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평 / Review (59)
.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나이보다 열 살은 족히 들어 보이는 늙수그레한 외모, 보는 사람의 생기마저 앗아가 버릴 듯한 음울함, 히키코모리를 떠오르게 하는 무뚝뚝함, 그야말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을 온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듯한 그, 이시가와. 이미 개봉한지 시간이 지난 터이고, 또 영화 자체가 초반에 용의자 X의 정체를 공개하니 여기서도 까놓고 시작해보자. 그렇다. 예상대로, 이시가미가 용의자 X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떠올린다면 그대는 인문학의 영향을 '좀' 받은 이일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시가와는 '인간'인가? 앞서 외양과 느낌을 묘사한 데서 느껴지듯이 그란 인간은 사실 일반적 '인간'의 상과 상당히 다르다. 아니, 오히려 가장 멀리 ..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 - 이지민 지음/문학동네 p. 205 진짜 똑똑하고 예쁜 여자들은 능력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게 아니라 그냥 사랑하는 남자들이 죄다 능력이 있다. 선정적인 제목 탓에 보게된 책이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봤는데, 나쁘지 않다. 일종의 연작 소설 시도도 보이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똑같은 상황을 보는 시각의 차이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 생물학적 성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잘못하다간 섹스 결정론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판단 보류. 사실 읽은지 너무 오래 됐다. 간간이 관심을 갖고 지켜볼 작가가 생겼다는 정도.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김영하 지음/문학과지성사 p. 196 여행이란 그렇다. 그것이 일이든 여가이든 오래 하다 보면 묵은 상처들이 드러난다. 그게 서로에게 소금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약이 된다. 조그만 외로움도 증폭되어 서로에게 전가된다. 차가운 도시 남자 김영하의 초기작이다. PC통신이 주로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90년대 도시의 느낌이 물씬 난다. 전반적으로 좋다. 역시 김영하는 단편이 장편보다 나은 듯. 그는 정말 영리한 작가다.
여자에게 - 장영희 외 지음/한겨레출판 p. 16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남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다. 사람은 단지 인(人)에서 끝나지 않고 인간(人間),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존재 의미가 있다. p. 39 내가 20대로 돌아간다면 괜히 긴장하지 않겠다. 무작정 무서워하지 않겠다. 다가오는 사람들을,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 않고 차분히 받아들이겠다. 지나친 독서는 미리 겁을 주는 역할도 한다. 다 자라기도 전에 마구잡이로 읽은 무수한 소설들은 사랑을 무서운 일로, 파괴적인 일로 묘사했다. 고전 ..
손님 - 황석영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p. 138 생각해보라우, 너이덜이 반말지꺼리나 하구 아무 생각두 없넌 반편이라구 여기던 이찌로가 글얼 읽게 되어서. 박일랑이라구 제 이름얼 쓰게 되었디. 해방언 이런 거이 아니가. 너이가 이밥 먹구 따스한 이불 덮구 학교 댕기멘 글을 배워 교회두 나가구 성경두 읽구 기도 찬송하넌 동안 나뭇짐이나 지구 소겉이 일만 허던 박일랑 동무가 '토지개혁'이란 글자를 읽고 쓰게 되었던 거다. 해방. 그래, 이런 것이 해방일지도. 이 역시 오랫동안 벼르고 있다 본 책이다. 기대 이상. 사실 에서 꽤나 실망을 했던터라 역시 한국 무속 신앙으로부터 모티브를 차용해온 에 대한 기대가 조금 덜 했었는데, 요 근래 본 소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축에 들게 되었다. 교차적으로 구성한..
마이너리그 - 은희경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p. 53 사람들은 자기에게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멈추고 돌아보니 그렇게 의식없이 보내버린 시간이 쌓여서 바로 자기 인생이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뭐라고? 나는 좋은 인생이 오기를 바라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아직 인생다운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내가 무턱대고 살아왔던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이었다고? p. 128 나의 신중함과 완벽주의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진취성이 부족하다는 거였다. 그런 판단의 저번에는 팀장이 개띠 동기의 대학 선배라는 사실, 그리고 둘다 고향이 같다는 사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학연과 지연만 패거리를 만들고 세를..
무중력 증후군 - 윤고은 지음/한겨레출판 p. 104 무엇이든 금세 잊고 치유하는 이 도시에서는 반복적인 것이 곧 두려운 것이 된다. 사람들은 하나의 절도 사건, 하나의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특별한 공포를 느끼지 못하지만, 그것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겁을 내기 시작한다. 종지부를 찍지 않은 모든 것은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긴장하게 만든다. 한 번은 이상한 것으로 지나가지만, 여러 번 반복되면 징크스가 되고, 또 공포의 대상이 된다. 이에 대처하는 방법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길 뿐인가. 솔직히 말해서 작가가 '예뻐서' 읽기 시작했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 그녀가 한겨레에 쓴 기고를 보고 '아니, 소설가가 이렇게 예뻐도 된다니! 이건 사기 아냐! 공지영으로도 충분하다고!'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마침 학..
오빠가 돌아왔다 -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창비(창작과비평사) p. 183. 여자는 요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관습적으로 우울하고, 물론 살기도 혼자 살고, 친구도 없다. 나중에 죄도 없이 할복을 당한 인형이 그녀의 유일한 친구다. p. 227. 재만은 입맛을 잃었다. 역겨웠다. 그는 찬찬히 면면들을 둘러보았다. 저 철면피들. 수천 명의 재산을 간단하게 꿀꺽하고도 아침이면 호텔 식당의 메로구이를 집요하게 발라먹는 저 놀라운 식욕, 추악한 욕망. 문제는 재만도 그들과 전적으로 같은 종자라는 데 있었다. 그제야 재만은 동업자들에게 철저히 냉소적인 조지 쏘로스의 심정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희대의 국제투기꾼을 생각하다보니 재만의 결론은 다소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그러니까, 네놈들 돈까..
동정 없는 세상 - 박현욱 지음/문학동네 pp. 83 - 85. - 포르노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의 포르네(porne-)에서 파생된 거야. 포르네(porne-)라는 것은 창녀를 의미하는데 그것도 특히 오직 최하층의 창녀를 의미해. 주로 전쟁터에서 포로로 끌려온 여자들이지. 노예까지 포함해서도 여자 중에 가장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들이야. 말 그대로 명백한 성적인 노예라고 할 수 있지. 그리고 그라피는 글쓰기, 그리기의 뜻이니 이걸 합쳐보면 포르노그라피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섹스에 관해 묘사하기 정도의 뜻이겠지. 곧 여자를 아주 천한 창녀로서 생생하게 묘사하는 거야. 고대 그리스에서 모든 창녀가 다 천하게 여겨진 것은 아니야. 고급 창녀들은 지적 수준도 높았고 문화적인 교양도 있어고 아무 남자하고나 상대하..
그 남자 그 여자 - 이미나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말머리를 달기가 어려웠다. 에세이로 분류해야 할지, 연애로 분류해야 할지, 잡문으로 분류해야 할지. 알라딘의 분류는 '예술/대중문화.' 그래서 이를 따르기로 했다. 긴 말을 하지 않아도 감이 올 것이다. 이 책의 성격이 얼마나 불분명한가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연애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남자'와 '여자'의 시각에서 쓴 1페이지 짜리 짧은 글들이 수백개가 실려 있다. 책 안에 있는 소개로는 '이소라의 음악도시'에 실렸던 내용이라 한다. 굳이 평가할 만한 것이 없다. 그 안에 글이라고 있는 것이 활자화되어 인쇄되어 있긴 하나 '예술'이라 부르기에는 아무런 예술성도 갖추고 있지 못하고, 책을 9500원이나 주고 사기에는 차라리 2500원 더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