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아니, 인간을 위한 세상은 없다. <★★★☆> 본문

평 / Review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아니, 인간을 위한 세상은 없다. <★★★☆>

zeno 2009. 9. 3. 23:21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6점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사피엔스21


  p. 216

  "얼마 전에는 여기 신문에서 몇몇 교사들이 30년대에 전국의 여러 학교에 보낸 설문지를 우연히 발견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설문지 문항은 학교 교육에서 부딪히는 어려운 문제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교사들이 발견한 설문지는 답안이 채워져서 전국 각지에서 돌아온 것이었는데 가장 큰 문제로 거론된 것은 수업 중 떠들기나 복도에서 뛰어다니기 같은 문제였다. 껌을 씹거나 숙제를 베끼는 일도. 뭐 그런 따위였다. 교사들은 답이 비어 있는 설문지를 찾아서 그것을 무수하게 복사해 똑같은 학교에 다시 보냈다. 40년 후에 말이다. 그리고 이제 답지들이 도착했다. 강간, 방화, 살인. 마약. 자살. 나는 이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세상이 점점 망해가고 있다고 오래 전부터 말하곤 했지만 사람들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내가 나이가 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런 것도 하나의 징후다. 하지만 강간하고 살인하는 일을 껌 씹는 일과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은 나보다 훨씬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내 느낌이다. 4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아마도 다음 40년 동안은 난데없이 아주 괴상한 것이 등장할지 모른다. 너무 늦은 게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pp. 323 - 324

  "나는 사태를 올바로 바라보려고 애를 썼지만 때로는 너무 가까워서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자기가 누구이며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잘못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내가 왜 보안관이 되려 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내게는 언제나 책임을 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굳이 그런 것을 고집했다. 사람들이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안에는 모든 사람을 같은 배에 태우고 싶어하는 부분도 있었다. 내가 갈고 닦은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 별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무엇이 다가오건 우리를 지탱할 힘은 거의 없을 것이다."

유명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드디어 읽었다. 추천을 받아 코맥 매카시의 다른 작품인 <모두 다 예쁜 말들>을 먼저 읽었는데,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읽은 것인데, 생각보다 훨씬 더 재밌어서 나름 열심히 읽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지점은 모스-시거-벨 사이의 추격전보다, 책 후반부에 드러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사실이다. 사실 이는 인간을 위한 세상은 없다, 라는 점을 환기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은 화자 벨에게 '불가해'한 곳이다. 허무주의와 체념을 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던 정의의 실현을 위해 살아가는 벨은 결국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시거의 살인들을 보고 그 절망의 수위를 한단계 올린다. 거대한 문제적 세상에 직면한 한 개인은 자정 불가능성에 좌절할 뿐이다. 결국 그가 마지막으로 대면한 결말은 "영락 없는 패배", "죽음보다 더 비통한 패배" (p. 336) 였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지키고자 했던 '인간'이기 위해서 그는 '질 줄 알면서도 싸울 수밖에' 없다. 왜 이기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인간을 위한 세상이 없는 한, 개인의 노력은 '위대한 패배자'라고 불릴 수밖에 없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