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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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에게 독서를 권함 / 강유원 (armarius.net)

zeno 2008. 7. 4. 07:54

[[삼국지]]나 [[초한지]] 같은 중국 무협 소설을 번안해서 돈을 많이 벌고 있는 번안 무협작가 이문열 -- 조갑제도 아닌 -- 이 "의병"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 나는 그로써 대변되는 보수 지식인들 --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 의 무지몽매함과 시대착오적인 사태 파악에 몹시 속상했다. 보수 지식인들은 걸핏하면 '어떻게 지켜온 대한민국인데 좌파 빨갱이들에게 나라를 내줄 수 있단 말인가'라며 핏대를 올리지만 사실 그 대한민국에 좌파 빨갱이는 한 줌도 되지 않으며, 있다해도 국민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극히 미미하다. 아니 한국 사람 전체를 좌.우 이념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한국 사람들은 돈과 권력 모두를 쥔 자, 돈 많이 벌어 떵떵거리고 싶은 자, 돈 많이 벌고 싶은데 잘 안되어서 열받은 자, 돈이고 뭐고 신경 안쓰고 자기 수양한답시며 우아하게 사는, 현실의 열세를 정신적 우월감으로 해소하는 극소수의 도덕주의자로 나누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보수와 좌파 빨갱이의 세력 분포는 2008년에 치러진 18대 국회의원 선개의 득표수만 계산해봐도 금방 알 수 있다. 한나라당, 친박연대, 자유선진당(보수 지식인들은 통합민주당도 좌파라고 하니 계산에서 빼자)의 득표수를 합하면 천만에 가깝다. 조선일보 논설실장 송희영이 "보너스도 못받고, 시간외 수당도 못받고, 유급휴가도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 560만"을 거론했는데, 이들도 대다수가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에 투표하지 않았다. 이 두 당의 득표수를 합하면 고작 150만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은 틀림없이 가차없이 보수의 나라다. 보수가 정치, 경제, 교육, 문화를 지배하고 대다수의 유권자들이 그들의 정책을 지지하며 따르는 나라다. 광우병 쇠고기에 반대해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거리에 나선 엄마들도 굳이 이념적으로 따지자면 보수에 가깝다. 보수의 중심가치가 무엇인가. 애국, 애족, 가족 사랑아닌가.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을 선출한 과천 시민들이 쇠고기 반대 펼침막을 내건 것은 가족의 건강을 지키고자 하는 보수 이념에 충실한 행위다. 그들이 언제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자는 좌파에게 표를 던진 적이 있는가. 상황이 이러한데도 보수지배층과 지식인이 무식하고 시대착오적이면 국민은 마음 둘 곳이 없고, 보수 지배층과 지식인이 헛소리를 해대면 흔들린 국민의 마음이 나라를 흔든다. 좌파 빨갱이들이야 아무리 떠들어도 반체제 폭력집단으로 몰아부치면 보수적인 국민들에게서 소외된다. 바짝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천만의 유권자가 뒤에 있는데 뭐가 걱정인가.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이문열의 "의병" 발언은 탄탄한 보수의 나라에서 보수 지식인이 터뜨린 자살폭탄이나 다름없다. 조선시대 의병들은 누구를 적으로 삼았는가. 그들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했다. 지금의 쇠고기 반대자들 역시 외제 고기에 반대한다. 멀쩡하면 반대할 일 없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에 앞장서서 시위를 이끌어도 시원찮을 판에 그들을 무찌를 의병을 조직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아군을 적으로 돌리는 이 엄청난 실수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보수를 믿고 따랐던 국민들의 배신감을 상상이나 해보았는가. 그러나 이것은 어찌보면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지금까지 보수 지배계급과 지식인들의 지도와 훈육을 잘 믿고 따르던 보수적인 국민들 밑바닥에서 동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저들의 시위는 이번 기회에 나라를 뒤엎고 빨갱이 천국을 만들자는 꿍꿍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중에는 그런 불순한 심사와 계획을 가진 망상가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는 앞서 말했듯이 한 줌도 되지 않는다. 두 달 가까이 시위가 계속되었지만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은 것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생업에 바쁜 진짜 서민들은 시위가 장기화되는 것에 짜증을 내고 있기도 하다. 국민들이 시위에 나선 것은 아파트 값 올려서 돈많이 벌게 해줄거라고, 취직 잘 되게 해줄거라고, 내 자식 잘난 학교 보내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 해줄거라 여기고 있었는데 그것도 잘 안될 것 같은데다 당장 라면도 마음놓고 먹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적인 국민들은 보수 지배층이 안심만 시켜주면 그 안심을 돈독하게 해주는 조처만 취해주면 얼마든지 그것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달리 말해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저 국민들이 사실은 내 편임을 알 수 있는데도 이문열은 시대에 한참 뒤진 헛소리로 그들을 저버린 것이다.

이제 이문열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명해졌다.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좀 더 차분하게 현재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의 수준에 걸맞는 전략적 사고를 바탕으로 해야한다. 그런데 공부를 안한 탓인지, 인터넷은 무조건 좌파 빨갱이들이나 하는 것이라 여기는 탓인지, 보수적인 국민의 심사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한나래, 2007)라는 책을 권해주고자 한다. 이 책은 1980년대 영국 보수당의 위대한 승리인 대처리즘의 등장과 지속을 분석한 것이다. 당연히 이 승리는 좌파의 철저한 패배를 바탕에 깔고 있다. 어떤가. 구미가 당기지 않는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보수 지식인들은 이 땅에서 좌파를 말끔히 척결하고 대한민국을 영원한 보수의 나라로 유지해 나가는데 필요한 정치경제적 프로젝트를 세우는 법이나 국민들의 삶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그들의 마음까지도 사로잡는 비법을 배울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국민 다수가 전쟁의 기억을 갖지 못한 상황이니 군복입고 썬그라스 낀 노인들이 떠들어봐야 촌스럽기만 하고 장차 보수의 동량이 될 젊은이들에게 어필되질 않으니 외국에서 나온 이런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조선일보를 열심히 읽으며 촛불집회를 못사는 자들의 집단 어거지로 여기는, 고급 스테이크 사먹을 돈 없으면 고기 안먹으면 되지 뭐 저렇게 난리냐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멋진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적 문화이론가이다. 이를 두고 좌파 빨갱이에게 뭘 배우느냐면서 나의 권유를 조롱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 사람이 가는데 나의 스승이 있다'거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선현의 말씀을 새기는 것이 보수 지식인의 참된 미덕 아니던가. 나는 좌우 가리지 않고 좋은 책이라면 열심히 읽고 가끔 번역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세상 살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이 조언 역시 그러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 더 하자면 앞으로 무협지는 그만 읽는게 좋겠다. 사람이 영 모자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