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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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 Zenol

세계정복

zeno 2007. 9. 22. 21:32
  오랫만의 포스팅이다. 그간 바쁜 '척' 하느라고 포스팅 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은 한 친구의 요청을 이유 삼아 내가 왜 세계정복이란 꿈을 포기했나에 대해 쓰려고 한다.
  세계정복이란 꿈을 가지게 된 건 대략 중학교 때였다. 사실 내 원래 꿈은 탐정이 되는 거였다. 그래서 추리 소설도 많이 보고, 추리 만화도 많이 보고, 나름 공부도 하고, 연습도 했었다. 그렇게 꿈을 키워나가던 중, 어느 날 알고 말았다. 한국 사회에서 탐정 사무소를 차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실제로, 아직까지도 한국에서는 탐정의 개념이 희박하고, 탐정 사무소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불륜 현장을 쫓아다니며 협박용 사진이나 찍는 흥신소나 심부름 대행 업체 정도에 불과하다.
  이후에는 특별한 꿈이 없었다. 기껏해야 기자나 교수 정도? 허나 그 꿈들은 탐정을 꿈꾸었을 때만큼 구체적이지도 않았고, 딱히 열망되지도 않았다. 그렇게 꿈은 흐지부지되어 갔다. 그러다 이우혁의 '퇴마록'을 접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말세편'은 내 관심을 단번에 끌어갔고, 난 점차 민족주의적인 열망에 강하게 빠져들게 되었다.
  사실 내가 민족주의에 침윤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말 때부터의 일이다. 그런 거대 담론에 쉬이 포섭되기 쉬운 소년에게 김경진의 '데프콘'은 그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게다가 '민족'을 학교명 가장 앞에 내세운 고등학교 생활은 주변 '쓰레기' 같은 작자들의 '생각 없는' 민족주의가 아닌 진짜 민족주의를 실현하고, 국가가 아닌 민족에 내가 받은 것을 돌려주겠다는 생각을 품도록 이끌었다.
  이는 '세계정복'이라는 꿈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캐나다를 다녀온 뒤부터, 국력에 비해 결코 인정받지 못하고, 알려지지 않은 대한민국이라는 것이 너무 싫어서 한국인에 의한, 한국민을 위한, 한국인의 세계 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꿈을 품게 되었다. 중2 때 다녀온 태국 세계 잼버리에서 그 생각은 동지들을 규합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꿈의 표출은 고등학교 재학 당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난 중학교 3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예비 입교'라는 이름으로 11월 중순 경 미리 들어가 기숙사에서 살고,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며 일종의 적응기간을 보냈었다. 그 때, 프로그램 중 하나가 반 전체가 '집단 상담'을 받는 것이었다. 그 때 한 일은 주로 초등학교, 중학교 때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했듯이 간단한 신상명세와 자기 꿈, 자기를 소개하는 말 등을 적는 것이었다. 난 너무나도 당연하게 장래 희망에 '세계 정복'이라 써 냈고, 한 반에 15명 밖에 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급우들 앞에서 이를 발표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후 소문은 꽤나 퍼졌다. 바로 그 상담교사가 친한 학생들에게 내 꿈이 특이하다며 말을 옮긴 거였다. 심지어 1년 선배인 형들과 축구를 하는데 한 형이 '네 꿈이 세계 정복이라며? 내 꿈은 우주 정복인데, 부하할래?'라며 놀릴 정도였다. 허나 난 능청스레 매 상황을 넘기며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저찌하다 보니 대학에 갔다.
  대학교 1학년 생활은 나를 바꿔 놓았다. 사실 어떤 특정 사건을 계기라 꼽기엔 힘들다. 책을 읽고, 반 선배들을 통해 보다 사회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가가게 되고, 이야기를 하며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이유들을 모두 나열하기에는 글 흐름이 중간에 한번 열흘 가량의 간격을 갖고 끊겼기 때문에 다 써내려갈 자신이 없다.
  그래도 조금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자면, 먼저 '정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고 있는 군사주의적 의미 때문이다. 아직도 '병영국가'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대한민국이라는 곳의 국민인 나는 자연스레 군사주의의 '효용'이라 보이는 것들 - 예를 들면, 폭력은 대화보다 더 빠르게 목적을 성취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경험적인 지식 - 을 몸에 익히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교 1학년 동안의 생활은 이런 생각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로부터 다시금 깨닫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난 미련 없이 나의 군사주의적인 습관들을 모두 일소해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그 결과, '정복'을 꿈꾸는 생각 역시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공자가 일컬은 바 있는 '대동사회'를 꿈꾸었으면 꿈꾸었지, 결코 '정복'이라 부르는 방식의 세계 단일화를 이루겠다는 생각은 아예 버려버린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가 '세계'란 말 때문이다. 요즘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세계화globalization'이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에 기반하여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별로 긍정적이지 못하다. 개인적인 이상에 따르자면, globalization보다는 internationalization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래서 '세계'란 말에 부정적이다. '국가'란 개념이 사라지기를 희구하기는 하나, 자본이 국가를 잠식해버리고, 더 나아가 '인간'까지를 위협하는 globalization따위는 개나 줘버리지.
  그래서 지금 가진 꿈은 소박하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진보시키는 것, 그게 다다. 거기다가 개인적으로는 내가 행복해지는 것, 이 정도가 내 꿈의 전부다. 그래서 지금 현재 이렇게 살고 있다. 때때로 아쉬움도 많지만, 그래도 현재 사는 것에 대체로 만족한다. 그래서 나는 쉽게 절망하지 않고, 조금 더 나아가고자 노력한다. 그게 내가 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