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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 Zenol

대리운전을 아십니까

zeno 2008. 1. 4. 01:02
  오랫만에 밤 늦게 집에 들어오는 길이었습니다. 선릉역에서 버스를 내렸죠. 많은 남성들이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각자의 손엔 휴대폰으로 보이는 기기들을 들고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대리운전 기사들이었습니다. 물론 아시겠지만 노파심에 설명 드리자면 대리운전 기사들은 그렇게 휴대폰 혹은 PDA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주문을 따기 위해 스틱 등을 들고 열심히 화면이나 버튼을 눌러댑니다. 귀에는 기기와 연결된 이어폰을 꽂고 오퍼레이터가 전해주는 주문을 듣고요. 그렇게 열심히 누르다가 운 좋게 걸리면 주문이 들어온 장소로 가죠. 보통 가까운 사람에게 걸리기 때문에 뛰거나 버스를 탑니다. 택시를 탔다가는 나가는 돈이 많으니까 잘 안 타죠.
  그렇게 도착한 주문지에서는 주문자를 보통 '사장님'이라 부르면 그에게 키를 받아 그를 집에까지 모셔 갑니다. 그 차 안에서 있을 수 있는 일들은 보통 택시들에서도 많이 일어나니 생략하도록 하지요. 아, 그런데 이런 일도 있습니다. 상황을 재연해보지요. 주문자 앞에 대리운전 기사 두 명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문자는 가장 싸고 빠르게 가려고 여러 곳의 대리운전 기사를 부른 것이지요. 아, 그 새 한 명이 더 도착했군요.

  - 이봐, 당신은 얼마고 당신은 얼마야?
  - 20,000원입니다.
  - 저도 그렇습니다.
  - 전 15,000원입니다.
  - 오, 당신이 가장 싸네. 그래, 마음에 든다. 자, 키 받아.
  - 네, 사장님.

  네, 이런 일도 비일비재 하다고 하네요.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한 풍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저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용을 가져다 주는 것이 주류경제학의 제일원칙이니까요. 자, 그럼 여기서 다른 대리운전 기사 두 명은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긴요. 근처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 역, 혹은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오락실에서 오락 하듯이 자신의 수신기를 열심히 연타할 수 밖에요.
  자, 그럼 이번에는 그들이 기다리는 곳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어요. 재빠른 사람들은 보통 24시 은행 ATM 기기가 있는 부스 안에 들어가 있고, 다른 사람들은 밖에서 기다리는 수 밖에 없지요. 특히 겨울에는 눈이 내려도, 아무리 추워도 그렇게 밤새 밖에서 기다려야 한답니다. 그들은 대리운전 기사들이니까요.
  그들의 얼굴을 보면 우리 아버지 또래로 보입니다. 물론 형 뻘부터 할아버지 뻘까지 계시지만, 대체로 아버지 뻘인 분들이 많죠. 그들은 애초부터 대리운전 기사였을까요? 아니죠. 대리운전이 이렇게 보편화 된 것은 몇 년 안 됩니다. 대리운전은 지난 몇 년 동안 말 그대로 급성장 해왔죠.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면, 대체로 평범한 샐러리맨이나 자영업자였던 이들이 많은듯 합니다. 검사, 의사 같은 전문직이었다면 은퇴라는 것이 따로 없었을테니까요. IMF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거리로 내몰린 많은 샐러리맨들 - 이 중엔 고소득 직종이었던 은행원들도 있죠. - 과 계속된 경기 악화로 자영업을 접거나 부인에게 맡기고 자신의 호칭이었던 '사장님'을 이제는 역으로 매일밤 불러바쳐야 하는 전직 자영업자들이 대리운전을 하는 거죠. 물론 그들보다도 사는 게 어려웠던 이들도 많습니다. 어쨌든 이 다양한 전직 출신의 성인 남성들이 하룻밤 5만원을 벌기 위해 매일 밤 추위 혹은 지루함에 떨며 밤을 지새우는 거죠. 종종 모욕도 참아가면서.
  우리 아버지 세대로 구성된 이들은 익히 알려져있다시피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핵심적인 기여를 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사회는 냉정했죠. 경제 일선에서 한번 밀려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 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자본은 물론이고, 심지어 정부까지도요. 그래서 이들은 제2의 인생을 '이모작'하기 위해 대리운전이라는 새로운 직종에 뛰어 들었습니다. 전단지를 돌리다가 다른 업체의 운전자와 싸우기도 하고 내가 2만원짜리 인생인가 하는 회의감도 들지만, 어쩌겠습니까. 먹고는 살아야지요.
  으레 요즘 모든 직업인들이 그렇듯이 이들에게도 당연히 직업병이 뒤따를 것 같습니다. 문자를 보내는 것도 아니지만 밤새 주문을 따내기 위해 수신기를 눌러야 하다보니 자연히 '엄지족'이 되어 손목 인대도 좀 당기고 손가락도 짓무르고, 매일 밤새 흑백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느라 눈도 침침할테고, 추운데 밤새 구부정하게 앉아있다보니 목과 어깨도 늘 결리고 심지어 등도 배기고, 몇 시간이고 앉아서 추운데 있다보니 아침에 집에 들어와 눕기만 하면 온 몸이 흐물거리겠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아파도 해야지요.
  사실 대학생 또래들은 대리운전을 이용할 일들이 거의 없으니까 - 설마 저만 없는 겁니까? - 이런 일들에 대해 모를지도, 혹은 알면서 넘어갈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전 지금은 종종 대리운전을 이용하시지만 퇴직 후에는 당신이 저 일에 뛰어들어야 할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늘 가슴 한켠이 불편하네요. 그렇다고 뭐 대리운전업을 다 없애자는 건 아닙니다. 당장 그러면 수만명 혹은 수십만명의 밥줄이 끊기는 걸요. 그냥, 그렇다고요. 대리운전을 아시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