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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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단상 / 김규항

zeno 2009. 3. 3. 12:16

한 사회를 끝장내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무엇일까. 역사 속에서 실행된 적극적인 방법은 학살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또한 학살만으로 한 사회를 끝장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히틀러는 유대인을 박멸하기 위해 가스실까지 동원했지만 지금 유대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없던 나라까지 만들어 죄없는 팔레스타인 인민들을 학살하고 있지 않은가? 제노사이드는 유대인의 숫자를 일시적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의 결속력은 오히려 더 강화시켰다.
한 사회를 끝장내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바로 그 사회 성원들의 결속력을 파괴하는 것, 즉 모든 사람을 오로지 나만 아는 인간으로 만들어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회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그 사회는 설사 지금 제 아무리 휘황하다 해도 이미 끝장난 사회다. 인류 역사에서 지배계급에 굴종하는 인간을 길러낸다거나 국가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은 존재 했다. 그러나 어떤 가치관에서든 사회적 결속력을 거스르는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이 이루어진 경우는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이젠 엄연히 존재한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다.
오늘 한국이 절체절명의 사회인 건 물론 모든 사람이 말하듯 경제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이 사회가 아이들을 '나쁜 인간'으로 길러내는 일에 이념과 계급을 불문하고 온힘을 모으고 있다는 데 있다. 한국은 아이들을 이기적이고 경쟁적이며, 물질적 풍요를 인생의 목표로 삼으며, 소박함의 아름다움과 정신적 충만을 우습게 여기는 인간으로 키우는 걸 교육이라 믿는 사회이며, 어떻게 하면 그런 교육을 더 효율화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걸 교육문제라 말하는 사회다.
그리고 그 아귀다툼의 중심에 이른바 학원이 있다. 한국에서도 본디 학원은 정규교육기관인 학교를 보조하는 교육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에서 사람 꼴을 갖추는 이런저런 덕목과 가치들을 배우는 일이 사라지고, 국수사과니 영어니 하는 학과 점수가 유일하고 전적인 가치가 되면서 학원은 학교를 제치고 가장 주요한 교육기관이 되었다. 한국에서 여전히 벌어지는 일반학교가 어떻고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와의 격차가 어떻고 하는 논란들은 실은 다 그냥 겉치레 말들이다. 학교보다 주요한 교육기관으로서 학원은 이미 지불하는 금액에 따라 엄격하게 서열화되어 있으며 누구도 그 '금액에 따른 격차'를 항의하지 않는다.
학원의 권위는 보수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 이를테면 이명박을 지지하는 조중동 애독자에 국한하지 않는다. 진보적이라는 사람, 심지어 진보적 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한다는 사람들도 감히 제 아이를 학원에서 자유롭게 하진 못한다. 광장에서 "이명박이 우리 아이들 다 죽인다!"고 외치던 사람들도 자정이 되면 눈동자가 풀려 휴대폰으로 아이가 학원에 다녀왔는지 확인한다. 오늘 외국자본 투자까지 들어오는 거대한 학원 산업의 주인공들은 모조리 '개혁적인' 386들이다.
그리하여 오늘 한국에서 학원은 단지 학원이 아니다. 학원은 오늘 우리 아이들과 우리가 사는 사회와 우리의 인간성을 망가트리는 자본의 가치관의 결정체이자, 마몬의 성전이다. 학원의 존재를 부인하는 노력은 우리 아이들과 우리가 사는 사회를 살리는 첫걸음이다. 학원을 없애자. 우리 아이들이 그들의 학교에서 공부하게 하자.

(한겨레21에서 학원을 없애자는 ‘도발적인 기사’에 들어갈 쪽글을 써달라고 해서 미안한 마음에 두말없이 쓴 글. 그다지 도발적이진 않지만 좀 '순결주의적인' 느낌이 들 수 있는 글이라 설명을 조금 붙인다. 난 학원의 본래적 기능, 즉 보조적인 교육수단으로서 실용적 기능을 인정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학원에서 운전면허를 땄다고 해서 그에게 왜 사교육을 받았냐고 비난하진 않는다. 나 역시 아이가 학교 수학시간에 아무 것도 못 알아듣겠다며 학원에서 수학을 보충 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당연히 보낼 것을 고려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논란하는 학원은 학원의 그런 본래적 기능이 아니라 이미 학교를 제치고 한국의 주요한 교육기관이 된 학원에 대해서다. 물론 이 글도 그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나저나.. 신해철 씨가 “내가  비판해온 건 사교육이 아니라 공교육”이라고 했다는데 혹시 그가 말하는 공교육은 학원인가? 그렇다면 그는 정말 멋들어진 풍자가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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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항의 원문도 원문이지만, 블로그에 친절하게 덧붙인 말에 느낀 바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때로는 필요하지만) 순결주의는 자칫 토론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그/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덫으로 기능하기 쉽다. 최소한의 합리성은 역시 토론의 기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