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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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읽기 / 지는 것을 알아야 자유롭다 / 박구용

zeno 2007. 2. 23. 11:14

  언제부턴가 사랑 이야기를 담은 대중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면 눈물을 흘리곤 한다. 예술과는 거리가 먼 유치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상처받은 자의 마음이 쉽게 내 것이 된다.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 때문이 아니라,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상처를 소독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오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자신을 부정해야 할 만큼 깊은 상처가 나에게 없었던 것이다. 이기는 길만 찾아왔을 뿐 제대로 지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큰 노력 없이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으며 살 수 있었던 행운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처가 내게도 찾아왔다. 늦었지만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지는 것을 배우는 과정은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으면 강요당한 자기상실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부정만이 자기 긍정의 유일한 길인 셈이다. 그 길이 어둡고 외롭다고 회피할 때 남은 선택은 비굴한 변절 아니면 죽음뿐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자살이나 한때 정의를 외쳤던 사람들의 변절은 어쩌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는 것을 배우지 못해서다.
  모든 비극은 가장 소중한 사람이 받은 상처조차도 함께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기억과 연상을 통해 머리나 심장으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몸으로 해야 하는 체험은 불가능하다. 다른 사람과 한몸이 될 수 없는 한, 상처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다. 더구나 진정한 상처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상흔을 껴안고 자기 부정을 감행한 사람만이 타인과 몸으로 만날 수 있다.
  모든 상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다. 관계가 깊어지면 상처도 깊어진다. 그래서인가? 나이가 많을수록 엷은 형식적 관계에 만족하는 것을 삶의 지혜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몸으로 함께하는 만남과 소통을 처음부터 포기한 이들에게 사랑이 찾아올 수 없으며 그 덕에 상처도 없을 것이다. 남은 것은 꽉 짜인 기능적 연관관계뿐이다. 부모와 자식, 선생과 학생, 남편과 아내, 선배와 후배, 상사와 부하, 자본가와 노동자만 있고 사람은 없다. 각자의 역할과 기능만 있을 뿐 삶의 의미와 자유는 없다. 상처받지 않으려 한쪽은 권위를 앞세우고, 다른 쪽은 생각을 멈춘다. 지는 것을 모르는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다.
  벌써부터 대학 캠퍼스가 새내기들을 위한 갖가지 행사로 요란하다. 선배들이 마련한 모임에 명찰을 달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새내기들을 보면 내 마음도 어느새 분주해진다. 가정과 학교에서 오직 이기는 법만 배워 온 학생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이겼다!’는 말로 자기최면을 걸며 끝없는 자부심으로 뭉친 학생이 있는가 하면, ‘졌다!’는 자괴감 때문에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학생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품고 사는 자부심이나 열등의식에는 그럴법한 이유나 근거가 없다. 부모나 선생, 그리고 이 사회가 강요한 성공 이데올로기의 잔여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유 없는 자부심과 열등의식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학생들은 대학에서 자유의 이념과 학문의 정신을 누릴 수 없다. 그들에게 대학이 줄 수 있는 것은 높낮이가 분명한 학벌뿐이다. 이들은 결국 자기 부정은 하지 않고 타자만 부정하며 오랫동안 이 땅을 지배해 온 변절의 달인들처럼 성장할 것이다. 올해의 새내기들이 지는 것을 배우기 위해 누군가를 그리고 학문을 맘껏 사랑했으면 한다. 자유인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진리를 사랑하는 일은 한 쌍이다. 상처 없이는 사랑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들은 눈물 속에서 자유를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