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춘추 시대
2) ‘군자’와 ‘소인’의 대립
3) ‘군자’와 ‘소인’이 포함된 인(人)과 구분되는 민(民)의 성격
4) 소결
4. ‘덕’을 통한 ‘군자’와 ‘소인’의 조화 가능성
1) 응보(應報) 관념으로서의 덕
2) 군자와 소인 사이의 덕
3) 소결
5. 현대 한국 사회에 필요한 ‘군자’와 ‘소인’
6. 나가며
참고문헌
1. 들어가며
50여 년이라는 대한민국의 짧은 역사 동안, ‘국가’는 최고의 가치였다. 신흥 국가가 북한이라는 ‘반체제 집단’과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고, 나아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국가가 성장과 발전을 주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들을 동원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단순히 억압만으로는 국가의 항상적인 지배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국민들의 내면에 자발적으로 국가에 충성하도록 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이 정당화를 위해 이른바 ‘충효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예로부터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박고 있는 유교적 전통을 활용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를 당연한 ‘충효’의 대상인 하나의 ‘아버지’와도 같게 여기도록 만들고자 하는 정부의 전략이었다.
그 결과, 정부에 의해 세종대왕, 이순신, 정약용 등의 ‘영웅’이 만들어졌다. 이를 통해 정부는 국민들로 하여금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 같은 영웅의 업적을 본받도록 만들고, ‘도덕’이란 이름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교화’하여 이전보다 용이하게 동원할 수 있었다. 유교에서 오래 전부터 이상적 인간상으로 여겨 왔던 ‘군자(君子)’는 이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평소 ‘덕(德)’을 기르는 개인 수양에 힘쓰고 나라를 경영하는 학문을 공부해 ‘입신양명’하는 군자의 이미지는 국가의 입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인간상이었던 것이다.
군자에 대한 상찬은 이 시기 이전과 이후에 항상 존재하였다.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조선에서는 선비들로 하여금 군자가 되기를 장려하였고, 이는 나라가 대한민국으로 바뀐 뒤에도 하나의 사회적 관습으로 자리 잡았다. 다시 말해, 군자 담론이 사회적 유의미성을 잃지 않은 것이다. 이 같은 군자 담론의 특징은 개인의 덕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으로 굳어져 있는 군자의 이미지는 길을 걷다 갑자기 비가 내려도 군자의 덕을 지키기 위해 뛰지 않는 선비의 모습이다. 사람의 마음을 좀스럽게 하는 상업 등의 생업은 멀리하며, 선현의 말씀을 평생토록 공부하며 자기 수양을 하는 것 역시 군자의 전형적 이미지다. 이는 자연스레 ‘소인(小人)’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진다. 명칭부터 부정적인 가치판단을 내포하고 있는 소인은 군자와 달리 이(利)를 밝히고 덕 같은 건 무시하는 인간의 전형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유가철학의 최고 고전으로 꼽히는 『논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공자의 군자/소인 비교는 이후 일종의 이분법으로 작용하여 소인에 대한 비난의 근거가 되었다.
과연 군자만이 바람직한 인간상이고 소인은 마땅히 경계해야 할 대상일까. 개인과 사회를 모두 염려하는 군자의 모습은 일견 바람직해 보인다. 덕이라는 것은 개인의 인격의 근간을 이룰 뿐만 아니라, 사회 조화 및 안정에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명분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굳이 마르크스의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유명한 테제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구체적인 물질 없이 인간이 존재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따라서 ‘이익’이라고만 배척받는 소인의 관심사가 인간 삶에 어느 정도 필요함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간 유교의 전통에서는 늘 소인을 배척해왔고, 이에 반대되는 군자상을 강조해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렇다면 과연 공자는 오늘날 읽히는 것처럼 실제로 군자의 입장에서 소인을 비판했던 것일까. 아니면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만약 전자의 입장이라면, 현대사회에서도 소인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일까. 소인에게 다른 특징은 존재하지 않을까. 오늘날 한국인은 과연 모두 ‘군자’가 되어야만 할까.
2. 군자와 소인을 바라보는 기존 시각
1) 위대한 군자와 편협한 소인 : 소인에 대한 군자의 지배의 정당화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오랜 세월동안 유가에서는 군자와 소인을 대비시키며 사람들로 하여금 전자의 길을 따를 것을 권장했다. 『논어』에서 소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한 군자의 모습을 그린 대표적인 사례들은 주희에 의해 다음과 같이 해석되었다.
莊以持己曰矜이라 然이나 無乖戾之心故로 不爭하고 和以處衆曰群이라 然이나 無阿比之意故로 不黨이라[각주:3]
이 같은 주희의 해석은 우리의 상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공자의 가르침은 군자의 덕을 강조하고, 이 길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이후 사대부 계층이 유학을 공부하며 군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수련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특히, 한국에서는 조선 중기에 주희의 학문이 ‘성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지배 학문이 된 결과, 이 같은 해석이 주류를 이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같다.
이런 입장은 우리가 앞에서도 봤던 것과 같이, 소인의 덕목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며 비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인(仁)과 예(禮)라는 고귀한 덕을 숭상하는 군자와 달리, 소인은 말 그대로 ‘작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소인의 특징은 그들에 대한 군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사회가 안정적으로 ‘극기복례(克己復禮)’하기 위해서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목표로 하는 군자의 통치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 이기심을 충족시킬 줄 밖에 모르는 소인은 마땅히 군자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2) 법치가 아닌 덕치의 필요성
이 같은 전통적인 해석에 대해 일본의 유학자 오규 소라이는 반기를 들었다. 『논어』는 단순히 소인에 대한 군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군자가 어떻게 소인을 다스려야 할지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 때, 제시하는 것이 바로 ‘덕에 의해 다스림’, 즉 ‘덕치(德治)’이다.
실제로 그는 “군자는 큰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안온한 삶의 터를 생각한다. 군자는 보편적 법칙을 생각하고 소인은 작은 혜택을 생각한다.”[각주:4]는 제4편 11장의 구절을 기존의 고주나 신주의 해석 같은 전통적 입장에서 해석하기를 거부했다. 그가 보기에 ‘군자회덕, 소인회토’라는 앞의 8자는 “군자가 큰 덕을 그리워하면 소인들은 그러한 좋은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각자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 속에서 편안하게 삶을 영위해나”[각주:5]간다는 내용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군자가 ‘좋은 정치’, 즉 ‘덕치’를 펼치면 소인은 자연스레 이에 따르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어지는 ‘군자회형, 소인회해’라는 구절은 “군자가 형벌을 줄 생각만 하면 소인들은 그 형벌을 피해나갈 혜택 … 만을 생각하게 될 뿐”[각주:6]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군자의 ‘나쁜 정치’, 즉 ‘법치’는 결코 제대로 된 통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소라이는 제2편 3장[각주:7] 역시 법치보다 유효한 덕치를 강조하는 것이라는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소결
이상의 논의를 볼 때, 『논어』는 분명히 소인에 대한 군자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군자의 바른 길을 제시해주며, 군자에게 보다 구체적인 지배 방식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해석은 한계가 있다. 군자처럼 도덕을 알지도 못하는 소인에게 단순히 덕치를 행한다고 해서 그/녀가 이에 따라 살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전통적 해석에 따르자면, 그들은 자신의 이익만 아는 존재가 아니던가. 따라서 단순한 교화만으로 소인이 군자의 지도를 따를 것이라고는 결코 기대할 수 없을뿐더러, 그런 그들에 대한 군자의 지배를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지에 대한 논변이 약하다. 그러므로 군자와 소인간의 관계를 이처럼 단순하게 보기보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관계를 고찰하고, 『논어』가 어떤 맥락에서 군자들에게 ‘자기계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유교가 2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소인에 대한 군자의 우월성을 역설하며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기능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3. 춘추 시대 당시 군자와 소인의 성격
1) 춘추 시대
기원전 551년부터 479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공자는 이른바 ‘춘추 시대’ 말기의 사람이다. 당시 공자의 이상이 단순히 산골에 은거하며 제자들에게 도덕 ․ 정치철학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요직을 맡아 자신이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하였던 것이었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런 현실 참여적인 삶의 태도를 갖고 있었던 공자가 말했던 내용을 후대 제자들이 기록한 책인 『논어』 역시 당시의 구체적 현실에 기반하여 쓰였음은 자명하다. 공자가 그의 제자들에게 현실과 그 문제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던 것인 만큼, 당시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공자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춘추 시대의 군자와 소인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상에 대한 이해가 필수불가결하다.
본디 고대 중국 사회는 이른바 ‘종법제’가 자리잡은 사회였다. 주나라 같은 당시 제국의 천자로부터 유래한 혈연에 따라 귀족이 성립하고, 이들이 사회 최상층에서 백성들을 지배하는 체제였던 것이다. 이런 사회적 특성은 기원전 11세기 이래 혈연만으로는 기존의 지배질서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며 급격히 무너져 갔다. 이미 사회가 너무 커졌을 뿐만 아니라, 세대가 내려오면서 천자와 지방 귀족 혹은 제후간의 혈연적 관계가 약화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여건이 변화하였다. 기원전 8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 전반에서는 청동기에 기반한 농업이 사회 구조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청동기는 금속 자체의 무른 특성으로 인해 농업 생산에 실질적인 기여를 못했고, 단순히 지배계급의 상징물 수준에 그쳤다. 그런 상황에서 춘추 시대 중기에 철제 무기와 농기구가 보급되면서 일종의 ‘생산력 혁명’이 일어났다. 청동기에 비해 단단한 철기를 통해 비약적으로 농업생산력이 향상된 것이다. 그 결과, 사회 전반이 보다 풍요로워졌고, 이는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로 이어졌다.
이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는 또 다른 시대적 변화를 낳았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계급이 등장한 것이다.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곧 당시 농업생산의 기반이었던 토지생산력의 증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이전보다 토지가 사유재산으로서의 가치를 갖게 되었고, 이는 곧 이를 재산으로 가진 부농이나 지주를 낳았다. 한편, 사회 전반의 잉여생산으로 말미암은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은 상인과 수공업자라는 또 다른 직업집단을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새로운 집단이 나타났다. 춘추시대 들어 제각각 주권을 가진 여러 나라가 등장하였기에 각 나라에서 지배를 위한 ‘관료’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귀족 계급이 아닌 평민층으로부터 학문을 익힌 사(士) 계층이 대거 배출되며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당시 새로이 등장한 경제적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종의 ‘지식인 계급’으로서 ‘복례(復禮)’를 주장하는 귀족들에 맞서 새로운 사회규범인 ‘법(法)’을 요구했다.
이런 변화는 결국 사회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대표적인 두 계급의 대립으로 귀결됐다. 상주시대 이래의 예(禮)를 중시하는 귀족 출신의 계급과 시대적 변화를 타고 새로이 대두하여 새로운 통치이념인 법(法)을 주장하는 상공계급과 그들과 연관된 지식인 계급이 맞붙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대립은 기존의 해석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지배가 당연할 뿐만 아니라, 소인은 예로부터의 전통에 따라 군자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춘추 시대 당시 벌어진 사회경제적 변화는 소인을 단순한 피지배계급이 아닌 지배계급의 일원으로 끌어올리는 결과를 낳았다.
2) 군자와 소인의 대립
이 같은 군자와 소인의 대립을 처음 포착한 것은 문화대혁명기 당시 중국의 철학자인 조기빈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反논어』[각주:8]에서 『논어』에서 사람을 가리키는 한자로 자주 등장하는 인(人)과 민(民)을 각각 ‘노예주’ 계급과 ‘노예’ 계급으로 구분하였고, 인이 단순히 귀족들의 집단이 아니라 ‘군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귀족계급과 ‘소인’으로 불리는 상공계급 및 지식인계급으로 구성되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논어』와 선진 문헌들에서 ‘군자’와 ‘소인’이란 어휘의 등장 빈도를 분석해 군자와 소인은 이미 서주 시대부터 존재했던 계급이라고 주장한다. 서주 시기의 소인은 “노예제 생산 양식하의 개인농”이었다.[각주:9] 따라서 그들이 직접적인 착취는 하지 않았더라도 자신들의 위에 군림하고 있던 노예주 귀족 계급과 대립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군자 계층이 소인 계층을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 대립은 격렬하지 않았다. 그러나 춘추 시대 들어 군자 계층의 존재를 떠받치던 정전제가 급속도로 쇠퇴하고 소인 계층에게 보다 큰 힘을 가져다 준 사유제가 대두되면서 두 계층 간의 관계가 변화하게 되었다. 발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소인 계층이 하나의 정치세력화한 것이다. 그 결과, 두 계층이 지배계급의 구성원들로써 대립하게 된 것이다. 이는 서로가 서로를 ‘원(怨)’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구체적으로, 군자와 소인은 인성(人性)에 대한 상반된 이해와 그에 따른 상이한 세계관으로부터 대립하였다. 공자가 군자의 편에 서서 인성에 대한 군자의 바른 이해를 상찬하는 모습은 제7편 37장[각주:10], 제12편 16장[각주:11], 제13편 26장[각주:12], 제15편 21장[각주:13], 제15편 22장[각주:14] 등 여러 부분에서 드러난다. 이 때 소인의 인간관과 인성에 대한 비난이 동반됨은 물론이다. 제2편 14장[각주:15], 제4편 11장[각주:16], 제4편 16장[각주:17] 등은 군자와 소인이 정반대의 세계관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처럼, 각자 상이한 정신세계를 가진 두 계급은 그들의 생존을 결정짓는 경제적 조건까지 맞물리며 대립했다. 물적 토대는 삶의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조기빈에 따르면, 공자는 군자, 즉 노예주 세습 귀족의 편에 서서 새로이 대두된 지배계층, 즉 소인을 비판하고 있다. ‘극기복례’를 이상으로 삼고 있는 공자와 달리 소인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자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자는 제4편 5장[각주:18], 제8편 4장[각주:19], 제8편 6장[각주:20], 제14편 28장[각주:21], 제15편 19장[각주:22]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군자의 뛰어남을 역설하고 있다. 한편, 제15편 2장[각주:23]과 제19편 8장[각주:24] 등에서는 소인의 태도에 대한 맹렬한 비난이 가해진다. 공자가 보기에 도무지 덕이란 위대한 가치를 존중할 줄 모르는 소인의 태도는 ‘참람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상 조기빈의 해석은 춘추 시대 당시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맞물려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인다. ‘복고주의자’를 자처했던 공자는 항상 ‘주례(周禮)’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며 군자의 위대함만을 주장하고 이와 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소인에 대한 훈계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공자가 도덕적 측면을 중시한 비판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사실 당시에 군자와 소인이 일종의 ‘밥그릇 싸움’을 벌였기 때문에 이 같은 비판이 그토록 격렬하였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3) 군자와 소인이 포함된 인(人)과 구분되는 민(民)의 성격
참고로 서주 시대 이래로 계속해서 군자 계급에게 착취당하는 ‘노예’가 존재했다. 이들이 바로 민(民)이다. 이들은 서주 시대 당시 육체노동에 종사했다는 점에서 경제적 측면에서는 소인과 비슷했지만, 귀족들에게 예속되어있다는 점에서 소인과 정치적 측면에서 크게 달랐다. 소인은 비록 자신의 몸을 써서 일할망정, 어느 누구에게도 전인격적 구속을 받지 않는 ‘자유민’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소인은 “서주 시대에 이미 자기 집단의 권익과 요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군자’가 그들의 견해를 ‘반드시 알아야 하고’ ‘반드시 들어야 할’ 만큼 사회적 역량도 갖추고 있었다.”[각주:25] 그 결과, 소인은 춘추 시대 들어 사유제가 득세하면서 보다 큰 힘을 얻고 군자 계급과 대립할 수 있는 유력 계급으로 떠오른 것이다.
따라서 민은 분명 ‘군자’와 ‘소인’이라는 범주 외에 존재하는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권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노력자(勞力者)’라는 특성만으로 민과 소인을 같은 존재로 상정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므로 춘추 시대 당시 군자와 소인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이 글에서는 더 이상 민의 존재를 다루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과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인’과 ‘민’의 대비보다는 ‘군자’와 ‘소인’의 대비가 더 유용하기 때문이다.
4) 소결
이상 춘추 시대 당시 군자와 소인간의 관계에 대한 조기빈의 검토는 기존의 전통적 해석과 다른 참신한 관점을 제공한다. 군자와 소인이 더 이상 단순히 지배/피지배 계급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춘추 시대 들어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로 말미암아 기존 지배구조 역시 변화하여 주도권을 놓고 대립했던 두 계급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자가 단순히 사회 안정과 발전, 덕치만을 바라며 학문과 교육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혹은 자신이 지지했던 군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대립물인 소인을 비판한 것이라는 주장은 『논어』의 내용 및 당시의 시대상과 맞물려 보다 설득력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사회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만들어진 현대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기반해 쓰여진 탓인지, 지나치게 물적 토대를 중시하고 이원적 계급관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도식에서 군자를 귀족으로, 소인을 부르주아로, 민(民)을 프롤레타리아로 치환하면 서구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고 미래를 점쳤던 마르크스의 이론이 탄생한다. 이는 곧 조기빈이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기반하여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논어』를 해석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이 같은 분석의 의의를 살리되 어떻게 군자와 소인이 사회를 구성했고, 유지시켰는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4. 덕을 통한 군자와 소인의 조화 가능성
1) 응보(應報) 관념으로서의 덕
일반적으로 덕(德)의 의미는 ‘개인의 탁월한 도덕적 자질’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유교에서 군자의 덕목으로 중시하는 인(仁)과 예(禮) 등은 구체적으로 덕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덕목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이 덕은 전국 시대 이전 고대 중국을 꿰뚫는 열쇠말로 볼 수 있다. 『논어』부터 시작해 『좌전』이나 『국어』, 그리고 이전의 갑골문이나 청동기 명문 등에 덕이 계속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덕이 “국운의 흐름, 개별적인 정치 행위, 위정자의 자질 등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구성하기 때문이다.[각주:26] 그러나 덕이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자질만을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다. 춘추 시대 당시 군자들에 의해 숭상되었던 덕의 의미에는 일종의 ‘응보’ 관념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니비슨과 먼로의 연구 성과[각주:27], 『시경』, 『상서』등의 구절을 참고해보면 덕은 “언제나 타인의 보답이나 호감을 가져오는 자질”[각주:28]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형태는 시혜나 관대함 등으로 나타난다. 이는 덕이 동사의 형태로, 예를 들면 『좌전』 희공 24나 『좌전』 성공 3년 등에서 ‘A德B’의 형태로 쓰여 A가 B의 베품에 대해 부채감이나 존경을 갖는다는 의미로 쓰였던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덕은 단순히 일방적인 자질이 아니라 일종의 상호적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자질이었던 것이다. 이는 고대 중국의 사회적 제도에서는 제후국들 사이의 관계에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어느 한 나라가 위기에 처한 다른 나라에게 물질적 ․ 군사적 도움을 준 경우 수혜국은 훗날 이를 되갚고자 할 것이다. 이 때, 그에 상응하는 등가물을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 대신 자국을 도와준 나라의 자국에 대한 정치적 우월성을 인정하여 하나의 ‘신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즉, 덕을 매개로 하여 종속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이는 당시 군주와 백성들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특히, 상주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공동체가 씨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신민과 관계를 맺고 이를 유지하는 능력이 ‘왕의 덕’으로써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 때 덕은 물리적 시혜뿐만 아니라 도덕적 감화를 포괄하는 의미였다. 『논어』뿐만 아니라 『좌전』, 『국어』 등 춘추 시대의 저작들이 “네 가지 덕[四德], 여섯 가지 덕[六德], 일곱 가지 덕[七德] 등의 표현을 통해 덕의 구체적인 내용을 열거하거나 효성스러움, 공손함 등과 같은 덕목”[각주:29]을 한정어로 표현한 것과 예(禮)나 인(仁) 같은 세부적 덕목을 이야기 한 것은 이것들이 당시에 관계 형성과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토지나 조세 제도 등을 정비하여 소인(小人)과 민(民)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 역시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덕으로 여겨졌다.
이런 덕은 서로 다른 계층이 한 사회 내에서 화합(和)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지배층이 도덕적 행동이나 물질적 시혜를 통해 피지배층의 감화를 이끌어낸다면 이 둘은 대립하지 않고 사회의 지속과 발전을 위해 융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때 덕은 강제적인 것과 무관했다. “선진 시대 문헌의 많은 곳에서 덕은 폭력에 근거한 위엄[威], 군사력[力]과 대립하는 말로 사용”[각주:30]되었다. 강제력과 달리 덕은 이에 대한 상대의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우호적으로 이끌어내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2) 군자와 소인 사이의 덕
그렇다면 군자와 소인은 어떤 덕을 갖고, 혹은 이를 통해 관계 맺으며 살아갈까. 군자가 시혜를 내리고 소인이 이로부터 감화되어 적절한 반응을 보인다고 보는 것은 전통적 해석에 입각한 이해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논어』가 쓰였던 춘추 시대 당시 이미 소인이 기존의 피지배층으로부터 벗어나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군자와 대립하는 하나의 정치적 계층으로 성장하였음을 보았다. 따라서 둘 사이의 관계가 단순히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이어주는 응보 관념으로서의 덕으로 연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군자는 제4편 11장의 ‘군자회덕’이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성인의 덕에 감화된 존재이다. 그래서 그는 평생에 걸쳐 덕을 숭상하고, 이를 지켜나가고자 노력한다. 이에 반해, 소인은 ‘회토’, 즉 토지라는 생산 수단을 중시하는 인물이다. 이 같은 대비는 일견 군자와 소인이 덕을 통해 맺을 수 있는 관계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군자에게 소인은 덕을 통해 교화하여야 할 대상이다. 부릴(使) 대상인 민(民)에게는 고작 군사교육으로서의 교육(敎)만 주어질 따름이지만, 부리는 한편 사랑(愛)해야 할 대상인 인(人), 그 중에서도 덕이 아닌 이익을, 의로움이 아닌 이로움을 좇는 소인에게는 군자의 도덕 교육(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각주:31]
한편, 소인에게도 군자와의 관계는 필요하다. 소인의 이로움은 결국 군자의 덕, 의로움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가능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혼란하면 경제 질서 역시 어지럽혀진다. 이는 곧 사유 재산에 기반한 소인의 존재를 위협하게 된다. 따라서 소인 역시 이를 막기 위해 군자의 덕과 의로움에 협력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인이 군자의 덕에 대해 ‘고마움’ 등의 감정을 느끼고 감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제12편 19장[각주:32]은 군자와 소인의 덕이 다름을 말한다. 즉, 군자와 소인은 제각기 다른 덕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소인이 군자처럼 사람을 다스리는 덕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인 역시 자신을 위해 필요한 사회의 화합(和)을 위해 군자의 덕에 대해 보답할 줄 아는 덕은 가진 존재다. 다만, “군자는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사람[勞心者]으로서 시혜와 도덕에 대해 능동적이고 소인은 힘을 쓰는 사람[勞力者]으로서 시혜와 도덕에 대해 수동적이라는 점”[각주:33]에서 차이를 지닐 뿐이다. 따라서 소인은 “출발 지점으로서의 반응 능력”을 갖고, 군자는 “목표 지점으로서의 완성된 인격”[각주:34]을 가진 존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군자와 소인은 단순히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서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사회 조화를 위해 협력하는 것이다.
3) 소결
덕(德)은 오늘날 생각되는 것과는 달리 고대 중국 사회에서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자질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사람들 간의 관계를 만들고, 유지시키는 ‘응보’ 관념으로서의 의미 또한 가졌던 것이다. 이는 본래 덕이 추구하는 목표인 사회의 조화(和)를 이루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 같은 덕의 성격은 군자와 소인 간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본래의 의미인 덕을 숭상하고 이에 따라 교화에 나선 군자에 대해 소인은 ‘반응 능력으로서의 덕’을 갖고 보답하는 것이다. 이는 양자가 각자의 존재를 위한 사회의 화합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다시 말해, 군자와 그의 정치적 대립물로 등장한 소인의 관계는 단순한 대립 관계가 아니라 각자를 위해 ‘덕’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협력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5. 현대 한국 사회에 필요한 ‘군자’와 ‘소인’
그렇다면 현대 한국 사회에서 고대 중국 사회의 인간상인 군자와 소인, 그리고 그들의 관계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먼저, 군자는 보통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 그대로를 존속시키되 현대적 상황에 맞추어 개선할 점을 인식하고 고쳐나가면 된다. 군자는 본디 덕을 숭상하고, 이를 인생의 목표로 삼아 끊임없이 자기반성을 하며 수양을 닦아 나가는 삶의 방식이다. 이는 분명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맹자에 따르면, 사람은 ‘사단(四端)’을 갖고 있어 이를 잘 돋우어 진정한 사람됨을 실현시킬 수 있고, ‘대체’가 ‘소체’를 통제할 수 있기에 금수와 다른 존재다. 이를 완벽히 구현한 이가 바로 군자다. 인격적으로 완성된 개인들이 모여 구성한 공동체는 그렇지 않은 데에 비해 훨씬 더 안정되면서도 풍요로운 삶을 구가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의 군자상은 분명 개선되어야 할 점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노심자’인 자신들만이 ‘성인’의 말씀을 받드는 ‘인간’이고, 소인과 백성은 자신들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오늘날처럼 신분제가 철폐된 사회에서 시대착오적이다. 그러나 일종의 ‘엘리트주의’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런 생각은 요즘에도 많은 사람들, 그 중에서도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고 불리며 사회적 ․ 정치적 ․ 경제적인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서 이따금 비쳐지곤 한다. 그들이 내면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이에 걸맞은 스스로를 만들기 위하여 항상 자기수양에 전념하는 것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자칫 이런 ‘엘리트’들을 ‘민중’으로부터 괴리시켜 이들이 자신들의 경계 안에 갇혀 세상을 편협한 관점에서 재단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 그/녀들이 보기에 민중은 우매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에 만연하여 있는 학벌구조는 엘리트가 다른 사람을 출신 학교에 따라 재단하게 만드는 등 이 같은 문제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시대착오적인 엘리트 의식은 혁파되어야만 한다. 만약 엘리트 의식이 각 개인의 내면에만 머문다면 사회적 문제를 낳지 않겠지만, 자칫 이 같은 엘리트주의자들이 집단으로 뭉칠 경우 그들의 권력을 바탕으로 ‘평민들’ 위에 군림하려는 태도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과 가치를 중시하는 자신들과는 달리 자신의 생계와 이익을 중시하는 소인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저점을 인식한 엘리트가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어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려고 한다면, 그/녀는 비로소 주변 사람들에 의해 진정한 ‘군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될 수는 없다. 특히, 오늘날 한국과 같이 물신주의가 팽배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덕만을 고집하는 것은 스스로를 사회에 내맡기는 무책임한 행위와 같다. 게다가 한국 사회에서는 앞에서는 도덕을 논하며 뒤에서는 돈을 챙기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즉, ‘군자의 상업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차라리 솔직하게 경제적 측면을 도외시하지 않는 인간의 존재도 필요하다. 현대 자본주의와 같이 고도의 생산력을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는 이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지속적인 생산과 발전이 뒤따르는 것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로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전형인 소인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소인의 의미는 단순히 물질적인 측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인식만으로는 단순히 전통적인 『논어』 해석에 그치고 만다. 춘추 시대 당시 군자와 소인의 존재와 관계에 대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고려한 인식을 한다면, 소인이 군자와는 다른 나름의 ‘덕’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이 덕은 일종의 ‘반응 능력으로서의 덕’이다. 고대 중국에서 사회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던 시혜나 관대함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군자의 덕에 대해 소인은 걸맞은 보답, 즉 ‘응보’함으로써 사회를 조화시키는 데에 한 축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 군자와 소인간의 관계를 전통적 해석에 입각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 당시 두 계급은 정치와 경제를 각각 전담하며 협력을 통해 사회 안정을 추구했던 존재였다.
따라서 현대 한국 사회가 고대 중국의 군자와 소인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은 두 집단이 ‘덕’이라는 것을 통해 관계를 맺고, 조화를 이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개인적 군자’와 ‘사회적 소인’의 덕목을 가진 인간상의 출현이다. 개인적인 군자는 말 그대로, 인과 예, 의를 중시하며 개인의 인격적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물인 고전적인 군자상을 의미한다. 이 같은 군자가 사회적으로 다른 군자와 관계를 맺기 위해 필요한 것이 ‘소인의 덕’이다. 소인은 군자의 덕에 대해 자신 나름의 덕으로서 보답할 줄 아는 존재다. 만약 사회가 고고한 군자들만으로 가득하다면, 고전 경제학적 공리주의의 관점에서는 사회적으로도 군자의 이상에 가까운 것이 성취되겠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서로 분리된 개체의 군집만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내면적으로는 군자처럼 성숙하되 외면적으로는 상대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며 이에 보답하는 소인으로 가득하다면, 사회는 단순한 개체의 집합이 아니라 진정한 ‘공동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와 소인의 결합이 필요하다. 이익만을 밝히는 소인이 지배적이라면, 그 사회는 분명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없다. 그런 사회는 홉스가 인간 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의 자연 상태를 그리며 언급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시장이 전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고, 또 이를 확대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사람들에게 이익을 멀리할 것을 호소하는 것은 배를 이용하지 않고 태평양을 헤엄쳐 건너가라는 말 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앞서 여러 번 언급했다시피,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도 물적 토대가 필요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되, 사회 안정을 해치지 않는 정도 내에서, ‘군자의 덕’을 갖춘 상대의 은혜에 대해 충분히 반응할 줄 아는 ‘소인의 덕’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같은 변화는 지나친 ‘도덕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한국인들에게 분명히 하나의 처방이 될 수 있다. 한 순간에 내면적으로 군자의 덕을 갖추는 것이 힘들더라도, 일단 상대의 덕에 대해 반응하는 것만으로도 ‘덕의 완성’을 위한 길에 들어섰음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시간을 갖고 자기 수양에 정진한다면 내면의 군자를 완성시키는 것 역시 결코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6. 나가며
군자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인정받는 하나의 인간상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요약되는 군자의 이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향점으로서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군자와 대비되는 인간상인 소인은 개인의 이로움이나 밝히는 존재로 여겨져 오랜 세월동안 배척되었다. 실제로, 『논어』에서는 수십 차례에 걸쳐 군자와 소인이 대조되어 이 같은 사람들의 인식을 뒷받침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군자관과 소인관은 편협한 시각이다. 공자 스스로도 그렇게 되고자 하였고, 후학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친 탓에 군자가 소인에 비해 매우 부각되고 있긴 하지만, 군자와 소인이 이렇게 대비되기까지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경제적 조건의 발전은 군자로 상정되는 지배층과 일종의 위계관계를 맺고 있었던 자영농들로 구성된 소인이 상공업에까지 진출하며 실력을 쌓아 노예주 귀족 계급에 대항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 결과, 공자는 ‘극기복례’라는 평소의 이상을 따라 이런 소인에 대항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고민했고, 『논어』는 일종의 그 산물이었다. 따라서 당시 공자가 소인에 대해 제기했던 비판은 가치중립적이기보다는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렇게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공자가 그토록 강조했던 덕이라는 것은 단순히 이런 차원의 이유로 인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고대 중국에서 덕은 ‘응보’라는 관념을 담고 있었다. 다시 말해, 군자가 개인의 내면에 덕을 쌓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다스리던 소인과 백성에게도 그 덕을 행하고, 이에 대한 응답을 듣는 형태로 사회가 구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군자와 소인은 각자의 덕을 갖고 이를 통해 조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는 다시 말해, 사회가 서로 다른 계급들 간의 화합위에 번성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덕의 내용과 존재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군자의 이상이 강하게 자리잡은 나라에서는 오히려 이에 반대되는 ‘소인’이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소인은 자신의 이익을 챙길 줄 알면서도 ‘군자’의 덕에 충분히 보답할 줄 아는 인간이다. 이는 단숨에 군자가 되는 것보다 쉽다. 그리고 보다 현실적이다. 뿐만 아니라, 차후 덕을 지속적으로 쌓고 스스로를 계속 향상시켜 언젠가는 ‘대인’, 즉 군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갖고 있다. 차라리 겉으로 ‘군자’임을 내세우기 보다는 소인을 겸손히 자처하며 끊임없이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군자의 덕목에 더 가까운 것일 수 있다. 군자가 될 수 없는 조건, 즉 현대 자본주의 내에서 각자가 각자의 생존을 위해서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모두에게 군자가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위선적이다. 이는 ‘국가’라는 ‘유사 가부장’의 이미지를 국민에게 각인시켜 그/녀들을 좀 더 쉽게 동원하려는 지배층의 의도일 뿐이다. 군자에게 국가를 향한 충성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같은 ‘가짜 유교’의 주입은 오히려 사회적 인격과 내면적 인격의 분리를 낳아 위선적 개인만을 양산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차라리 보다 현실적인 ‘소인’의 길을 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군자로의 지향을 거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군자라는 궁극적인 지향을 위해, 출발점인 소인부터 되고자 하는 것이다. 상대의 덕행에 대해 보답할 줄 아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덕이고, 또 군자로서의 덕의 시작이다. 위선적인 ‘군자’보다는, 소인이 되자. 소인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