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에 걸린지 일주일이 넘었다. 콜록콜록 거리는 기침, 내가 뭐라고 지껄이는지, 무슨 말을 하고픈건지도 잘 모르면서 되는대로 주워섬겼던 말들, 지나친 기침의 연속으로 찾아온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두통, 약 때문인지 아파서인지 하루 종일 나른해서 매 수업에서 잤던 날들, 태어나서 이렇게 오랫동안 쉬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오래 쉰 상태인 목소리, 지쳐가는 나날들,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발대식에서 혼자 툴툴대며 재미없다고 찌질대고 있던 시간들, 한동안 답을 찾아오다가 누군가의 말로 조금이나마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대화, 그동안 말로만 들었을 뿐 보지 못했고 그래서 느끼지 못했던 누군가의 눈물, 그 눈물을 보고 든 후회와 반성 그리고 애정, 그 와중에 잔머리를 굴려 비오는 사이로 사람들을 데려다 주던 센스, 정말 전혀 먹지 않은 술 값과 안주 값을 내려니 미칠듯이 아까웠던 돈들, 사람들을 데려다 주는 와중에 지난 몇 주간 가고 싶었던 노래방에 대한 갈증 때문에 불렀던 두 곡, 폐까지도 목소리가 안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짜증났던 노래, 그리고... 무언가 하려던 의지에 역행하는 신체를 느끼며 자포자기 하고 있는 지금.
감기로 시작해 하고 싶었던 말들은 이제 끝.
머리가 혼란스럽다. 아니, 멍하다. 어젯 밤, 아니 오늘 새벽에는 여러 생각들이 물 흐르듯이 매끄럽게 이어졌었는데. 감성적인 것이든, 이성적인 것이든. 지금은 파편처럼 어구 몇 개만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나중에 더 보론해야겠다. 그래도 감히 시작해보련다. '발행' 포스팅임에도 불구하고 관심 있는 사람들만 읽어주기를 바라는 이야기를. 먼저, 반성한다. 어제 그 순간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사람의 눈물을 보기까지는. '인간 해방'이라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이름 아래 내가 힘들어 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여성 해방'이라는 이름아래 나보다 더 실존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기수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정말 '얼마나' 더 힘들까라는 말은 할 수 없지만, '서수적'으로는 나보다 백만배 쯤 더 힘들 것 같다. 그래서 미안했다. 내가 '여성주의'라는 - 나도 잘 모르는 - 것에 대하여 노력하고 있을 때, 오지 않는 그 사람에게 섭섭함을 느끼며 - 사실 이런거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은 생각하지도 않고 늘 그 사람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웃긴 일이며, 말도 안된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고, 또 현실이다. - 그 사람은 그 사람의 문제보다 '더 큰'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닐까라며 생각했었는데 오늘 깨달았다. 그건 나의 '오만'이었다는 것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어떤 문제가 어떤 사람의 삶에서, 실존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차지하는 가를. 그래서 내 주변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늘 이 점을 불평하는 나 였지만, 나도 이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사람의 '문제'를 '이해' - 사실 이 단어가 적절할지는 잘 모르겠다. -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게는 더 '작은' - 전혀 '하찮다'는 의미는 아니다. 절대로. - 문제로 보였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큰'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또 하나 반성해야 할 점이 있다. 나는 동성의 주변 사람들과 주로 이야기하고, 같이 지내려고 하면서, 나와 다른 생물학적 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자주 이야기하고, 지내는 것을 보면서 무언가 기분이 나빴다. 나 역시 그렇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스스로들을' 게토화'시킨다고 생각한 적은 전혀 없다. 다만 무언가 '여성'에 대한 환상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였기에 그런 관계를 '질투'하거나 '시샘'했던 것 같다. 그걸 이제서야 '인식'하다니 나도 참 웃긴 녀석이다. 한편, 요즘 들어 갈구해오던 답을 찾았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공산주의자'이다.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공산주의자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게 '공산주의' 그 자체라면. 그래서 난 나를 스스로 그렇게 규정하고, 또 규정받을 수 있다, 떳떳이. 누군가 나를 '공산주의'라는 이름 때문에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지 '명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방법론은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씨부리는 것'이다. 물론,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그래도 '최소한' '어느 정도'는 아는 게 필요하다. 그것도 '제대로.'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이들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미지 만으로 다른 것들을' 재단'하곤 한다. 대표적으로, '빨갱이'라는 말, '소피스트'라는 말, 그리고 기타등등. 그건 좀 아니다. 알면서도 욕하는 것이야 말로 정말 '어처구니'없지 아니한가. 그래서 며칠 전, 한 사람이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싫어하도라도 알고 싫어하려고' 철학을 선택했다는 말. 철학이 됐든, 무엇이 됐든 알고 싫어해라.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대화가, 삶이 성립되지 않는다. 나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나는 사람과 쉬이 가까워지지 않는다. 그게 성격 탓이든, 환경 탓이든. 언제나 steady & slow. 괜히 '가식'을 섞어가고, '오바'해 가며 쉬이 친해졌다가 - 애초에 '친해지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 쉬이 헤어지고, 욕하고, 화내다가, 증오의 관계로 돌아서고 싶지 않다. '마음을 주는 것', 쉬이 하지 않는 대신, '진실'되게, '영원'하게 하고 싶다. 그래서 아직도 이렇게 우물쭈물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랬더니 역시 사람들이 나를 잘 모르더라. 뭐 어쩔 수 없지, 다 내 탓이니까. 그런데 사람들을 보면 좀 안타깝다. 한 때 그렇게 죽고 못살던 사이가 어느날 갑자기 갈라지고, 멀어지고, 감정이 상하고, 비난이 오가고, 서로 증오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저주에 이르는 사이들이 너무 많다. 그런 걸 보면 마음이 아프다. 왜 그러지, 어차피 함께 살아가는 것인데. 난 그러고 싶지 않다. 예전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싶지 않다. 물론, 필요하면, 정말 어쩔 수 없다면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김규항의 글을 통해 흔들리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되찾았듯 - 예수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였다고 유명하지만, 그 역시 성전을 더럽히던 상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욕했었다. 즉,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그런 '분노'를 표현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 인간에 대한 사랑은 근저에 꼭 자리잡게 하고 싶다. 다만 아직 생각이 불완전한지라, 때로는 '미워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한다'는 역설. 한편, 난 사람을 쉽게 '좋아한다.' 누군가 아파하는 것을 보면, 착한 것을 보면, 어느새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때론 사고를 치기도 하고,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지난 몇년간 정말 죽을 것 같이 아프고, 힘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몰라 주더라 그런걸. 어쨌든 쉬이 '좋아하기 때문'에, 이토록 '연애'를 하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을 쓰기에는 주저된다. 무언가 그 엄청난 말을 쓰기에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말을 써 본 사람은 단 한명 뿐 밖에 없다. 결국 상처만 남았지만. Out of sight, Out of mind. 경험적으로 볼 때, 대체로 - 물론 예외도 성립하지만 - 맞는 거 같다. 그런데 수학적으로 보자면, 동치 명제인 In of mind, In of sight 도 성립한다. 즉, 마음에 담겨 있으면 눈 앞에 보이지 않아도 안 보이는 게 아니다. 물론, 이는 말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4월이다. 2007년의 1/4이 지나가고, '잔인한 달' 4월이 시작된다. 나의 2007년 4월, 지금까지 그 어느 4월과도 다른 4월이 될 듯한데,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