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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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야!한국사회 / 창의성 없는 지적 생산물과 우리의 관용 / 이영미

zeno 2007. 1. 17. 20:58

끊이지 않는 논문 표절 문제는 쉽게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표절 당사자들이 말하듯 그야말로 ‘관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관행은 부도덕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관행과, 우리 사회의 지적 생산자들의 창의성 부족 풍토, 여기에서 비롯되는 창의성 없는 지적 생산물에 대한 너그러운 관행이 뒤엉켜 있다.

‘관행’의 문제를 조금 뒤로 미루고 창의성 부족의 문제부터 이야기해보자. 우리나라에서 연구 행위가 일종의 창조와 생산의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연구하고 논문 쓰는 생산 행위에 이르지 못하고 그저 남의 지적 생산물을 ‘소비’하는 ‘학습’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연구자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입론(立論) 없이 오로지 남의 이론(대개는 다른 나라의 이론이다)을 번역하여 요약하고 소개하며, 여기에 몇 개의 사례들을 덧붙여 그 이론이 옳음을 증명하고 끝나버리는 논문, 자료 조사와 문헌 해제로만 가득 찬 논문이 우리나라에는 의외로 많다. 대학에서 보아도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아이들 중 태반은 별로 창의적이지 않고, 남의 책을 읽으면서도 그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며 자신의 새로운 입론을 주장하여 그것과 부딪치는 짓을 잘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짓을 하면 교수에게 야단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도 많다.(실제로 야단을 치는 창의적이지 못한 교수들도 있다.) 소비 행위인 ‘학습’만으로 연구를 끝내버리는 태도다.

그러나 이런 연구성과에 대해 우리 사회는 매우 너그럽다. ‘관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른 사회적 맥락과 만났을 때는 다른 대처가 필요하다. 한 연구자가 외국의 이론서를 고스란히 요약하고(물론 각주도 열심히 달지 않았다) 약간의 한국 사례만을 덧붙여 논문을 썼다. 몇 년 뒤 그 분야의 연구성과가 축적되면서 많은 연구자들이, 외국의 그 책을 보게 되었고 한국 연구자의 글은 그 외국책을 고스란히 요약한 창의성 없는(적나라하게 말하면 표절한) 연구라는 것을 다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그다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나라 학계의 ‘관행’이었고 다 서로 아는 처지에 ‘까칠하게 굴기’ 싫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는 그 분야의 중요 연구자로 대접받았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외국의 이론을 ‘학습’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뒤, 그는 외국에서 그 분야 한국 연구자의 중요 성과로 바로 그 글을 번역해서 발표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과연 이 연구자는 어떻게 했겠는가? 번역을 하면 자신의 표절은 너무 뻔하게 드러날 것이니 난감했을 것이다. 결국 그 연구자는 논문을 새로 써서 외국에 보냈다.

지적 생산물의 소유권에 대해 경우 없는 이런 태도는 제자 논문의 표절 사건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논문지도를 해본 내 경험으로도, 내 머리로 생각한 주제, 논지를 주고 목차도 함께 짜고 심지어 문장까지 많이 가필해준 경우, 그의 것인지 내 것인지 심정적인 혼동을 겪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자신의 것을 제자에게 주고 아까워하는 생각은 자기 마음 속에서 삭혀야 마땅하다. 주었으면 소유권은 이제 제자의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이 별로 없다면 남에게 준 것은 특히 더 아까울 것이다. 문제는 늘, 자신의 창의성 역량보다 더 많은 성과를 내고 싶어 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 광고를 베껴오고 외국 노래를 베껴오고, 동료와 나눈 이야기를 재빨리 자신의 소설로 포장하여 발표하는 게 아니겠는가. 제발 가진 것만큼만 내놓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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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솔직히 찔린다. 나도 '공부'하겠답시고 나대다가 저렇게 되는 것 아닐까. 안 그러려면 '실력'과 '양심'이 살아있어야 한다.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