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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 / Review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 The devil wears Prada

zeno 2006. 12. 24. 00:07
  현대인들은 행복을 연기한다. 열심히 일하고, 또 일하고, 또 일하면서, 행복을 누리는 것을 연기한다. 그리고는 말한다. "더 나은 행복을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과연 그 끝은 어디일까? 아마 죽음 혹은 퇴직 후 닥쳐오는 허무와 괴로움 뿐일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인은 바쁘다. 그리고 '나' 주변에 '모든 사람들'은 바쁘게 달려간다. 그래서 나도 어쩔 수 없이 끌려 가듯이 바쁘게 살아간다. 그렇게, '행복'을 위해 시작된 레이스는 '끝 없는' 행복을 갈구하는 '욕망의 꼬리 물기'로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를 동경한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그런 현대인을 풍자하면서 일견 '건강한 삶'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과연 정말 그럴까? 주인공 '앤디'는 어느덧 '미란다'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잡지사에 취직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녀가 거기서는 '다운-쉬프트'적인 삶을 살아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또 다른 잡지사에서 또 다른 '미란다'가 되기 위해 행복을 연기해가며 끝없이 달려갈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보스턴으로 직장을 옮기는 남자친구는 '행운'이다.
  '성공 지향성'은 버리기 힘든 습성이다. '사회화'가 이루어진 개인에게 '성공'은 궁극적 혹은 본질적 목적으로 여겨지게 된다. 하지만 그 성공-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에 대한 집착은 결코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결국 또 다른 고통, 인내, 그리고 일상의 지속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를 지향한다. 이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 '남들이 그러하니까.'
  학생들도 끊임없이 앞을 향해, 성공을 향해 달려간다. 중학생은 특수목적고나 자립형 사립고 같은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고등학생은 SKY라 불리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대학생은 철밥통을 보장하는 '고시'나 삼성전자 '취업'을 위해, 학원에 다니는 직장인은 보다 더 많은 '보수'를 위해. 그렇게 끊임없이 행복은 연기된다. 그래서 그들은 시험이나 과제에 맞서 밤을 새우고, 학원에 다니고, 토익을 보고, 공부를 한다. 이에 의문을 품은 사람도 속칭 '대세'에 이끌려 불안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들에 이끌려 함께 한다.
  그 결과, '대안'적인 삶을 꿈꾸는 사람은 비웃음을 사고 자꾸 흔들리게 된다. 보통 의지가 강하지 않으면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덧 남들과 같아진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란다. 그러나 이내 생활 양식을 바꿀 용기는 갖지 못하고 관성에 묻혀 살아간다. 그렇게 행복은 오지 않고 우리는 죽고 만다.
  그러기 위해서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서로를 파멸로,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경쟁이 '성공'을 가져다 준다고 할 때 그렇게 경쟁에 뛰어드는 것이 과연 '행복'을 가져다 줄까? 글쎄. 그런 경쟁이라면 사양. '행복'의 탈을 쓴 '고통'을 견뎌야 할 바에야 다른 행복을 찾을래. 남을 짓밟고 올라가야만 하는, 남을 해쳐야만 하는 경쟁은 결코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나는 그래서 경쟁을 '증오'한다. 승자가 생기면, 패자가 생긴다. 패자도 행복하다면 좋겠지만 현실의 관습은 그렇지 않다.
  경쟁은 인생을 너무 피곤하게 만든다. 그래서 늘 피곤하고, 그로부터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느라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