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설] 동정 없는 세상 <★★★> 본문

평 / Review

[소설] 동정 없는 세상 <★★★>

zeno 2009. 2. 21. 13:52
동정 없는 세상 - 6점
박현욱 지음/문학동네

  pp. 83 - 85.

  - 포르노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의 포르네(porne-)에서 파생된 거야. 포르네(porne-)라는 것은 창녀를 의미하는데 그것도 특히 오직 최하층의 창녀를 의미해. 주로 전쟁터에서 포로로 끌려온 여자들이지. 노예까지 포함해서도 여자 중에 가장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들이야. 말 그대로 명백한 성적인 노예라고 할 수 있지. 그리고 그라피는 글쓰기, 그리기의 뜻이니 이걸 합쳐보면 포르노그라피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섹스에 관해 묘사하기 정도의 뜻이겠지. 곧 여자를 아주 천한 창녀로서 생생하게 묘사하는 거야. 고대 그리스에서 모든 창녀가 다 천하게 여겨진 것은 아니야. 고급 창녀들은 지적 수준도 높았고 문화적인 교양도 있어고 아무 남자하고나 상대하지도 않았어. 단지 포르네이아(porneia)만이 그렇게 취급된 거지. 말하자면 포르노라는 것은 남자의 관점으로, 그것도 아주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여자를 가장 천한 노리개로 삼는 것을 묘사하는 거야.
  - 뭐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워.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 어려울 거 없어. 만약 누가 너를 벌거벗기고 네 성기를 맘대로 늘였다 줄였다 장난치고 발기시켜서 희롱하고 나뭇가지 같은 걸로 툭툭 건드리면 기분 좋겠어?
  - 예쁜 여자가 해준다면 좋겠지만, 흠...
  - 포르노가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는 얘기를 하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언제 한번 너한테 얘기하려고 했는데 이제라도 다 지운다니 다행이네.
  - 삼촌, 그러면 포르노는 무조건 보면 안 된다는 거야? 성인이 되어서도?
  - 글쎄, 그건 어려운 문제야. 표현의 자유를 생각하면 포르노를 만들면 안 된다고만 할 수도 없을 것 같고. 뭐, 어쨌든 포르노의 사회정치적 의미는 논외로 치더라도 하여튼 성장기에 포르노에 탐닉해서 좋을 건 없지.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머릿속에 처음 각인되는 여자의 몸이라는 것이 금발에 글래머라는 것도 좀 웃기는 얘기고. 외국 여자들의 벌거벗은 사진을 보다보니 막상 우리나라 여자들의 몸이 빈약하게 느껴지는 거지. 이것도 문제야. 그렇다고 국산 포르노를 장려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리고 사실 어른들에게도 포르노가 좋을 리는 없을 거야. 생각해봐라. 포르노를 보면 여자들이 사무실에 있는 모습이 나온 후 곧바로 나체가 나와. 여자들은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는 거야. 그리고 거기 나오는 여자들은 대개 완벽한 몸매와 미모를 지니고 있지. 언제나 남자가 상황을 지배하고 폭력과 강제성을 띤 환상을 제시해. 무슨 얘기나면 전혀 보편적이지 않은 상상만을 하게 만든다는 거야. 예컨대 포르노를 보며 자위를 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위하는 동안 성적인 상상을 하는데 이 가상의 실체가 오히려 현실의 실체보다도 더 생생하거든. 그리고 가상 속에 나오는 여자들은 어떤 자기의지도 갖지 않은 존재들이고.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여자와 만나서 실제를 섹스를 할 경우에 그런 상상들은 절대로 현실로 펼쳐지지 않거든. 그러니 괴리가 생기게 될 수밖에 없는 거지. 심하면 나중에 실제의 성생활에 적응을 못 할 수도 있어.

  pp. 153 - 154.

  뭐든지 하고 싶었던 그때에 해야 되는 거야. 시간이 지나면 왜 하고 싶었는지 잊어버리게 되거든. 나한테 미대는 그래. 이제 와서 가면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처럼 강렬하게 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 말이지. 뭔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왜 하고 싶었는지에 대해서조차 잊어버리게 되거든. 자꾸 그러다보면 결국에는 하고 싶은 것이 없어져버려. 우물이라는 것은 퍼내면 퍼낼수록 새로운 물이 나오지만 퍼내지 않다보면 결국 물이 마르게 되잖니. 그런 것처럼 욕구라는 것도 채워주면 채워줄수록 새로운 욕구가 샘솟지만 포기하다 보면 나중에는 어떤 욕구도 생기지 않게 되어버리는 거야. 그러니 너도 쉽지야 않겠지만 하고 싶은 것을 자꾸 만들어서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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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만에 할 말이 생긴 소설이라 서평을 쓰려고 대략 3주 전부터 벼르고 있었는데,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인지 아직 시작도 못 하고 있다. 그래서 일단 이것부터 배출. 뭐 언젠가는 서평도 쓰겠지.
  지인 중 한명이 박현욱의 데뷔작을 혹평한 터라 꽤나 큰 기대를 하고 봤는데 - 이럴때는 기대라는 말을 쓰면 안 되나? - 뭐 나쁘지 않았다. 다만 아저씨가 한참 어린 아이의 시각으로 쓴 것이 조금 느끼하달까. 상당히 청소년 소설스러웠다. 확실히 <아내가 결혼했다>에 비하면 문학성도 떨어지고. 그래도 진부한 주제를 깔끔하게 풀어낸 것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