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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희망 빼앗는 사회 속 ‘자기치유 열풍’ / 한기호

zeno 2008. 11. 23. 23:20

경제경영서를 펴내는 한 출판사 대표는 자신이 최근 ‘멜라민의 함정’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멜라민을 이용해 수많은 식품을 만드는 일을 줄곧 해 왔는데 갑자기 멜라민을 써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오니 앞이 노랗다는 이야기였다. 신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해 모든 기획을 진행해 왔지만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책 시장에서 신자유주의 철학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따라서 그동안 기획해 놓았던 책의 대부분을 폐기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처음부터 다시 기획해야 한다. 그러니 폐기해야 할 기획의 선인세를 크게 오른 환율로 당장 갚아야 하는 것부터가 난감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함정에 빠진 것이 어디 그 출판사 대표뿐이겠는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대통령을 뽑아놓았지만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갈팡질팡하기만 해서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나마 내세우는 정책마다 모두 가진 자를 위한 것뿐이라 없는 자들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은 지난 10년간의 상실감을 정신분열적 정책으로 되갚는 듯하다. 그에 따른 이분법적 사고의 확산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갈등의 확산, 빈부격차의 심화에 따른 양극화 심화, 고사상태로 빠져드는 문화시장, 해소되지 않는 청년실업, 심리적 불안으로 인한 자살자 증가 등으로 대중은 모든 희망을 접어야 할 상황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희망을 잃고 단지 목숨만 겨우 부지하는 상태다. 따라서 스스로 위안받는 자기치유(self-healing)를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대중은 이미 ‘성공’을 포기한 지 오래고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사치일 뿐이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상처를 보듬는 것에 몰두한다. 이 자기치유가 2008년 출판시장을 상징한다. 대중은 이제 ‘물질’이나 ‘권력’의 획득도 포기하고 자신의 상처난 마음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만을 찾고 있다. 또 먼 미래보다는 당장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틸 것인가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시크릿>(론다 번 외)의 ‘비밀’,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공지영)의 ‘응원’, <하악하악>(이외수)의 ‘거친 숨소리’, 아고라 광장에서의 치유로서의 글쓰기, <개밥바라기별>(황석영), <완득이>(김려령), <리버보이>(팀 보울러) 등 성장소설, 죽음과 자살을 다룬 책, 섬세하게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는 심리학 서적 등에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올해 출판시장에서 자기치유가 거대한 흐름을 이뤘음을 방증한다.

함정에 빠진 이들을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정말 우리는 아무것에도 희망을 걸기 어렵다. 개인에게는 국가나 사회, 나아가 가족 등 거의 모든 울타리가 사라진 지금, 우리는 오로지 스스로 위로하며 절망감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와야 한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 출판시장에서는 자기치유의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