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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니스판 ‘승희 조’, 샤일록 - 영화 『베니스의 상인』을 보고 본문

평 / Review

[영화] 베니스판 ‘승희 조’, 샤일록 - 영화 『베니스의 상인』을 보고

zeno 2007. 5. 12. 00:20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의 스토리는 지극히 ‘권선징악적’이다. ‘악인’인 유태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삼천 다켓이라는 거금을 빌려주는 대가로 트집을 잡아 ‘선인’인 상인 안토니오의 목숨을 빼앗으려다 결국 현명하고 아름다운 ‘포샤’의 지혜로 오히려 패가망신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5년 알 파치노와 제레미 아이언스 등이 열연한 영화 『베니스의 상인』에서도 그 내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알 파치노의 열연 덕분인지, 극본 각색 과정에서 고려된 탓인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동안 받아왔던 차별과 경멸, 억압 등을 강변하는 샤일록의 모습에서는 ‘약한 인간’의 모습이 발견된다. 이미 진부한 내용이긴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서양에서 유대인이 기독교도들에게 받아온 미움과 푸대접은 유명하다. 그런 환경은 그들로 하여금 ‘돈’만을 믿도록 만들었고, 기독교에서 금하는 ‘이자’를 받는다는 이유로 그들의 ‘게토화’는 계속되었다. 샤일록 역시 그런 유대인의 전형이다. 상업의 도시 베니스에서 그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라는 이유로 주변인들에게 무시와 경멸을 당했고, 그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키워갔다. 그리고 그 분노가 ‘안토니오’라는 구체적 인물에게 ‘삼천 다켓’을 기화로 집중되었고, 샤일록으로 하여금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지난달 이맘때쯤 태평양 건너에서 서른 명이 넘는 사람을 죽인 ‘승희 조’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아직 수사가 진행 중이고 바다 건너에 있어서 정확한 정보를 알 수는 없지만, ‘승희 조’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된 심층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자신을 튕겨내는 그런 세상을 상징하는 ‘가진 자들’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죽인 사람들은 평소에 ‘개인적 원한’이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단순히 ‘계획적 범행’에 ‘우발적’으로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명확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분노의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던 것이다.
  영화에서의 샤일록 역시 ‘승희 조’ 같은 모습을 보인다. 물론 안토니오에 대한 개인적 증오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샤일록은 자신을 ‘악마’라 비난하며 ‘튕겨 낸’ 사회와 이를 구성하고 있는 ‘베니스 인’에 대해 뿌리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자신에게 가장 심하게 대해온 사람 중 한명이었던 안토니오에게 그 분노의 화살이 집중된 것이다. 그가 만약 21세기 초입의 미국에서 살았다면, ‘제2의 승희 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둘을 그대로 등치시키는 것은 억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초에 그들을 튕겨내고 따뜻한 관심과 배려를 보이지 않았던 사회에 불상사의 원인을 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의 ‘피해자’이다. 중세의 유럽이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가혹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샤일록은 쓸 데 없이 안토니오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승희 조’가 미국 사회에 잘 융화되었더라면 애꿎은 수십 명의 목숨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죄를 무조건 사할 수만은 없다. 원인이야 어쨌든, 분명히 ‘죄’를 저지른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샤일록이야 ‘현명한’ 포샤로 인해 안토니오의 목숨도 빼앗지 못하고 그의 악행에 걸맞은 벌을 받았지만, ‘승회 조’는 다른 사람들에게 갚을 수 없는 누를 끼치고 벌도 받지 않고 가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사건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을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