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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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내일] 우리는 왜 ‘지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일까. / 한윤형

zeno 2008. 11. 7. 11:53

2005년 당시 기륭전자 생산라인의 파견노동자들은 최저임금보다 10원 더 받으면서 일하고 있었다. 툭하면 해고당했고, 해고방식은 무려 ‘핸드폰 문자메시지’였다. 딸아이가 교통사고당했는데 해고당하는게 두려워 잔업까지 마치고 병원에 가야 했고, 몸이 아파 견디지 못해 쓰러져 앰뷸런스에 실려 갔는데도 해고당했다. 견디다 못한 그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노동부는 “파견근로자 보호에 관한 법률”을 사측이 위반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500만원 벌금을 매겼다. 기륭전자는 성실히 벌금을 납부하여 법적인 의무를 다한 뒤, 노조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해고시켜버렸다. 1,200일이 다 되어가는, 비정규직 운동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기륭사태의 전모다.
 

법에 호소했지만 법원은 7번이나 그들이 당한 해고가 ‘부당해고’가 아니라고 판정했다. 국회의원들에게 호소하여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과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의 중재로 사측과 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결렬됐다. 제 몸을 해하는 단식에 들어가 분회장은 94일이나 단식을 해서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단식의 와중에 기륭의 투쟁에 함께 하려는 네티즌들의 움직임이 생겨났고, ‘릴레이 동조 단식’이 성행했다. 시위현장에 용역들이, 전경들이 들어와 분회원들을 끌어내는 와중에 함께 하다가 다친 이들도 많았다.
 

현장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분회원들의 처지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이 싸움 자체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냈다. 입법부의 중재도, 사법부의 판결도 도움이 되지 못했고 정부는 국정원을 통해 외려 사측에 노동자들의 입장을 수용하지 말라는 압박을 넣었다고 한다. 한국경영자총연합회(경총)도 비슷한 방식의 압력을 넣고 있는 걸로 안다. 밥을 굶어도, 철탑으로 올라가도, 기륭이 물건을 납품하는 미국의 시리우스사 앞에서 삼보일배를 해도,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람 하나쯤 죽어도 눈하나 까딱하지 않을 이들을 ‘적’으로 둔 이상, 이기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무조건 패배할 거라고 예측하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싸움에 동참해야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언제까지 싸울 것인지, 얼마만큼 얻어내려고 목표해야 하는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어느 정도인지를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질 확률이 높은 싸움은 그런 식으로 ‘전략’을 짜서 참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언제까지 싸울 것인지는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는 분회원이 결정할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는지는 해보기 전에는 모른다. 아마 우리는 패배하고 패배하고 또 패배할 것이다. 그래서 다시금 우리는 왜 지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일까, 라고 묻게 된다.
 

정답은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싸움은 패배할지라도 다른 싸움을 위한 발판이 된다. 누군가가 지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영원히 이길 수 없다. 이런 서술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다른 방식으로 말해보자. 대공황 이전 미국경제가 지금의 한국경제와 비슷한 룰로 돌아가던 시절, 대안적인 체제를 제시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다른 말을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대공황이 터지고 뉴딜 정책이 시작되자, 법원은 하루에 십여개의 법률을 통과시켰다. 지금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제안들이 위기상황에 몰리자 한꺼번에 통과된 것이다. 만일 이때에 여러 사람들의 ‘지는 싸움’으로 축적된 다른 종류의 대안들이 축적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국사회는 훨씬 더 큰 비용을 치르면서 그 위기를 극복했어야 할 것이다. 한 세대의 소년들에게 유행한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이란 소설은, 민주정치의 지지자들이 전제왕조와의 우주적 패권 투쟁에서 패배한 후 아주 미미한 승리를 거두어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는 자치령을 할당받으면서 매듭된다. 그들의 지도자는 훗날 전제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날이 왔을 때 인류가 다른 대안을 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우리는 민주주의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의도할 수 있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 눈앞의 승리가 아니라 그런 종류의 ‘자치령’이다. 그렇게 해서 지는 싸움은, 지는 싸움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