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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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 Zenol

퀴즈쇼

zeno 2008. 6. 21. 11:57
  p. 36.
 
  그녀 덕분에 나는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지적인 교감을 나누는 것이 생각보다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몽주의시대 파리의 살롱이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 적절한 지능과 타인에 대한 배려, 유머감각을 겸비한 누군가만 있다면 삭막한 채팅방도 파리의 살롱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p. 54.

  "기회는 신선한 음식 같은 거야. 냉장고에 넣어두면 맛이 떨어져. 젊은이에게 제일 나쁜 건 아예 판단을 내리지 않는 거야. 차라리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게 더 나아. 잘못된 판단을 내릴까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 이게 제일 나빠."

  p. 78.

  "내가 오빠를 잘못 생각했었나봐. 오빠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 뭐랄까, 뼛속 깊이 게으름이 배어 있다고나 할까. 오빠는 이러니저러니 멋진 말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실은 그냥 놀고 싶은 거야. 세상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서 유유자적하며 살려는 거지. 안 그래?"

  p. 193.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야. 안 그래?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고 토익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영화 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맞아, 너도 피아노 치지 않아? 독서량도 우리 윗세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아. 우리 부모 세대는 그중에서 단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평생을 먹고살 수 있었어.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잘못한 게 없지."
  나도 맞장구를 쳤다. 사실 어른들은 우리 세대가 책도 안 읽고 무능하며 컴퓨터 게임만 한다는 식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그건 완전 착각이다. 정작 책도 안 읽고 무능하고 외국어도 못하면서 이렇다 할 취미도 없는 사람들은 그날 면접장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던 면접관들이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80년대에 태어나 컬러TV와 프로야구를 벗삼아 자랐고 풍요의 90년대에 학교를 다녔다. 대학생 때는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2002년 월드컵에 우리나라가 4강까지 올라가는 걸 목격했다. 우리는 외국인에게 주눅들어보지 않은, 다른 나라 광고판에서 우리나라 배우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첫 세대다. 역사상 그 어느 세대보다도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문화적으로 세련되었고 타고난 코스모폴리탄으로 자라났다.도스가 윈도가 되고 보석글이 아래한글이 되고 유닉스 기반의 PC통신이 인터넷으로 발전해가는 것을 몸으로 겪었고 그 모든 운영체제 프로그램을 대부분 능숙하게 다룰 수가 있다. 예전이라면 전문 사진사나 찍을 법한 사진도 우리는 몇십만원짜리 카메라로 척척 찍고 과거엔 방송국에서나 하던 동영상의 촬영과 편집도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 윗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에서 자라났고 이전 세대에 비하자면 거의 슈퍼맨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랐고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직업이 없다. 이게 말이 돼?
  이런 내 말에 동의하면서 한결이도 게거품을 물었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했는데, 부모나 선생이 하라는 거는 얌전히 다 했는데, 왜 이러게 된 거야? 세상은 죽이는 스터프들,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가득 차 있는데 왜 우리 주머니에는 그걸 살 돈이 없는 거야? 일 인당 국민소득 이만 달러라더니, 다 어디로 간 거야? 우리가 왜 이렇게 사는지 알아? 내 생각엔 우리가 너무 얌전해서 그래. 노땅들이 무서워하질 않잖아. 생각해봐. 386들은 손에 화염병을 들고 있었다구. 겁 많은 노땅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어. 우리를 무서워해야 일자리도 주고 월급도 올려주고 그러는 건데, 이놈의 대기업들은 채용은 안 하고 대학에 건물만 지어주고 앉아 있잖아. 누가 건물 필요하대?"

  p. 359.
  아침 명상시간에 오랜만에 만난 장군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장군이 흥미로워하며 앞으로는 꿈을 노트에 적어보라고 했다.
  "왜요?"
  "자꾸 적다봄녀 꿈을 더 많이 꾸게 돼. 꿈을 꾼다는 건 자는 동안에도 뇌가 활동한다는 건데, 그때느 생시와는 전혀 다른 부분을 사용하거든. 그래서 자꾸 활성화를 시켜주는 게 좋아. 일종의 뇌운동이랄까. 그러지 않아도 권하려고 했는데 잘됐네. '회사'에선 꿈을 적는 사람들이 많아. 손으로 적기가 귀찮으면 녹음기를 머리맡에 두고 자는 것도 방법이지. 두서없으면 없는 대로 그대로 적는 게 좋아."
  그날부터 나는 꿈을 적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꿈을 적고 명상시간에 집요하게 그 이미지를 떠올려보았다. 그러고 나면 머릿속을 물로 씻어낸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전에 배웠던 혹은 읽었던 어떤 것들이 난데없이 떠오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