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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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읽기 / 정답은 없거나 아주 많다 / 이윤재

zeno 2007. 2. 23. 11:12

  대한민국의 겨울은 대학 수학능력 시험과 함께 오고, 졸업식과 함께 떠나간다. 올해에도 봄이 다가오는 길목에서 약 60만명의 젊은이가 전국의 대학에 진학하고, 또 그 수만큼 대학을 졸업한다. 그 졸업생 한 사람 한 사람을 축하하고 싶다. 이 나라 제도교육의 굴레에서 ‘일단’ 해방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는 아니지만, 이제까지 그들이 지내온 날들이 인간으로서의 행복한 삶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아니 그들뿐만 아니라 이 땅의 거의 모든 자식들은 행복을 언급하는 것이 사치스러울 정도의 육체적·정신적으로 ‘쫓기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초등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 시절까지는 모든 초점을 조금이라도(자신보다는 부모나 남들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준비에 맞춰 살아야 하고, 대학생이 되어서는(역시 자신보다는 남들의 기준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준비에 몰두하며 살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삶의 방식은 대부분 그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요구하는 바를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인 결과다. 경제력이나 사회적 식견과 경험에서 절대적으로 취약한 처지에 있는 그들은 사실상 스스로의 생활 방식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없으며, 자신들의 미래를 좌우할지도 모를 중요한 판단이나 의사결정 과정에서조차 발언권이 제약된다. 여기에서도 자원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힘의 논리가 적용되므로 약자인 자식들은 당연히 밀릴 수밖에 없다. 다만 부모와 자식 사이 힘의 불균형은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 사회의 자식들만 그토록 정신없이 쫓기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회적 약자인 그들의 행복과 인권에 대하여 아직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수능시험이나 내신, 논술, 고등학교 평준화와 같은 입시제도의 잘못 때문에 이처럼 야만적인 현상이 생겼다고 믿고 있다. 예를 들어 지배 엘리트들은 수월성 교육을 강조하며 평준화가 교육을 파국에 이르게 한 주범이라고 끊임없이 지적하여 왔다. 그러나 최근 특목고 입학을 위한 학원교육의 과열 현상이 입증하듯, 이제 와서 평준화를 폐지한다면 학생들의 전반적인 부담은 줄어들기는커녕 훨씬 더 가중될 것이 뻔하다. 이른바 명문대학을 겨냥한 지금의 선행학습에 더하여, 명문 고등학교를 겨냥한 추가적인 선행학습이 훨씬 저학년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입시제도를 아무리 고쳐도, 학력의 위력을 손수 체험한 어른들의 계급적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살아 있는 한, 학생들의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이다.
  결국 학생들에게 정상적인 일상을 회복해 주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해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하나는 대학의 뿌리 깊은 서열구조고, 그 둘째는 대부분의 부모들이 지녀온 자식의 행복에 대한 강박관념이다. 대학 서열구조를 해체하려면 무엇보다도 그 정점에 자리잡은 서울대학교의 발전적 존폐 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사학이 아닌 국립대학인 이상, 서울대학교의 장래에 대한 논의는 전반적인 교육 개선의 관점이 먼저여야 마땅하다.
  부모들도, 인생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고 자기 자식이 그 정답에 어떡해서든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이제는 지워야 한다. 이른바 사회적 상류층에 속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고, 자식을 그쪽으로 이끌어주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압축성장 시대가 남긴 유산이다. 변화의 시대를 살아갈 자식에게 주고 싶은 인생의 정답은 없거나 아주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