즘 워낙 '공안정국'이라 솔직히 잘못 써서 증거를 남겨놨다가 엉뚱한 피보는 게 두렵다. - 이 역시 20년 전의 한국으로부터 크게 바뀌지 않은 모습이라니 씁쓸하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 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렇게 맥을 놓아버리면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공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과거를 '오래된 미래'로서의 속박을부터 해방시켜 '새로운 미래'를 열 수는 없을까?
  솔직히 정운영이 얼마나 알려져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나 자신도 그렇게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그가 너무 일찍 죽었다는 사실이 꽤나 아쉽다. 그만 살아있더라도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싶은데. 김수행의 후임으로 왔다던가, 촛불시위 정국에서 활약을 했다던가, 기타 등등. 개인적으로는 조금 친해져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싶다. 역시 건강이 가장 중요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