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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오빠가 돌아왔다 <★★★☆> 본문

평 / Review

[소설] 오빠가 돌아왔다 <★★★☆>

zeno 2009. 2. 21. 14:03
오빠가 돌아왔다 - 6점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창비(창작과비평사)


  p. 183.

  여자는 요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관습적으로 우울하고, 물론 살기도 혼자 살고, 친구도 없다. 나중에 죄도 없이 할복을 당한 인형이 그녀의 유일한 친구다.

  p. 227.

  재만은 입맛을 잃었다. 역겨웠다. 그는 찬찬히 면면들을 둘러보았다. 저 철면피들. 수천 명의 재산을 간단하게 꿀꺽하고도 아침이면 호텔 식당의 메로구이를 집요하게 발라먹는 저 놀라운 식욕, 추악한 욕망. 문제는 재만도 그들과 전적으로 같은 종자라는 데 있었다. 그제야 재만은 동업자들에게 철저히 냉소적인 조지 쏘로스의 심정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희대의 국제투기꾼을 생각하다보니 재만의 결론은 다소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그러니까, 네놈들 돈까지 다 긁어모아 쏘로스 같은 최강자가 되는 수밖에는 없다. 정의는 승자의 것이니까. 그 다음에 기부도 하고 자선사업도 벌이고 미술관도 세우자. 헤지펀드나 투기자본에 기생하는 너희 같은 한탕주의자들은 상상도 못할 꿈이지. 체 게바라가 뭐라던?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고 안하던? ' 
 
  pp. 244 - 245.

  열정과 냉소의 문제를 가치의 대체(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규정한다는 것은 이 문제를 자본주의 사회의 콘텍스트 속에서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맑스주의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가치는 화폐로 전환가능한 대상, 즉 교환가능한 대상이 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한 가치가 설 자리를 점점 더 줄여놓는다. 교회가 신도들이 바치는 헌금 액수에 의해 값이 매겨져 매매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다. 냉소주의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현실을 배경으로 성립한다. 냉소주의는 신념과 믿음, 사랑을 비롯한 모든 인간적 가치의 매수가능성을 가정한다. 반면 열정은 자본주의적 현실에 역행하는 경향을 띤다. 다시 말해 열정이란 자본주의에도 불구하고 대체불가능한 가치를 신봉하거나 가치파괴적인 자본주의의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평범한 인간의 일상적 의식은 열정과 냉소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현실을 인정하고 이에 순응하면서도, 막연하게나마 화폐로 환원되지 않는 소중한 가치가 있을 거라고 믿으며, 그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냉소적 인간은 사람들의 소박한 믿음이나 희망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지만, 그런 사람도 가치와 의미를 향한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면역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가치가 교환가능하고 매수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 사물분만 아니라 인간 자신도 이 사회 속에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단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 속에 함축된 깊은 허무를 견디어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냉소주의는 인간중심적 사고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인간중심적 사고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모든 개인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믿음이다. 냉소주의는 이러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을 마치 상품처럼 등급화, 유형화아여 거래의 대상으로 만드는 결혼 정보회사들의 번성은 이러한 냉소주의적 시각을 뒷받침해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간 자신을 멸시하는 냉소주의적 시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냉소주의의 확산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가치를 향한 더 큰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열정과 냉소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맞물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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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읽었던 몇 권 안 되는 김영하의 소설 중에서 가장 좋다. 사실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은 대부분 진부하거나 재미에 비해 길었는데,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제외하고) 단편집에서 그의 재능이 조금 빛난 것 같다. 가장 재밌었던 것은 표제작인 <오빠가 돌아왔다>. 한국 문단에서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고, 또 이를 바탕으로 세계에 진출하고 있는 젊은 작가인만큼 앞으로도 기대된다. 뭐, 그렇다고 '하악하악' 이 정도는 아니고.
 
  사실 이 책에 실린 평론이 감명깊었다. 지금까지 인상 깊었던 평론은 별로 없는데, - 너무 고담준론이거나 내용 해설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 - 이번만큼 평론가의 시각이 눈에 뜨이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진 적이 없는 것 같다. 참고로 평론가는 김태환이라는 이다. "냉소적 존재"와 "열정적 의식"이라는 열쇳말은 '한국인'이라 불리는 일련의 집단을 이해하는 데에 상당히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단편 소설집이라 자세하게 쓰다가는 스포일링의 위험이 있고, 소설의 감상은 개개인마다 다른 것이기에 열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