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사랑했을까 본문

저널 / Zenol

나는 그를 사랑했을까

zeno 2008. 11. 23. 23:21
  JK. 내가 그를 그렇게 불렀던가.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와의 만남은 고작해야 일년여에 불과했고, 그가 내 곁을 떠난지는 벌써 2년하고도 2개월, 그동안 군대에 갔더라도 제대를 했을 시간이 흘렀다.
  그는 내게 '자유'로 남아있다. 살면서 그토록 자유라는 것을 몸소 느끼게 해 준 인물이 있을까. 스스로의 삶 자체를 자유로 만들었고, 그 길을 몸소 걷다가 홀가분히 자유롭게 떠난 사람, 그가 바로 JK다.
  사실 그는 학교 선생이었다. 내가 다녔던 민족사관고의 영어 교사. 2학년 때, 갑작스럽게 만나게 된 그의 교육은 말 그대로 자유, 그 자체였다. 사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교육'과 그의 교육은 다를지도 모른다. 그가 수업시간에 했던 것이라고는 에세이 집 한 권을 놓고 토론시키거나, 자유 주제로 에세이를 써오게 한다거나, 애들을 교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논다던가, 자신이 좋아하는 혹은 자신의 친구들이 만든 음악을 들려주며 뒷 얘기를 해준다거나 하는 게 전부였으니까. 심지어 그는 종종 수업을 빼먹기도 했다. 전날 서울에 다녀오면서 과음을 한 터라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오전 10시 30분 수업을 기다리다 못해 반장이 11시 10분쯤 전화하면 그제서야 일어나 '어... 미안해...'라는 말을 하며 휴강을 전하던 그 였으니까.
  그 때문일까. 그만큼 가까이 느껴졌던 선생도 없는 것 같다. 그는 선생이기 이전에 내게 '인간'이었으니까. 아니, '형'이라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음, 약간 술을 마셔서인가, 그의 나이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11살 정도 위였던 것 같다. 그나마 학교에서 만날 수 있는 선생 중에서는 가장 어린 축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말을 쉽게 할 수 있어서였는지, 그가 참 편했다.
  그래서 그랬다. 그가 내 준 에세이 과제 중에, 주제를 찾다 찾다 못 찾아서, - 영어 실력이 안 됐기 때문에, 참신한 주제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 여자친구에 대해서 쓰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그녀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로 시작했던 이야기가, 점점 흐르다보니 그녀의 생리 주기에 대한, 극도로 사적인 이야기로까지 흘렀다. 지금 와서는 좀 미안하지만, 그 때는 참신함에 눈이 벌게져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을 그대로 써서 냈다. 부끄러운 마음은 분명히 있었다. 겉으로 보면 순도 100%의 범생인 내가, 내 얘기도 아닌 어느 한 여자아이의 생리 주기에 대한 이야기를 쓰다니. 선정적이어도 어찌 이리 선정적일 수가!
  이에 대한 그의 반응은 전혀 '꼰대'스럽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 일을 계기로 그는 내게 보다 관심을 가져줬다. 그래, 그게 결정적이었을 거다. 그토록 타인의 관심을 갈구하던 내가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마음을 열기에. 이후 그는 종종 지나가는 말로 '모모' - 그녀의 별칭이었다. - 는 어떻게 지내냐며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나는 묘한 공유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그 해 겨울에 찾아왔다. 2학년 마지막 기말고사를 보던 시절, 이미 연세대 입학이 결정되어 있었고 서울대 입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던 내게 시험 부담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맞이하게 된 그의 시험은, 자유 주제 에세이였다. 수업 시간에 많이 한 것도 아니지만 책에 있던 내용은 온데 없고, 자유 에세이를 쓰라니. 그 때 이미 어느 정도 학교와의 트러블을 겪고 있던 그다운 문제였다.
  그 때, 나의 답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마치 대성당의 벽화를 그리는 예술가라도 된 기분으로, '창조'에 나섰으니까. 시험은 그녀의 생일을 며칠 앞두고 치뤄졌다. 때 마침, 나는 학교를 탈출해 그녀에게 깜짝 생일 파티를 해 주러 갈 계획에 몰두해 있었다. 그런 내게 주어진 한 장의 백지는, '계획'을 세우라는 신의 계시와도 같았다. 그래서 난 한 편의 콩트를 썼다. 연극의 각본과 소설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그런 글을. 한 명의 소년과 한 명의 소녀를 등장시켜, 소년이 소녀에게 무엇을 몇 시에 어떻게 해주리라는 것을 예고한 그런 글을.
  점수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 1년 동안에 내 글에 대한 모든 평가가 그랬듯이, 평균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잘 해보라고.
  실행에 옮긴 결과는 뭐,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애초에 내 인생은 항상 내 예상과는 조금씩, 때로는 많이 엇나갔었으니까.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어쩌면,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큰 규모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한 것이었으니까.
  이후, 그는 학교와의 트러블 - 자유분방한 그의 생활과 교육은 '행정실장'이란 이름을 가진 학교 설립자의 아들의 마음에 늘상 불만을 일으켰고, 그는 결코 다른 선생들처럼 이에 대해 비굴하게 굴지 않았다. - 로 인해 학교를 그만두고, 그가 예전에 해왔고 또 늘 꿈꾸던 음악 - 그는 학교에서 일 할 당시 자신의 방에 개인 스튜디오를 꾸려 스스로 힙합 음악을 만들고 믹싱하곤 했다. - 에 나섰다. 해가 바뀌고, 봄에 나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그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댄디'했다.
  새로운 학교 생활은 그를 당분간 내 기억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러던 가을, 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가 죽었다고.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어떻게 거짓말을 해도 이런 어처구니 없는 거짓말을 할까 싶었다. 멀쩡하던 그가 죽다니, 왜?
  나중에 자초지종을 들으니, 부산 사나이던 그는 해운대에서 공연을 마치고 뒷풀이에서 술을 진탕 마신뒤 바다에 들어가 헤엄치다 익사했던 것이었다. 그다운 마지막이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다니. 잔인한 사람.
  급히 친구들과 부산에 내려가 빈소에 갔더니 그는 정말 세상을 떠나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처구니 없었다. 하지만 그 날 하룻밤을 빈소 밖에서 지새우며, 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주변 친구들에게 횡설수설 하며, 그 젊고 재능 많은 사람을 데려가다니, 하늘은 참 무정하다고 푸념을 해댔다. 너무도 당황했기에 울음도 그닥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그의 시신은 버스에 실려 영락공원으로 떠났다. 사정을 핑계로 올라오려던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울었다. 정말 미친듯이 울었다. 지난 밤 새 운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몇십분을 쉴 새 없이, 미친 것처럼 울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억울했다. 황당했다. 왜,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를 지금 데려간단 말인가? 왜 하필이면 지금? 왜 하필이면 그를? 내겐 그가 필요한 데 말이다!
  그렇게 그는 떠나갔다. 아직도 그의 미니홈피 속에는 그가 살아있다. 3년 전의 그 댄디함을 간직한채로, 자신의 자유로운 영혼을 표면에 드러낸 채로. 내가 종종 남기곤 하는 방명록은 그가 여전히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이란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하지만 지난 26개월 동안 그의 묘지에는 찾아가지 않았다. 아니,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것이 핑계였지만, 아마 속마음은 실제로 그의 마지막 쉼터를 보고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싶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내게 큰 것을 남겼다. 많다기 보다는 컸다. '자유'라는 것.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해서 내가 사는 것이라는 것. 내가 하고 싶은대로 사는게 행복한 것이라는 것. 온몸으로 자유를 원했던 '조르바'같은 그는 내게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내 삶에 '자유'라는 커다란 가치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한 에세이스트의 글을 읽다 그녀가 엄청나게 사랑하던 사람에 대한 애정을 표하는 구절을 보고, 그가 떠올랐다. 갑자기 그가 보고 싶어졌다. 형, 내가 이렇게 바뀌었다고. 나 이렇게 살고 있다고.
  나는 그를 사랑했을까. 아마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몰랐다. 그게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저 그는 내 선망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만약 내가 자유라는 주제를 담은 책을 쓴다면, 그 책은 그에 대한 헌사가 될 것이다.
  정찬이 형,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