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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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 Zenol

장기 2008년

zeno 2009. 1. 10. 12:26

  나의 장기 2008년이 끝났다. '장기'라는 개념은 말 그대로 long period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대표적인 사례로는 1789년부터 1914년까지를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이 '장기 19세기'라고 일컬은 것을 들 수 있겠다. 같은 맥락에서, 내게 2008년은 단순히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가 아니라, 2009년 1월 10일을 경계로 종료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이후로 사용하는 시간대가 다르고, 공간적 맥락이 전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생활 공간이 바뀐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리고 딱히 '새로운 각오' 같은 것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나라는 인간의 삶의 궤적이 이어지되, 조금 다르게 이어지는 것일 뿐이다. 이 같은 연속적 인식은 사실 내가 원하는 변화를 그다지 가져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설프게 단절적으로 인식하다가 스스로 생각하는 바가 망가지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지난 한달 동안 가기 싫다고 징징댔다. 가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 미련이 남는 것이 너무도 많았던 탓이다. 혹은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린 '어리광' 탓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준비가 안 되어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리적으로도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념적으로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다시 말해, '목표 의식'이 뚜렷하지 않다.
  프로그램에 지원할 때부터 그랬다. 호기심과 어릴 때의 열망, 한국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질렀다. 공부를 하겠다고 생각을 한 것도 아닌데 - 한국에서도 경제학 공부를 안 하는데 이역만리까지 가서 하겠는가! (신분이 그냥 'Visiting Student'도 아니고 'Visiting Student of Economics Department'라 공식적으로는 경제학과 수업 밖에 못 듣는다. 다른 수업들은 청강하는 수밖에.) - 그저 벗어나고 싶다는 치기에 지르고 났고, 아예 가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니 물리기도 뭐하고. 그러다보니 이렇게 됐다.
  사실 지금은 조금 무덤덤하다. 늘 불평하며 살지만, 생각보다 위기에 처하면 능숙하게 대처하는데 익숙해진 터라 - 하지만 그 놈의 위기가 너무 많이 찾아온다. 이것 역시 지나친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난 참 재수가 없다. - 뭐 별 일 있겠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시간동안 혼자 자율적으로 삶을 설계해나가는 것을 강력하게 원해왔던 만큼, - 사실 별 거 없다. 그냥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자고, 공부하고 싶을 때 공부하는 삶을 원할 뿐이다. - 그런 기회가 왔으니 즐겁게 받아들일 법도 하다.
  자유로워지고 싶다.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스스로 억눌렸다고 생각하는 만큼, 자유롭게 살고 싶다. 지금까지 관념적으로만 사고해왔던 것이 몸에 밸 수도 있고, 새로운 체험을 할 수도 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지금보다 더 적응하기 힘들어질지도 모르겠지만, 국제주의자internationalist 혹은 세계시민주의자cosmopolitanist를 자처하는 만큼 그것에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까 싶다.
  행복해질 것이다. 혼자 잘 지낼 것이다. 변화할 것이다. 공부도 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글을 쓸 것이다. 생활의 최소주의minimalism를 지향해서 그 역량을 다른 데 들이고 싶다. 스물둘, 그리고 4학년, 7학기, 아직 성급하지 않아도 된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군미필자인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이제 무언가 조금은 결실을 느낄 때가 된 것 같다. 
  길어봤자 6개월 동안 있게 된다. 짧으면 4개월 반 가량.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다. 가서 지내다보면 이내 적응해 오기 싫다고 또 징징댈지도 모르겠다. 타지 생활에 대해 걱정되는 바도 있지만, 뭐 나쁘지 않게 할 것이다.
  가기 전날이 되니 지금까지 살았던 것 중에서 가장 많은 연락을 받았고, 또 했다. 생각보다 헛살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혼자 사는데 익숙해져야 한다고 요즘 주장하고는 있지만, 철저히 고립된 삶을 살자는 것이 아니다. 정치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개인주의에 기반한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목표다. 그만큼,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내게 애정을 보여주는 이들과의 교류 - 혹은 연대 - 는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당신들께 늘 고맙다. 항상 까칠하다고 날 어려워하는 이들에게도, 애정에 감사한다고 전하고 싶다.
  모두들 au revoir.

  덧. 가자마자 아마 여행기 쓰게 될테니 기다리고 있어요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