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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국가』 제1권 요약 본문

ㄴ 플라톤, <국가>

플라톤 『국가』 제1권 요약

zeno 2008. 7. 1. 00:43
  플라톤의 『국가』 제1권의 본격적인 논의는 케팔로스가 불행의 탓을 ‘노령’으로 돌리는 일부 노인들의 사례를 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케팔로스 자신은 그 원인을 ‘생활 방식’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런 생활 방식을 가능케 하는 것이 ‘재산’임을 지적한다. 그러자 케팔로스는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가난하고서는 노령을 썩 수월하게 견디어 내지 못하겠지만,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부유하다고 해서 결코 쉬 자족하게는 되지 못할 것”이라며 ‘훌륭함’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330a)
  이 논의는 소크라테스의 ‘올바름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 시도로 이어진다. 그는 올바름을 “정직함과 남한테서 받은(맡은)것은 갚는 것”이라고 할 것인 지를 묻는다. (331c) 이 때, 유명한 ‘미친 친구’의 비유가 등장한다. 멀쩡할 때 무기를 맡겼던 친구가 미친 뒤에 다시 와 무기를 돌려주기를 요구할 때 이를 돌려주고, 또 정직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과연 ‘올바름’인가를 묻는 것이다.
  이제 논의는 케팔로스의 아들인 폴레마르코스가 시모니데스의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올바르다”는 정의를 제시함으로써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331e)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좀 더 설명할 것을 요구하고, 폴레마르코스는 “친구끼리는 서로에 대해 무언가 좋은 일을 하되, 나쁜 일은 하지 않음이 마땅하다”는 부연 설명을 하게 된다. (332a) 한편, 소크라테스의 유도에 따라 폴레마르코스는 “적한테는 갚을 것을 단연코 갚아야만” 한다고 주장하게 되는데, (332b) 소크라테스에 의해 ‘갚을 것’은 다시금 ‘합당한 것’이라는 또 다른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
  다음에 소크라테스는 의술과 요리술의 비유를 빌어 올바름이 하나의 방책(techne)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폴레마르코스는 “친구들과 적들에 대해 각각 이득을 주고 손해를 입히는 방책”이라 대답한다. (332d) 이에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을 실제 행위(praxis)로 옮기는 이에 대한 논의까지 이끌어낸다. 그러자 폴레마르코스는 가장 올바른 이가 전쟁에 능한 이라 대답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런 정의(definition)라면 평화시에는 올바름이 쓸모가 없는 것 아니냐며 공박한다. 그러자 폴레마르코스는 평화시에는 ‘계약’, 특히 금전 관계에서 올바름이 쓸모있다고 대답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금전은 결국 사용되지 않고 잘 보관되어야만 올바름이 쓸모가 있다는 부연을 이끌어내고, “올바름은 그 각각의 것이 사용시에는 쓸모가 없다가도, 쓰지 않을 때에는 쓸모가 있게” 된다는 역설적 명제를 도출해낸다. (333e)
  한편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의 정의 중 과연 ‘친구들’과 ‘적들’이란 누군지를 추궁한다. 상대는 이에 대해 친구란 “자기가 선량하다고 생각(판단)하는 이”이라 대답하고 소크라테스는 “실제로는 선량하지 않은 많은 이가, 그들이 생각하기엔 선량한 이로 보이는 반면, 실제로 선량한 많은 이가 그와 반대로 보이는 게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334c) 결국 이 논의는 기존의 친구란 실상 자신에게 나쁜 이이며, 적이 오히려 좋은 사람이므로 기존의 올바름에 관한 정의와 관련하여 못된 사람들에겐 이롭도록 해 주되, 좋은 사람들에겐 해롭도록 해야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토론은 “올바르지 못한 짓이라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역설적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러자 폴레마르코스는 “선량하다고 생각(판단)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선량한 사람”을 친구로 재규정하자고 요구한다. (335a) 소크라테스는 이 요구를 수락하여 친구와 적의 구분은 다시금 기존 통념대로 바뀌게 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올바른 사람, 즉 훌륭한 사람이 어떻게 ‘훌륭함(arete)’에 의해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 수 있겠느냐며 의문을 제기한다. “해를 입히는 것은 상대가 친구이든 또는 다른 누구이든 간에 올바른 이의 기능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인간 즉 올바르지 못한 자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335d)
  이들의 대화가 이렇게 전개되는 와중에 트라시마코스가 끼어들게 된다.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토론을 전개하는 방식에 딴지를 걸며 단순한 물음을 연속적으로 제기하기보다는 자신의 정의를 제시하기를 요구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첫째로는,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다음으로는, 설령 자신이 뭔가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결코 함부로 볼 수 없는 사람한테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 중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도록 금지당하고 있다”면서 반론을 제기한다. (337e) 이 같은 갑론을박 끝에 트라시마코스는 “올바른 것이란 ‘더 강한자의 편익(이득)’”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338c) 그는 각자의 정체(politeia)를 가진 나라의 정권, 즉 지배층은 법률(nomoi)을 제정할 때 자기의 편익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올바름 역시 그들의 이해에 부합하게 된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올바른 것이 편익이라는 점에는 동의를 표하지만, 그것이 왜 꼭 통치자들의 편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기왕의 산파술을 활용해 트라시마코스로부터 통치자들 역시 실수를 할 수 있는 이들이기에 - 이 때 그들의 실수가 그들 자신에게 편익이 되지 못함은 자명하다 - “더 강한 자의 편익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것, 즉 편익이 못 되는 것도 이행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답변을 이끌어낸다. (339d) 궁지에 몰린 트라시마코스는 ‘더 강한 자’ · ‘통치자’ 라는 정의를 보다 엄밀히 함으로써 자신이 말하는 지배의 전문가들은 결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것임을 주장한다. 즉, “통치자는, 그가 통치자인 한에 있어서는, 실수하지 않으며, 실수를 하지 않는 자로서 자신을 위해서 최선의 것을 제정하게 되나, 다스림을 받는 쪽으로서는 이를 이행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341a)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예사의 의사나 키잡이 등의 비유를 들어 일종의 기술인 통치술 역시 통치자 자신보다는 “기술이 관여하는 대상에 편익이 되는 것을 생각”해야한다고 논의의 방향을 전환한다. (342c) 이에 대해 트라시마코스는 양을 치는 목자는 양이 아닌 그 행위로부터 자신이 얻을 편익을 고려한다는 비유를 들며 반박한다. 이어서 트라시마코스는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몰래 해내지 못하면 처벌과 비난을 받지만, 시민들의 재물을 훔칠 뿐 아니라 그들까지 노예로 만들어버리면, 즉 권력을 획득하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에 역설적으로 올바른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올바르지 못한 짓이 큰 규모로 저질러지는 경우에는, 그것은 올바름보다도 더 강하고 자유로우며 전횡적인 것”인 것이다. (344c)
  다시 한 번 소크라테스는 논의의 방향을 전환한다. 그는 훌륭한 사람들은 돈과 명예가 아닌 ‘벌’ -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 - 이 두려워 통치를 맡게 된다는 주장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 이 때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가 아닌 글라우콘과 대화를 나누는데, 대화의 화살은 다시 트라시마코스에게로 향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전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완벽하게 올바르지 못함이 완벽한 올바름보다도 더 이득이 된다”고 주장하는지를 트라시마코스에게 묻는다. (348b) 이를 긍정한 트라시마코스는 이어서 ‘올바름’을 “아주 고상한 순진성”, ‘올바르지 못함’을 “훌륭한 판단(euboulia)”이라 재정의한다. 즉, 다시 한번 기존의 고정관념을 뒤틀어버리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올바른 이는 올바른 이를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지도 않거니와 그러고 싶어하지도 않으나, 올바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러하며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 올바른 사람과 올바른 행위를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긴다는 주장을 펼쳐 트라시마코스의 동의를 이끌어 낸다. (349b-c) 올바른 이는 겸손하지만, 올바르지 못한 이는 교만하단 이 테제는 “올바른 사람은 지혜롭고 훌륭한 이를 닮았으되,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못되고 무지한 이를 닮았겠”단 테제로 귀결된다. (350c) 즉, 올바름에 대한 올바르지 못함의 우월성을 주장하던 트라시마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판정패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논의는 나라의 차원에서 올바름이 과연 나라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놓고 펼쳐진다. 트라시마코스는 여전히 올바르지 못한 나라일수록 강력한 힘을 지닐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올바르지 못함이 서로간에 대립과 증오 및 다툼을 가져다 주나, 올바름은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나라 역시 올바름을 견지해야 할 당위를 역설한다. (351d) 이 주장은 개인의 차원에서 볼 때도 한 사람 안에서 올바르지 못함이 생긴다면 내부적으로 문제가 생길 것이고, 따라서 나라 차원에서도 대립과 불화는 결코 힘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란 논증으로 뒷받침된다. 둘의 토론은 권말에 ‘사는 것’이란 혼의 기능을 두고도 이뤄진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른 혼과 올바른 사람은 훌륭하게(잘) 살게 되겠지만,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잘못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트라시마코스는 이를 완전히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다. (353e) ZE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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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작성한  플라톤 『국가』의 각 권별 요약을 앞으로 올릴 생각입니다.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서 올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업적 이용이나 무단전재 등은 삼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카피레프트이긴 하지만, 남의 수고와 노력이 들어간 것을 도둑질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보고 이상한 부분은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덧. 글 내용 중 인용부호 뒤에는 각 인용문이 원전의 어느 부분을 번역한 것인지 표기해놓았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인용시에는 이 숫자와 알파벳을 표기해줘야 한다는 군요. 전 박종현 선생님이 번역하신 서광사판을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