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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 Zenol

강마에여, 내 말을 들어라

zeno 2008. 11. 2. 01:57
  너는 말했다. 네게 기댈 곳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홀로여야만 한다고. 그래야만 치열해 질 수 있고, 네가 살 수 있다고.
  그래, 맞는 말이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해야 한다. 오기와 독기로 무장해 남에게 수 없이 많은 상처를 주더라도 네 자신을 지켜야 한다. 아무도 널 지켜줄 수 없다. 잠깐 동안이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누구도 결코 영원은 장담할 수 없다. 가족, 형제, 자매, 애인, 그 누구도 이제는 너의 항구적인 지지자일 수 없다. 세상이 변했다.
  한 때 현실을 도피했었다. 사랑과 우정, 낭만과 연대를 믿었다. 내가 손을 내밀면 네가 잡아줄 줄 알았고, 내가 네게 애정을 보이면 네가 환대로 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세상엔 이미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수 없이 많은 저주와 비난을 서로에게 퍼부을 뿐이고, 웃는 겉면 속에는 상대를 향한 끊임없는 의심이 자리잡고 있다. 
  너 역시 그러했다. 성선설을 믿는다며 사람을 우정과 애정을 갖고 대했고, 상대의 호의에는 호의로 답하곤 했었다. 그리고 상대에게 기댔다. 상대가 네게 보이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네 나름대로 선의를 보였었고, 외로운 둘이 만나 그럭저럭 잘 지내곤 하였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며 관계는 깊어졌다. 하지만 사람 간의 마음이 어찌 한 쪽의 의지대로만 규정되겠는가. 상대는 맹렬히 네게 다가왔지만, 넌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밀어낼 수 밖에 없었다. 한 명이 한 명에게 종속되어 지내는 관계. 그것이 둘 간의 본질이고 사실이었다.
  결국 넌 두루미를 버렸다. 네가 살기 위해서. 그리고 넌 홀로서기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래, 홀로 서거라. 대신, 위악을 떨어라. 네가 악하다는 것이 아니다. 악한 척 하라는 거다. 살아남기 위해서, 표독스러워지거라. 네가 상대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항구적인 약속을 믿지 않고, 불변하는 것만을 믿을 때, 넌 살아남을 수 있다. 예전처럼 위선적으로 군다면, 넌 결코 홀로서기를 할 수 없다. 그리고 상대도 역시 홀로서기를 할 수 없다. 네가 상대에게 착한 척 하며 쿨 하게 멀어지려고 할 수록 상대는 네게 집착하게 되고 스스로를 파멸시키게 된다. 차라리 위악을 떨어라. 네가 나쁜 사람이 될 수록, 대놓고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록 너와 상대의 홀로서기는 쉬워진다.
  하지만 이건 동전의 앞면에 불과하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흔치 않기는 하지만, 정반대도 가능하다. 네가 착한 척을 벗어던진다면, 아름답지만 찌질하고 착하지만 이기적인 스스로를 긍정한다면, 애정과 환대가 가능하다. 항구적 관계에 대한 믿음은 포기해라. 많은 것들이 변한다. 사람 마음도 쉽게 변한다. 하지만 그 찰나를 포착하는 것은 가능하다. 카르페 디엠. 현재에 살아라. 행복을 추구하라. 지금 네 눈 앞에 있는 상대에게 최선을 다 하고, 상대의 호의를 기꺼이 받는 것은 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네가 상대에게 주는 상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순간의 연장가능성은 높아진다. 상대를 믿어라. 네가 그동안 믿어왔던 세계는 무너질지 몰라도,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세상은 이분법적으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정-반-합의 변증법적 구성도 가능하다. 네가 새로운 가능성을 인식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순간 넌 신화가 된다.
  더 이상 홀로 서지 않아도 된다. 아니, 홀로 서지만 홀로 선 그 개인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친구도, 연인도, 가족도. 완벽한 홀로서기의 환상을 벗어 던지고 상대를 믿고 상대에게 네 마음을 열어 조금 더 솔직해진다면, 새로운 삶의 방식의 가능성은 존재한다. 눈을 떠라. 네 바로 앞에 그런 사람이 있다. 네가 언제든 마음을 연다면 두 손을 꼬옥 잡아 줄, 활짝 웃으며 따스히 안아 줄 그런 사람이. 그 사람이 결코 천사는 아닐지라도, 네게 애정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넌 결코 혼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