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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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 Zenol

[소설] 어느 여름 날

zeno 2007. 8. 20. 00:22

  그 날 역시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어느 여름 날'일 뿐이었다. 짙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창백하지도 않은 푸른 하늘이 낮게 머리 위로 드리워져 있고, 구름은 간간이 빠른 속도로 지나갈 뿐이고, 햇살은 늘 그랬듯이 강하게 피부를 파고들던 그런 여름 날.
  그 날은 내게 마지막 날이었다. 그 곳에서의 출국을 하루 앞둔, 그런 마지막 날. 꽤 오래 머물렀던 곳이기에 하이드 파크에 앉아있던 짧은 시간 동안 기억들이 바다 위에 부유하는, 편지가 든 빈 병처럼 떠다녔다. 그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날이니 만큼, 또 하나의 특별한 추억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일상 속의 특별한 경험 말이야. 그래 좋아, 가자. 나는 그렇게 하이드 파크를 나섰다.
  피카딜리 서커스를 지나 레스터 스퀘어에 도착하니 10시 쯤이었다. 그 곳은 늘 그렇듯, 모처럼 큰 맘 먹고 시작한 유럽 여행의 시작점에서 유명한 뮤지컬이나 한편 볼까 하고 두리번거리는 얼띤 표정의 내 또래 배낭여행객들로 가득했다. 난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잠시 벤치에 앉아 워커스 한 봉지를 뜯으며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그 때였다. '런던'이라는 빨갛고 큰 글씨가 자랑스럽게 쓰여 있는 노란 여행 안내서를 든 한 한국 여성이 tkts 앞에 줄을 서 살짝 긴장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저기, 한국 분이신가 봐요?
  - 예? 예.. 그 쪽도 그러신가 봐요.
  - 예. 흐흐. 뮤지컬 보시려구요?
  - 네. 웨스트 엔드에서 시카고 한 편 안 보고 가면 유럽 여행 헛한 거라 길래...
  - 여행 초반이시죠?
  - 네, 오늘이 실질적으로 첫 날이에요. 어젯 밤 늦게 런던에 도착했거든요.
  - 앗, 전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인연이네요. 괜찮으시다면 오늘 같이 안 다니실래요?
  - 예? 아, 전 여기서 티켓을 끊어야 해서요.
  - 흐흐. 시카고 보신다면, 여기보다는 다른 데에서 사시는 게 쌀 거에요. 여기 가이드 북에 나온 것만큼 마냥 싼 것만은 아니어서요.
  - 예? 그래도... 정말이에요?
  - 네. 내일 한국 간다는 사람이 설마 거짓말 하겠어요? 저만 믿으세요. 자, 그럼 가시죠?
  - 아, 그런데 그 쪽 성함이...
  - 전 제노라고 해요. 그 쪽은?
  - 전 모모라고 해요.

  모모라는 그녀. 키는 160 후반에 살짝 마른 체형. 나이는 이십대 후반 정도 되는 듯. 꽤나 예쁜 얼굴이었다. 마지막 날 하늘이 점지해주었던 것일까. 그동안 내내 한참 어린 애들과 상대하느라 혼자 늙은듯한 착각에 빠져 살던 내게 오랫만의 연상녀는 청량감과 운명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었다.

  - 저기요. 근데 정말 딴 데가 더 싸요?
  - 그럼요. 보세요, 저기 저 앞에. 시카고 31파운드라고 쓰여 있죠? 아까 거기서는 37파운드 였잖아요. 좀 더 가다보면 더 싼 데 나올 거에요.
  - 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 쪽, 아니 제노 씨는 뮤지컬 안 보세요? 아, 내일 가신댔으니까 이미 보셨으려나? 시카고 안 보셨다면 같이 보셔도...
  - 저요? 시카고는 이미 봤어요. 후훗. 그냥 낮에 같이 다니다가 저녁 때 극장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오늘 어디어디 갈 건지는 다 정하셨어요?
  - 오늘 가고 싶은 데는 대충 정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제대로 정한건지. 사실 어떻게 가야할지도 잘 모르겠고... 여행, 이번이 처음이라 잘 모르거든요. 제노 씨는 여행 많이 해보셨나 봐요?
  - 전 그냥 뭐, 취미 삼아 가끔 다녀요. 다행히도 이 곳은 꽤 오래 있었으니 오늘은 저만 믿으시죠. 어차피 전 내일 돌아가는 터이고, 돈도 많이 남았으니 인연 삼아 오늘은 제가 다 쏠게요. 아, 뮤지컬 티켓은 빼고요!
  - 오? 정말요? 아, 근데 혹시 저기, 나쁜 쪽 분 아니시죠? 인상은 좋으신데, 처음부터 그렇게 친절을 베푸시니까...
  - 쉿. 아가씨, 조용히 해. 두리번 거리지 말고 나만 따라 와. 소리 지르거나 남 부르면 알지?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수가 있어. 빨리 따라와.
  - 네넷?
  - 농담이에요! 장난이에요, 장난. 솔직히 의심스러울만도 하죠. 저 같아도 당장 의심하겠는걸요. 하지만 걱정 마시라. 전 그냥 선량한 한국 대학생일 뿐이랍니다. 오늘은 정말 아무 사심없이 제가 쏠게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런던에서의 데이트라니, 뭔가 있잖아요?
  - 하, 하하... 농담도 그런 농담은 차암... 그나저나 지금 어디 가시는 거에요? 저기 시카고 27파운드에 판다고 쓰여 있는데.
  - 아, 그렇네요. 어서 가서 사시죠. 그리고 혹시 차이나 타운 가보셨어요? LA의 차이나 타운 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여기도 차이나 타운 있고 그런데... 아직 여행 초반이시니 한국 음식 안 그리우시겠지만, 나중에 그리우시면 각 도시마다 한 군데 쯤은 차이나 타운 가보세요. 음식들 대체로 먹을만하고, 간혹 한국 음식도 팔아요.
  - 그렇군요. 저, 잠시만요.

  레스터 스퀘어에서 차이나 타운으로 가는 길에 마침 뮤지컬 시카고 티켓을 싸게 파는 부스가 있었다. 그녀가 잠시 그 곳에 들어가 티켓을 사는 동안, 나는 가로등에 기대서서 오늘 갈만한 곳을 머리로 떠올렸다. 사실, 워낙 갑자기 생긴 동행이라 얼떨떨하였다. 아무리 내가 먼저 말을 걸었기로서니 갑작스러운 연상녀 동행이라니.

  - 제노씨?
  - 예? 아, 예. 티켓 사셨어요?
  - 네. 고마워요! 처음부터 이렇게 아끼게 되다니. 제가 마실 거라도 하나 살까요?
  - 아, 됐어요. 오늘 제가 쏜다니까요? 자, 이제 지갑은 넣어 두시고. 제노와의 데이트, 즐길 준비 되셨습니까?
  - 네? 후훗. 그래요, 준비 됐어요. 그럼 신사님, 저를 인도하시겠어요?
  - 자, 그럼 가실까요?

  되먹잖은 농담으로 서먹함을 좀 덜고 나니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아직 아침이라 식재료를 들여오느라 부산한 차이나 타운은 늘 그렇듯 동행에게 활기로부터 느껴지는 재미 혹은 누추함으로부터 풍겨 나오는 구질구질함의 극단을 달리기 마련이다. 옆을 살펴보니, 다행이군! 전자 쪽으로 기운 듯하다.

  - 엇! 벌써 12시가 훌쩍 지났네요. 배 안 고프세요? 여행은 자고로 속 안 버려야 잘 하는 여행인데.
  - 아, 저는 괜찮은데. 제노 씨, 배고프신가 봐요?
  - 하핫. 실은 제가 좀... 제가 잘 아는 곳 한 군데 있는데, 같이 가실래요?
  - 뭐, 저야, 그러죠 뭐.

  그녀와 함께 간 곳은 Mr. Wu. 1인당 4.95파운드에 부페식이기에 여러 가이드 북에 소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딱 가격대에 알맞은 음식들을 내놓아 내가 꽤 좋아하는 곳이다.
 
  - 니 하오. 얼. 하오?
  - 하오, 하오. 츠 마.

  내 중국어의 전부다. 하도 들락거렸더니 가게 사람들이랑 안면이 트여 이 정도만 해도 다 된다. 자, 과연 그녀가 좋아할까?

  - 모모 씨. 앉으세요. 그럴듯한 레스토랑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을 거에요.
  - 와, 중국어 잘 하시나 봐요? 저, 그럼 실례.
  - 아, 저게 제 한계에요. 늘 저 정도만...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늘 그랬듯이 오늘도 내 몫은 서비스다. 자, 어디 보자. 오늘은 오렌지 치킨과 사천 볶음면이 주 메뉴군.

  - 거거, 니 데코레이트 마?
  - 하오, 하오. 웨이트, 선.

  영국에 있는 화교 음식점이어서 그런지, 신기하게도 중국어와 영어의 혼용이 가능하다. 그러니 내가 여길 좋아하지! 잠시 후, 부탁한대로 살짝 꾸민 음식이 나왔다. 과연, 그녀의 입에 맞을까?

  - 모모 씨, 드세요. 어서요.
  - 네. 그럼 잘 먹겠습니다!
  - 후훗.

  생각 외로 잘 먹는다. 이 여자, 좀 귀여운 걸? 그렇게 점심이 지나고, 오후는 내셔널 갤러리, 트라팔가 광장, horse guard, 웨스트 민스터 사원을 거쳐 템즈 강변을 따라 걷고, 테이트 모던에 이르는 것으로 지나갔다. 이 날 오후는, 한국에서 함께 온 배낭여행객 커플이 그렇듯, 그렇고 그런 모습으로 채워졌다. 너무 들뜨지도, 그렇다고 너무 차분하지도 않은, 그런 모습으로. 사실 내게는 이 모든 곳들이 슬슬 싫증이 나던 터라 특별한 기억으로 남지 않았다. 그저, 템즈 강변에서 함께 맞았던 바람이 기분 좋았다는 정도?

  - 와, 시간 정말 빨리 가네요. 오늘 어떠셨어요?
  - 좋았어요! 혼자 다녔더라면 헤맸을텐데, 덕분에... 헤헤...
  - 영국까지 오셨는데 펍 한번 가보셔야죠? 따라 오세요!

  이번엔 그녀를 데리고 늘 가던 찰스 로드 펍에 갔다. 템즈 강가에 있으면서도 너무 번잡하지 않아 내가 좋아하는 그 곳 말이다. 늘 먹던 대로 기네스 한 파인트와 하이네켄 한 파인트, 피시 앤 칩스 하나, 너겟 앤 칩스 하나.

  - 자, 드세요! 이게 바로 영국의 전형적 펍이랍니다!
  - 와, 많이 오셨나봐요. 이거, 정말 마셔도 되요?
  - 그럼요! 한국에서도 마실 수 있는 맥주지만, 맛이 다를걸요?
  - 네에. 그럼 건배!

  딱 내 타입이다. 아,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니 아쉬운 걸. 하지만, 결심은 지키라고 있는 걸. 펍에서의 즐거운 시간도 곧 끝나고, 어느새 7시.

  - 모모 씨. 뮤지컬 보러 가셔야죠.
  -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아, 가요, 가.
  - 자, 먼저 나가세요.

  여느 영국 지역이었다면 이 시간 거리는 한산했겠지만, 런던 중심부 답게 이 곳은 시끌벅적하다. 관광객들로 가득찬, 메트로폴리탄.

  - 이제 굿바이네요. 뮤지컬 재밌게 보시고요. 나머지 여행도 즐겁고 건강하게 잘 하세요.
  - 아, 연락처라도?
  - 여행지에서의 추억은 추억으로 남아야죠. 그럼 이만!
  -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꼭 잘 돌아가세요!
  
  제임스 조이스 극장을 뒤로 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그래, 이렇게 깔끔하게, 쿨하게. 원래 바랐던 대로. 언더그라운드를 타고 다시 체셤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꽤나 따분하다. 아, 근데 잠깐만!




  - 익스큐즈 미, 써.
  - 예스. 메이 아이 헬프 유?
  - 야, 에이 맴 드랍트 헐 펄스. 아이 쿠든트 체이스 애프터 허. 벗 아이 파운드 헐 호스텔 어드레스 앤 네임. 아이 띵크 유 메이 리치 헐.
  - 오케이, 유 굿 보이. 해브 어 굿 나잇.



  안녕하세요. 놀랐죠? 나에요, 제노.
  사실 제 이름은 제노가 아니에요. 설마 한국인인데 이름이 그거 겠어요.
  그냥, 뭐랄까, 음, 그래, 짧은 인연을 기념하고 싶어서 일부러 가명을 썼어요.
  그냥, 음... 젊은 날의 추억으로 남고 싶달까? 그래서 사진도 안 찍고, 모모 씨에 대해서 물어보지도 않았고, 연락처도 드리지 않았죠.
  그냥, 이 지갑 앞으론 저 같은 건달에게 걸려서 털리지 말고 꼭 잘 갖고 다니세요. 앞으로 여행 한참 남았잖아요. 오늘 이 지갑 슬쩍했던 건 정말 장난이었어요. 언제 가져간지도 몰랐죠? 후훗.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정말로.
  앞으로 또 인연이 있다면 만나겠죠. 그러면, 그날까지 안녕.

                         2007년 8월 10일,
                                   런던에서,
            당신과 함께여서 행복했던,
                                         제노.



  마지막이어서 그만큼 아쉬웠던 걸까. 자그마한 손장난은 결국 그녀와의 마지막 기억으로 남았다. 지금쯤이면 그 지갑을 갖고 세느 강 유람선 위에서 파리를 만끽하고 있겠지. 내 젊은 날의 추억 한 조각으로 남은 그대여, 안녕. 그 해 어느 여름 날은 그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