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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촛불과 지식인들 1 - 지성, 작동을 멈추다 / 김규항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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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촛불과 지식인들 1 - 지성, 작동을 멈추다 / 김규항

zeno 2008. 10. 23. 00:04

촛불은 아름다웠다. 어른들이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뇌까리며 느물거릴 때 촛불을 들기 시작한 여중생들도,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사람들이 이룬 거대한 대열도, 그들이 보인 유쾌한 직접 민주주의의 풍경도. 제정신을 가진 누구도 그 아름다움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왜 이렇게 달라진 게 없을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외치고 행동했는데 이렇게 달라진 게 없을 수 있을까? 딱히 달라진 건 없더라도 사회진보의 열기가 살아나는 계기라도 되었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다들 맥이 빠져버린 모습이니 대체 어찌된 일일까?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렇지만 다들 너무 이기적인 것 같다. 촛불 시위 피켓엔 “이명박 너나 미친 소 쳐먹어” ''내 인생 좀 펼쳐보려고 하니 광우병 걸렸네“ 등 내가 죽고, 내 이웃이 죽고 우리 국민이 죽는 문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금 더 나아간다 해도 친미 정부, 자국민을 생각하지 않는 정부를 탓하는 지점에서 끊긴다. 대한민국 안에만 들어오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들이다. 그러나 지구 위 어딘가에서 미친 소와 병든 닭, 그리고 오리는 여전히 아프다. 이런 병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누가 어떻게 끊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집회현장에는 거의 없었다. 좁은 우리에 꽉꽉 채워 넣어 면역력을 떨어트리고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충분히 먹을 만큼 많은 곡식을 소에게 먹여 소수가 먹을 고기를 만들고, 그도 모자라 소가 소를 먹어 병들게 만든 것.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데 말이다.”(인디고잉 12호)

촛불의 열기가 한창이던 즈음 나온 글이다. 글을 쓴 사람은 저명한 생태주의자도 논객도 아닌, 부산에 사는 한 고등학생이다. 우리는 이 ‘아이’의 견해를 통해 '광우병 소 반대' 구호는 '우리 동네에 쓰레기 소각장 반대' 구호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게 된다. 쓰레기가 처리되는 방식을 되돌아보며 생태주의적 대안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사는 동네에선 쓰레기를 처리할 수 없다는 이야기와, 광우병 소라는 현상을 통해 자본주의적 축산 산업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자는 게 아니라 나와 내 새끼는 광우병 소를 먹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말이다. 한국의 지식인들 가운데 이 ‘아이’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상적인 사회란 아이들이 지식인에게서 배우는 사회지 지식인이 아이들에게서 배우는 사회가 아니다.

물론 지식인들은 말한다. “촛불은 광우병 소라는 일개 사인이 아니라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만들어낸 이명박 정권을 공격하는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맞는 말이다. 촛불은 그랬다. 그런데 과연 이 고통스러운 현실은 모두 이명박이 만들어낸 것인가? 노동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불안정 노동층으로 전락하고 농민들은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뿌리 뽑히며 청년들은 실업자로 사회에 진출하며, 불안감에 젖은 부모들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아이들을 ‘경쟁의 지옥’으로 내모는 이 현실은 말이다. 나 역시도 ‘이 모든 게 쥐박이 때문’이라고 말하면 마음만은 개운하겠지만, 사실은 아니다. 이명박은 나쁜 대통령이지만, 불과 몇 달 동안 이 모든 걸 뚝딱 만들어낼 만큼 전능한 대통령은 아니다.

촛불을 음해하는 놈들은 말한다. “미국산 소고기 문제는 이미 노무현 정권 시절 다 진행이 된 것이고 이명박 대통령은 사인만 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더러운 의도와는 별개로 그 말은 사실이다. 오늘 우리의 삶을 옥죄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은 이명박이 뚝딱 만들어낸 게 아니라 꽤 긴 시간 동안 진행되어 온 어떤 거대한 흐름의 결과다. 올해 초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아니 미국 경제가 고작 하층계급의 부실 대출 문제로 흔들린단 말인가? 그러나 그 문제는 미국을 넘어 전세계로 파급되자, 사람들은 세계의 경제가 하나로 구조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구조가 근본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30여년 전, 레이건과 대처에 의해 시작되어 자라온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괴물이 말이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은 단지 이명박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 괴물의 아가리에 들어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 괴물의 아가리에 한국 사회를 집어넣은 건 ‘쥐박이’가 아니다. 한국이 군사 파시즘에서 빠져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탑승하면서 시작된 일이며, 본격적으로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진행된 일이다. 이명박에겐 책임이 없고 김대중 노무현 책임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그리고 이명박으로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이야기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정권이고 이명박 정권은 수구기득권 세력의 정권인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게 문제다.

우리가 사회문제를 이야기할 때 늘 미궁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정권’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마치 고대 사회에서 정치란 단지 ‘왕이 누구인가’의 문제였던 것처럼 우리는 ‘정권’과 ‘대통령’에 집착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자는 ‘정권’이 아니라 ‘정권을 포함하는 훨씬 더 넓고 복잡한 체제‘다.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분명히 ’다른‘ 정권이지만 ’같은‘ 지배 체제의 일원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지배체제의 그런 ‘신묘한’ 정체는 지난 10여 년 동안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서 입버릇처럼 뇌까려진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다.

사실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말은 개념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진보 세력이란 좌파를 일컫고 개혁세력이란 자유주의 우파 세력을 일컬으니,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말은 결국 ‘좌파우파’ 세력이라는 말인 것이다. 그런 ‘말이 안 되는 말’이 그토록 진지하게 사용되는 연원은 과거 군사 파시즘 체험에 닿아 있다. 군사 파시즘 시절 한국 사회문제의 본질은 물론 군사 파시즘 세력이었다. 그 시절 한국 사회는 군사파시즘 세력과 민주화 운동 세력이 대립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문제는, 군사 파시즘이 물러나고 절차적 민주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후에도, 말하자면 한국사회의 문제의 본질이 군사 파시즘이 아니게 된 다음에도 여전히 그 구도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민주화를 통해 국가 권력이 자본(재벌!)을 거느리던 체제에서 자본이 국가 권력을 거느리는 체제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사회 문제의 본질은 파시즘이 아니라 ‘자본화’가 된 것이다. 자본화의 시절을 맞아 옛 군사파시즘 세력은 대중들, 특히 젊은 세대의 지지를 잃고 급기야 10년 동안 정권을 잃기도 하지만, 탐욕의 결정체들답게 자본화의 흐름 자체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적응해나갔다. 그들은 처음엔 인민을 대놓고 누르고 밟을 수 없는 세상이 난감했지만 이내 더 자유롭고 효율적인 부의 축적이 가능한 세상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옛 민주화운동 세력은 두 가지 세력으로 분화했다. 하나는 자본화의 흐름을 수용하는 개혁세력이다. 다른 하나는 자본화의 흐름을 거부하는 좌파 세력이다.

한국사회는 당연히 자본화,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수용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져야 했다. 군사파시즘 출신 세력과 민주화운동 출신의 개혁세력이 구우파와 신우파로서 우파 진영을 이루어, 좌파와 맞서는 구도로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사 파시즘 시절의 구도가 그대로 이어졌다. 구우파가 우파를 맡고 신우파와 좌파가 이른바 ‘진보개혁세력’이라는 이름으로 좌파를 맡는 해괴한 구도를 이룬 것이다. 게다가 대형 시민운동단체를 비롯한 이런저런 개혁운동이 대중들의 각광을 받으면서, 좌파세력은 ‘철지난 몽상에 빠진 비현실적인 사람들’로 치부되어 버렸다. 말이 ‘진보개혁’ 세력이지 그 주도권은 거의 전적으로 개혁세력이 쥐게 된 것이다. 결국 한국사회는 자본화의 시절을 맞아 정작 자본화를 반대하는 세력은 배제된 채 자본화를 찬성하는 두 세력이 각각 우파와 좌파를 자임하며 싸우는 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게 김대중 정권 이후 10년 동안의 상황이다. 구우파와 신우파 세력은 옛 군사 파시즘 시절에 쌓인 감정과 정치적 민주화에 대한 입장 차이로 서로 ‘수구기득권 세력’이니 ‘좌파 빨갱이들’이니 욕하며 원수처럼 으르렁거렸지만 신자유주의 자본화는 아무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자본화는 개혁세력, 즉 신우파가 집권한 10년 동안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신우파는 한국의 거의 모든 양식 있는 사람들을 예의 ‘진보개혁세력’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구우파(수구기득권 세력이라 일컬어지는)와의 싸움에 전념하게 해놓고는, 차곡차곡 신자유주의 자본화를 진행한 것이다.

인민들은 당연히 고단해져갔다. 인민들로선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세상은 좋아지고 있는데, 민주화가 되고 민주화운동 출신 인사가 대통령이 되고 조선일보 따위 ‘수구꼴통들’이 젊은 세대에게서 외면 받는 형국까지 보이는데, 갈수록 삶은 고단해져만 가니 말이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까지 내몰리자 인민들은 이게 다 ‘좌파정권 탓’이라고 믿게 되었다. 결국 이명박 씨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며 구우파 세력은 10년 만에 신우파 세력을 누르고 다시 집권한다.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버렸다. 구우파가 집권하든 신우파가 집권하든 자본화가 지속되는 건 본질적으로 달라질 게 없지만,  구우파가 다시 전면에 부각되면서 자본화라는 지배체제의 본질은 훨씬 더 쉽게 은폐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촛불 광장에서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이명박이 한국사회를 20년 전으로 되돌리고 있다”고 소리쳤다. 물론 구우파들은 신우파에 비해 훨씬 더 거칠고 추악한 외양을 갖고 있다.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에서 금방 도착한 듯한 꼴통들도 적잖이 있고 그들에 의해 시대를 거꾸로 흐르는 엉뚱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꼴통들의 행태야말로 지배체제가 우리에게 던진 미끼다. 20년 전으로 되돌리고 있다면, 그렇다면 10년 전 5년 전은 괜찮았단 말인가? 이명박 정권은 부자 편만 드는 몹쓸 시장주의 정권이지만 노무현이나 김대중 정권은 노동자와 서민의 정권이었다는 말인가? “이명박이 한국 사회를 20년 전으로 되돌리려 한다”는 말은 하나의 선동적인 수사로서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여 흥분하는 건 우리 스스로 20년으로 돌아가 주겠다는 말이며, 20년 동안 한층 세련되어지고 치밀해진 지배체제에 고스란히 먹히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혁이 사회진보로 가는 현실적인 과정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오늘 이 현실을 낳았다는 사실을 ‘이제라도’ 인정하고 정신을 추슬러야 한다. 정치적 민주화를 근본적으로 되돌리기는 게 불가능해진 이후, 지배체제의 목표는 한국사회를 군사파시즘 시절로 되돌리는 게 아니라, 끝없는 자본화를 진행하여 무한정 부를 축적하는 데 있다. 현재 지배체제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오늘 한국 사회 문제의 본질이 자본화라는 사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은폐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지배체제 입장에서 이명박 정권은 대개의 진보 지식인들의 말하듯 ‘무능하고 쓸모없는 정권’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 한국 사회에서 존재하는 모든 정의감과 사회의식과 사회진보의 열기를 모조리 흡수해주는 매우 ‘유능하고 기특한’ 정권이다.

촛불 광장 그 몇 달 동안 ‘모든 게 이명박 때문’이라는 논리에서라도 벗어난 예는 단 한번, 불교 집회 때 수경 스님이 낭독한 108배 참회문뿐이었다. 기막힌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촛불 광장에 아이 손을 잡고 나온 모든 사람들을 지배체제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쥐박이’ 욕만 했다고 비난할 순 없다. 사회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지식인들도 지난 10년 동안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말이나 뇌까리며, 개혁을 사회진보로 가는 현실적인 과정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구우파와 싸우는 일을 사회진보의 충분한 실천이라고 생각한 판에, 사회 공부는커녕 먹고사는 일에 치어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보다 나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모든 분노를 ‘쥐박이’에게 집중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특히 진보 혹은 좌파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경우가 다르다. 그들은 그 소중한 분노가 이명박이라는 인물에만 집중되어 소모되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야 했다. 물론 그런 행동은 분노의 열기에 젖은 사람들에게서 오해를 받거나 전선을 흐트러트리는 짓으로 비난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이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오해와 불편을 무릅쓰고’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슬프게도, 촛불의 열기 속에서 지성이란 그저 거대한 분노의 대열에 편승해 깃발을 꼽아대는 것을 뜻했다. 생각이 모자라서 그렇게 한 것이든, 누구 말마따나 포퓰리즘을 통해 제 세속적 이해를 도모한 것이든, 분명한 건 그 열기 속에서 지성은 작동을 멈추었다는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