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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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야!한국사회 / 판서 요구하는 대학생의 수학능력 / 이영미

zeno 2006. 12. 7. 22:50

  또 입시철이 돌아왔다. 하루에 4, 5시간밖에 못 자고 몇 년씩 고생 고생을 한 학생들이나 수능시험 날 경적 소리나 비행기 소음조차 조심스러워하는 어른들이나 모두 딱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이런 ‘수능’시험을 치르면 과연 ‘대학수학능력’이 갖추어지기는 하는 것일까? 사실 대학 강의실에서는 수강 능력과 태도가 결여된 학생들을 만나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울에서 이름 있는 대학의 사례다. 교양과목을 수강하던 한 학생이 수업 중 이랬단다. “교수님, 판서해 주세요!” 교수는 기가 막혔지만 판서를 해주었는데, 그랬더니 학생들의 적지 않은 수가 판서한 칠판을 카메라로 찍더란다.

  내 경험으로 ‘판서’는 중학교 시절에 끝났다.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판서가 없는 수업에 적잖이 낯설었던 기억이 역력하다. 들으면서 내용을 요약하는 수업이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3년을 거치면서 우리는 더 어려운 대학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훈련받은 셈이었다. 대학의 수업은 한 술 더 떴다. 교수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들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교과서가 없거나 강의 시간 내내 칠판에 한 글자도 적지 않고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평론을 듣는 듯한 명강의를 하는 어느 선생님의 강의는, 시작한 지 30분 동안은 요약조차 힘들어 속기사처럼 가능한 한 많은 문장을 그저 받아 적느라고 쩔쩔맸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고3 때까지 판서(혹은 판서를 프린트한 것)에 의존하는 교육을 받는 모양이다. 교사는 명쾌하게 요약·정리된 판서(혹은 프린트물)를 놓고 이를 설명해가는 방식으로 강의를 하는 것이다. 즉 학생들은 강의를 들으면서 이를 요약할 필요가 없다. 혹시라도 잘못 요약할까봐 친절하게 정리한 판서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모자라, 노트에 무엇을 적을지 친절하게 불러주기까지 한다. 어디에 노란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을지, 어느 부분에 별표 두 개를 붙일지를 완벽하게 지정해 주는 친절한 교사도 많다. 물론 이런 친절은 학교보다는 학원에서 더 많이 베풀어진다. 그래서 학원은 아주 효과적으로 지도를 한다고 평가받는다.

  이렇게 공부를 시키면 시험 점수는 향상될 것이 분명하다. 그 지식의 내용이 학생의 머릿속에 빠르고 명확하게 입력될 것이다. 시험은 바로 그것을 측정한다. 그러나 대신 이 방식은, 상대방의 말을 듣고 중요한 말을 스스로 정리하는 능력을 크게 감퇴시킨다. 듣기 교육은 수능시험 언어영역에 ‘듣기 평가’를 위한 훈련이 고작인 형편이다.

  사실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교육내용을 귀로 듣고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따야 하는 현행 대입 풍토 속에서, 좀 더 정확한 내용으로 좀 더 쉽게 가르치려는 요구는 학생들의 듣는 능력의 발달을 크게 저해하는 셈이다. 나름대로 복잡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다가 오류를 범하게 하느니 빨리 정답으로 가는 지름길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그야말로 ‘수학능력’을 갖추지 못한 학생들을 양산하는 것이다. 여기에 학생들은 자신이 대학 강의를 수강할 만한 언어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카메라로 판서 내용을 찍어 무조건 외워 시험 보고 학점 딸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학생들이 어느 부분에 별표 3개를 적냐고 묻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혹시 이런 칼럼이 수능시험 언어영역에서 듣기 평가를 강화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까 두렵다.

  이영미/대중예술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