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평]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우린 함께니까. - <<데미안>>을 통해 바라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김연수/헤르만 헤세/데미안/싱클레어/베아트리체/인드라망> 본문

평 / Review

[서평]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우린 함께니까. - <<데미안>>을 통해 바라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김연수/헤르만 헤세/데미안/싱클레어/베아트리체/인드라망>

zeno 2007. 11. 18. 21:42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6점
김연수 지음/문학동네
  김연수의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흔히 일간지의 서평에서 ‘인드라망’의 사상을 담아내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일반인 독자에게 괄호 안에 쓰여진 ‘우리는 모두 각각의 삶을 살고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정도의 짧은 주석만으로는 ‘인드라망’이라는 낯선 단어의 의미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의 사상은, 그의 책을 펴든 뒤 한 대여섯 시간쯤 코를 박고 정신 없이 한 권을 다 읽어낸 즈음에야 비로소 피부 가까이 스며든다. 굳이 그 깨달음의 과정을 ‘스며든다’ 표현한 것은 말 그대로 그 사상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편안하게, 아주 편안하게, 그의 책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메시지는 피부로 스며든다. 머리로 깨닫는 것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피부로 스며드는 그런 느낌 말이다.
  추상적으로 풀어낸 그의 사상은 피부로 스며들어서인지 글로 다시 토해내기가 어렵다. 그래도 어렵사리 토해내 보자면, 피부를 한 꺼풀 벗기는 것과 같은 행위를 거쳐야 한다. 그 행위는 고치에 갇힌 벌레가 고치를 깨고 나와 나비가 되는 과정이기도 하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그려지는 새가 ‘알’을 깨고 ‘아브락사스’에게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발견해 낸 ‘나’는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나’이다. 이 글을 지금 쓰고 있는 ‘조홍진’이란 이름을 가진 대한민국의 20세 남성은 피부를 한 꺼풀 벗겨낸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20세 남성 ‘조홍진’ 그대로이다. 그래서 피부를 벗겨내기 전의 ‘나’와 벗겨낸 후의 ‘나’는 동일인이다.
  하지만 박피 과정을 거친 ‘나’는 ‘나’이면서도 내가 아니다. 존재론적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박피 과정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나는 분명 박피 전의 내가 아니다. 본질은 변하지 않았을지라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서 현상은 달라졌다. 하지만 김연수의 사상에 따르자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다른 은하에서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나와, 혹은 정반대로 글을 지우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와 다르지 않다. 주인공 ‘나’가 여자친구 ‘정민’에게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술에 취한 어떤 한 중년 남자가 저 하늘 너머 다른 운하에 있는 똑같은 세계에서 똑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인용하여 말해주듯 말이다.
  사실 이 예에서도 볼 수 있듯, 이 책의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인드라망’은 소소한 등장인물들의 국가를 초월하고, 시공간마저 초월하여 연결되는 관계를 비추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많은 서평이 이 측면에 집중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이 책에 대한 감상을 마치기에는 너무 밋밋하고 평범하다. 그래서 조금 무리일수도 있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헤세의 <<데미안>>의 주요 등장인물 관계인 싱클레어-데미안, 싱클레어-베아트리체의 관계를 김연수의 소설에 대입해보고자 한다. ‘나’와 ‘강시후/이길용’의 관계가 싱클레어와 데미안을 연상시키고, 정민은 싱클레어의 베아트리체와 너무나도 닮아 있기 때문이다.
  먼저, 강시후/이길용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이 소설의 후반부는 사실상 그의 과거와 현재를 풀어내고, 또 그 사실의 재구성과 추적으로 채워진다. 그만큼, 그의 비중은 이 소설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런 그의 재구성된 삶 뒤에는 소설 전체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내가 있다. 그래서 나는 비디오에서 나오는 이길용의 삶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서술자이자, 그의 진술의 오류들을 발견해내는 분석자이자, 강시후에게 받은 영향으로 말미암아 변화하는 그의 분신이다. 그런 나의 행적은 <<데미안>>의 화자인 ‘싱클레어’와 매우 흡사하다. 물론 ‘어머니’로 대변되는 빛과 선의 세계와 ‘프란츠 크로머’로 대변되는 어둠과 악의 세계가 명확하게 ‘나’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정민과 함께 뒹굴며 보내는 행복한 시간과 생각보다 몹시 추레한 할아버지와 그에대한 실망으로 채워진 회고는 유사한 대비를 보인다. 다시 말해,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다시금 ‘나’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강시후/이길용’은 흔들리는 자아를 보다 굳건하게 돕는 보조자이자, 서술자의 분신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의 역할을 좀더 명확하고 압축적으로 서술하자면 ‘멘토’라는 요즘 유행하는 말을 떠올리면 된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의 부족한 자아성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듯, 명확한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방황하던 ‘나’에게 강시후/이길용은 정신적인 형이자 멘토의 역할을 한다. 굳이 ‘멘토링’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이미 상호작용하기에 그의 존재를 거울 삼아 나는 점차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역할을 훌륭한 ‘멘토’라 보기에는 ‘이프로’ 쯤 부족하다. 그 자신 스스로조차 명확한 자아를 설정하지 못하였고, 또 소유하지 못하기에 ‘나’의 성장에 명확한 마침표를 찍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나마 소임을 다하고 <<데미안>>에서 나오는 데미안의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레이’와 함께 퇴장하는 그의 역할은 싱클레어를 이끌었던 데미안에 버금간다고 평가할 수 있다.
  ‘나’와 정민의 관계는 보다 명백하다. 정민은 싱클레어가 연모하였던 베아트리체의 상을 훌륭하게 충족하기 때문이다. 1991년 5월의 정국에서 총학생회 집행부에서 만난 정민과 ‘나’의 관계는 ‘연인’이란 한 마디로 불충분하나마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정민이 ‘삼촌’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보다 살아있는 존재로 등장한다는 점은 이 책의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생동감 있는 기쁨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실제로,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던 당시 정국에서 이뤄지는 정민과 ‘나’의 사랑은 한편의 로맨스를 보는듯한 착각에 빠지게 해줄 정도로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답다.
  사실 다른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이렇게 도식적인 등장인물 관계에 대입하여 분석한다는 것은 위험하면서도 오만한 발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김연수의 등장인물들은 헤세의 그/녀들과 너무도 닮아있다. 이는 두 작가가 모두 불교적 세계관에 각자의 사상적 바탕을 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허나 김연수는 그의 소설이 헤세의 <<데미안>>에 대한 오마쥬라고 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서평은 다만 한 설익은 독자의 관점에서 본 것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데미안>>에서 새가 알을 깨고 나와 선악이 공존하는 신 ‘아브락사스’에게 다가가듯, ‘나’가 혼란한 정체성을 깨고 나와 또 다른 은하에 존재하고 있을 ‘나’를 찾아 가는 과정은 내면을 탐구하고 자아를 찾아가는 ‘성장 소설’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나’와 연결된 ‘나’를 찾아가는 ‘나’는 강시후이기도 하고, 또 아니기도 하다. 그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와 나를 가르는 것 보다는 보이지 않는 ‘우리’간의 ‘관계’라는 끈을 찾아 나가는 것이 보다 아름답고 의미 있다. 지금 우리가 이 은하에서는 이렇게 싸우고 틀어져 있는 순간에도 다른 은하의 우리는 함께 손잡고 행복하게 웃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그렇게 ‘인드라망’ 안에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