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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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 Zenol

그 남자는 매일 밤 나를 부른다

zeno 2008. 2. 7. 01:44

 1. 자정. (1)

 다시 자정이 되었다. 그런데  마루에서 뻐꾸기 시계가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뭔가 슥슥하는  바람소리 같은 것이 마루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건너방에서 잠푸대인 오빠 연호가 코 고는 소리 아니면 숨쉬는 소리
같았다. 연희는 피식  웃으면서 그만 책을 덮고  머리를 한 번 쓸어올렸다. 이제는 대강 자야 할 시간이었다.  벗어서 책상 위에 올려 놓은 손목시계나 벽에 걸린 고양이 시계도 모두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매일같
이 들려오던 마루의 뻐꾸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건전지가 다 떨어졌나? 후후'

 전번에도 건전지가 떨어졌는데 밥을  주지 않자 뻐꾸기가 머리를 내밀었다가 오도가도 못하고 중간에  걸려서 보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수정이가 건전지를 갈아 주었었지. 후후'

 연희는 지금 잠시 같은 집에 머물고 있는 사촌 동생인 열 살 먹은 꼬마 수정이의 몸짓을 떠 올렸다.

 - 뻐꾸기 다시 간다아.. 하하..

 다시 한 번 마루에서 스스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들렸던 것과 같은것 같은 소리.  그런데 아무래도 오빠 연호의 코고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바람소리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마루의  커어튼이 흐트러지는 소리
같지도 않았는데...

 '무슨 소리일까? 마루 문이 열려있나?'

 연희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봄이고 날씨도 좋았지만 밤공기는 꽤 쌀쌀한 편이었다. 만약  마루 문이 열려 있다면 방문을  열어 놓고 자는 습관이 있는 수정이가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

 '문을 닫아야 겠다.'

 연희는 일어서면서 긴 머리칼을 등 뒤로 훑어 넘겼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조용히 마루로 나섰다.

 "아아앗!!!"

 갑자기 마루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연호는 눈을 번쩍 떴다. 분명 동생인 연희의 음성이었다. 연호가 총알같이  문을 열고 마루로 뛰어 나가자 동생 연희가 손을 입가에 댄 채 멍하니 수정이의 방문 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연희야 왜 그러니? 응?"

 연희는 뭔가에 몹시 놀란 것 같았다.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들어 방문 쪽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연호는 보았다.

 "저기.. 저기 웬 남자가..."

 "남자?"

 순간적으로 도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연호의 마음 속에 떠 올랐다. 주먹을 꼭 움켜쥐고 방문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데 연희의 떨리는 음성이 귓가에 와 닿았다.

 "문.. 문을 뚫고 들...들어갔어..."

 연호는 소름이 쪽 끼치는 것을 느꼈다. 말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수정이의 방문에 붙어서서 연호는 문을  천천히 열었다. 방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연호는 잠시  귀를 기울였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
다. 수정이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아무도 없어. 연희야... 헛 것을 본 모양이구나."

 연호는 피식 웃으면서  몸을 돌렸으나 연희는 좀 겁먹은 듯한 걸음걸이로 방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았다. 분명 자신은 희끄무레한 남자의 형체가 수정이의 방문을  그대로 흡수되듯이 들어가는 광경을 보았기 때
문이었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는 듯 했으나 일단은 수정이가 걱정되었다. 비록 부모님은 지방에 내려가 게시는 중이었지만 오빠인 연호가 옆에 있어서 듬직했다. 연희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차분히 방 안으로 들어
가서 자고 있는 수정이의 머리맡에 서서 걱정스러운 듯이 수정이를 내려다 보았다. 수정이의 잠꼬대 인듯한 웅얼거림이 들렸다.

 "아저씨... 나 안갈래.. 언니가..."

 연희는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연희가 휙 고개를 돌리자  막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희미해지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그리고 잠시 반짝이는 듯한 눈동자의 모습이...

 "오빠! 저깃!!!"

 연호가 더시 방안으로 뛰어들면서  그 형체의 마지막 잔영을 보았다. 연호는 다짜고짜로 몸을 날리며  벽을 후려갈겼으나 연호의 주먹은 헛되이 벽에 부딪혀서 쿵 소리만을 내었고 흐릿한 그 형체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
다.

 "아아아..."

 연희가 수정이의 침대 머리맡에  털썩 주저 앉았다. 수정이의 잠꼬대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고 그 소리가 더더욱 연희의 마음을 무섭게 했다.

 "아저씨... 인제 간거야..?.. 간거야..?"

 연호가 바닥에 털썩 주저 앉으면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벽을 갈긴 연호의 주먹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이럴 수가..."

 연희의 심경도  비슷했다. 그러나 연희의 마음속에는 사라지다가 언뜻 빛난, 그 흐릿한 형체에서 유달리 반짝거리는 눈동자의 모습이 똑똑이 새겨져 있었다.

 "수정아, 오늘은 언니와 같이 자자꾸나, 응?"

 다음 날이 되어 해가 지자 연희는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오빠인 연호와는 상의를 해서 그냥  없었던 일로 잊고 넘어가기로  했지만... 오늘은 다행히 일이 없어서 집에서 수정이와 하루종일 놀아줄 수 있었다. 원래 프리랜서로
통역일을 하고 있는  연희에게는 일 의뢰가 수도 없이 와서 한동안은 몹시 바빴었지만, 요즈음은  다행히 별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귀찮게 쫓아다니는 남자들의 전화도 별로 걸려오지 않았고... 수정이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전혀 알지  못하는 듯, 그냥 언니인 연희가 같이 놀아주는 것만이 좋은 듯 했다. 연희는 조심스럽게 혹시 어제 밤에 꿈을 꾸지 않았는냐고 물어 보았지만 수정이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막 그 말을 물을때에 마루의 뻐꾸
기 시계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어젯밤에는 분명히 죽어있는 시계였는데...

 "하하하 뻐꾸기다..하하"

 수정이는 뻐꾸기 소리를 참  좋아했다. 뻐꾸기 소리가 들리자 수정이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연희도 미소를 지었다.

 '시계가 조금 고물이 되었나보군. 가다말다 하다니...'

 뻐꾸기 소리가 멎자 수정이는 다시 글자맞추기를 시작했다. 연희는 수정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수정이에게 무심코 물었다.

 "수정아 네가 뻐꾸기 밥 줬니?"

 "으응.."

 돌아보지도 않고 수정이가 대꾸했다.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계 쪽으로 갔다. 어디가 고장났는지 한 번 열어 볼 셈이었다. 그런데...

 "아앗!"

 연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시계를 떨어뜨릴 뻔  했다. 뻐꾸기 시계 속에는 건전지가 하나밖에 없었다.

 "언니이~ 왜 그래애? 하하"

 연희는 갑자기 머리 끝이 쭈뼛한 것을 느꼈다. 시계는... 그런데도 아직도 째깍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수..수정아? 네가... 시계에..."

 "으응? 응~~ 뻐꾸기가 매달려 있길래 내가 들어가라고 했지이~ 하하.."

 연희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시계의 안을 다시  한 번 보았다. 틀림없었다. 분명히 두 개의 건전지가 들어가야 하는 시계 안에는 하나의 건전지 밖에 없었고 그런데도 시계는 째깍거리며 가고 있었다. 연희는 떨리는 손으로
건전지를 집어 들려하자 갑자기 건전지에서 파팟하며 푸른 불꽃이 튀었다.

 "아아앗!"

 놀란 연희는 그만 시계를  떨어뜨려 버렸다. 시계가 떨어지자 와장창 하는 소리가 나면서 뻐꾸기가 뻐꾹~~ 하면서 길게 울었다. 수정이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 보는 데에 연희는 무서워졌다.

 "언니 왜 그래?"

 "수...수정아, 너..."

 연희는 겁이 나서 방에 뛰어들어가서 문을 닫아 버렸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문에 등을 기대어 서 있는데 갑자기 문을  콩콩콩 두드리는 소리에 연희는  깜짝 놀라서 문에서 멀리 떨어졌다.

 "언니이~~~ 왜 그래애~~~??"

 "아아... "

 "언니이~~ 이잉... 왜 그래애~~~~!!!"

 연희는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도대체 이건... 문 바깥에서는 수정이가 울고 있었다. 연희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이 혼자 밖에서 울고 있는 것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연희가 문을 열자 수정이가 눈물로 범벅이 되어서 들어와서 연희에게 안겼다.

 "언니이... 왜 그래애~~ 무서워 이이잉...."

 "응 그래 그래 미안...미안하다 수정아..."

 연희는 수정이의 등을 토탁거리며 수정이를 달래려 애썼다. 오늘 무슨 일이 있는지 연호오빠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는데... 창 밖을 보니 이미 어둠이 짙어져 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것일까... 연희
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 작은 수정이는... 아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수정이는 자기가 시계에 밥을 주었다고 했다. 어리니까 건전지를 하나만 끼웠을지도 모르는 것이고... 그런데 어떻게 시계가 다
시 간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수정이가 시계를 내렸을까? 원래 연희의 서씨 집안은 모두 키가 커서  연희도 키가 170이 넘었고 연호 오빠는 185가 넘는 훤칠한 키였지만  아직 겨우 열 살  먹은 계집아이인 수정이는 아직은
키가 작았다. 그리고 마루에 시계가 걸려 있는 곳은 티비 위이기 때문에 의자를 놓아도 수정이의 손이 닿지 않을 것이었는데!!!

 "수정아, 너.. 전에 시계 밥 줄때.."

 "으응.. 언니..."

 "그.. 시계를 어떻게.. 내렸지?"
 "응? 응... 그건.."

 갑자기 마루에서 다시 뻐꾸기  시계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연희는 하마트면 비명을 지를 뻔 하면서 수정이를 꼭 끌어 안았다. 수정이는 그냥 중얼거렸다.

 "뻐꾸기.. 뻐꾸기 소리가 좋아서.. 아저씨에게..."

 연희는 온 몸이 덜덜덜 떨려 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할 수 있는 한 가장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어느 아저씨?"

 다시 마루에서 스으윽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연희는 입술을 깨물고 수정이의 얼굴을 다시 쳐다 보았다. 수정이의 눈은 전혀 어두운 곳이 없이 크고 맑았다.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에 질려 있는 듯 했다.

 "수정아... 어느 아저씨? 연호오빠 말고?"

 "으응..."

 갑자기 수정이가 반 쯤 열린 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저 아저씨..."

 연희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와락 문을 열어 젖히며 마루로 나갔다.
그러나 마루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앗!!!"

 연희는 그만 다리가 휘청 꺾이는  것을 느꼈다. 마루의 벽 위에는 분명 자기가 떨어뜨렸던 뻐꾸기 시계가  언제 그랬었냐는 듯 째깍거리며 걸려 있었다.

1. 자정. (2)


 "저 시계가 어떻게..."

 연희는 이를 악물면서 사방의 전등을 모두 다 켰다. 갑자기 사방이 밝아지자 조금은 안심이 되는 듯 했다. 연희는 조심스럽게 수정이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방 안에 어제의 그 형체가 다시 나타난다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제 자신과 오빠인  연호가 본 그 사람 그림자는 헛것인 것 같지가 않았다. 연호는 굳이  아무것 아닌 일일거라고 했지만... 오늘 시계의 일을 직접 겪은 연희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하물며 지금 집안
에는 어린 수정이와 자신만이...

 방안으로 들어서면서 연희는 방 안의 불을 확 켰으나 방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등 뒤편에서 수정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오늘은 왜애..?"

 연희는 재빨리 몸을 돌려서 수정이가 있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수정아! 수정아!!"

 수정이는 혼자 있었다. 가만히 벽 쪽을 보면서...

 "수정아! 왜 그러지? 누가.. 누가 있었지?"

 "방금 아저씨가 왔었서어... 그리고.."

 "그리고 뭐지?"

 "아니야.. 그냥 여기저기 둘러보다가...갔어..."

 연희는 다시 몸을 돌려서 방의 창문을 확인했다. 그리고 대문도.. 모든 문은 잠겨져 있었다. 연희는 입이 말라 붙는 것을 느끼면서 말했다.

 "수정아..?"

 "응.. 언니?"

 "그 아저씨.. 어느 쪽으로 갔지?"

 "저 쪽으로.."

 말을 이으면서 수정이가 가르친  것은 아파트 외부와 통하는 벽 쪽이었다. 연희는 까닭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언니이!! 언니이!! 왜 그래? 왜애?"

 연희는 잠시 감정을 억눌렀다.

 "수정아... 그 아저씨가.. 대체..."

 갑자기 현관의 벨이 울리자 연희는 너무 놀라서 그만 주춤했다. 오히려 수정이가 쪼르르르 달려 나갔다. 아마  분위기가 어색한 참에 벨 소리가 울리자 그냥 자기 좋을대로만 해석을 한 모양이었다.

 "연호 오빠다아~ 하하하.."

 연희는 대문을 열지 말라고 하려 했으나 미처 그럴 틈이 없었다. 수정이는 누구냐고 묻지도 아않은 채 대문을 활짝 열어 젖혔고 거기에는 연호 대신에 조금 눈매가 싸늘한 듯이 보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수정이는 조금 어리
둥절한 듯 했으나  연희가 재빨리 달려 나오면서 수정이를 안아 자기 뒤로 돌려세우고 앞으로 나섰다.

 "누..누구세요? 뭘 원하시죠?"

 "혹시..."

 연희는 남자가 말을  잇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재빨리 수정이에게 고개를 숙여 작은 소리로 물었다.

 "수정아! 이 아저씨니? 아까 본 사람이..?"

 "으응? 아니이.."

 남자는 연희가 작은 소리로 이야기 하는데도 그 소리를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인듯 중얼거렸다.

 "역시..."

 연희는 다시 남자를 쳐다  보았다. 남자의 행색은 특별히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한쪽 손에 뭔가 작은 것을 안보이게 쥐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세요? 무슨 볼일로 오셨죠?"

 "아... 실례가 안 되었으면 합니다.  방금.. 이 집에 무슨 일이 있지 않았나요? "

 "일이라뇨?"

 남자는 오히려 조금 부끄러워하는 듯 말을 약간 더듬거렸으나 그 눈빛만은 아직도 매서웠다.

 "글쎄요.. 이렇게 불쑥 올라와서  죄송합니다만... 뭔가.. 뭔가 좀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

 "나가세요! 그런 일 없어요!"

 연희는 그만 문을  쾅 소리나게 닫아버리고는 문을  잠가 버렸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을 누가  믿어준단 말인가? 연희는 멀뚱히 서 있는 수정이를 안고, 수정이는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데도 수정이에게 중얼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수정아,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닐거야.. 아무 일도..."

 한참이 지나자 연희는 다시 침착성을 되찾았다. 시간이 상당히 늦었는데도 연호는 들어오지 않고  있었고,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부모님의 매일같이 걸려오던 안부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다.  수정이는 이제 졸려운 모양인지 마루에서 연희의 무릎을 베고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연희도 몹시 피곤했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루의 벽에는  이미 뻐꾹시계는 없었다. 연희가 발코니에다가 내 놓은 것이다.  뻐꾹시계는 아까 수정이가 아저씨가 왔다갔다고 혼잣말을 한 다음에는 가지  않고 움직임을 멈춰 있었다. 연희는 라디오와 티비를 크게 틀어  놓았었으나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불안하게 여겨져서 모두 꺼버린 참이었다. 적막... 그리고 고요... 친한 이웃사람이라도 불
렀으면 좋으련만 지금 12시가 다 된 시간에 괜히 그럴 수도 없었다. 친구와 전화통이라도 붙잡고 이야기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가만히... 오직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 그런데 이 오빠는 왜 이리 오지 않
는 것일까? 주위는 너무도 조용했다. 너무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감기고.. 그리고..

 연희는 문득 찬바람 한 줄기가 얼굴을 스치는 것 같은 감촉에 후딱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웬지 모를 불안감이 먼저 머리 속을 엄습했다. 눈을 뜨기가 무서웠다. 웬지... 분명히 불을 켜  놓고 잠든 것 같았는데 지금은 불이 꺼
져 있었다. 먼 발치에서 들려 오는 듯한 뻐꾸기 소리.. 연희는 손을 저어 무릎을 베고  자고 있을 수정이를 찾았으나 수정이는 없었다. 이상했다. 눈을 뜨기는  무서웠지만.. 눈을 떠서는 안된다고 마음 속에서 누군가가 부르짖는 듯 했다. 그러나... 그러나...

 "수정아!"

 연희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떴다. 그리고는 공포에 질려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연희의 눈 앞에 수정이가  푸르스름한 불꽃 같은 것에 들려서 둥둥 떠 있었다. 그리고 막 열린 아파트 창문을 향해 빠져 나가려는 참이었다.

 "수..수정아!! 안돼!!!"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서  막 문을 빠져 나가려는 수정이를 붙들었다. 수정이를 감싸고 있던 푸른 불꽃이 지지직하는 소리를 냈으나 연희는 신경쓰지 않고 수정이를 감싸  안았다. 푸른 불꽃의 무더기는 갑자기 환
하게 빛나다가 잠시 멈칫했다. 열린  마루문 너머 몰아쳐 오는 바람결에 연희의 긴 머리결이  휘날렸다. 연희는 두려움에 질려서  수정이를 안고 뒤로 물러서다가 소파에 걸려 넘어져  버렸다. 푸른 불꽃은 서서히 희미해지면서
점차 사람의 형상이 되어갔다.  흐릿하게... 얼굴 부분이 맺혀 형상을 이루어가면서 눈동자가 빛났다. 연희는 그냥 어쩔 줄을 모르고 암담한 기분으로 아직 잠들어 있는  수정이를 꼭 끌어안고 몸을 떨며  있었다. 채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려 내렸고 머리칼은 자꾸 뒤로 흩날리기만 했다.

 이제 눈 앞의 형체는  완연한 사람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흰 옷인지 좀 불분명한 것을 입고 있었으며 눈빛이 몹시 빛났다. 눈빛에는 웬지 슬픈 듯한 기운이  돌았다. 평소에 연희가 생각해오던 귀신의 이미지와는 좀 달랐으나 어쨌거나 연희는 너무나도 공포에 질려 버렸다.

 "아가씨.. 무서워 말아요..."

 연희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하마트면 너무 놀라서 기절할 뻔 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목에 걸고  다니던 묵주를 뜯어내어 남자의 쪽으로 집어 던졌다. 저건 분명 귀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리...저리갓!!!"

 그러나 남자는 움찔도 하지 않았다. 연희가 던진 묵주를 피하기는 커녕 오히려 남자는 한  손으로 그 묵주를 받아 들었다.  남자는 장난기 섞인 듯한 얼굴로 그 묵주를 한동안  들여다보더니 묵주를 얌전히 마루의 장식장 위에 올려 놓았다.

 "아가씨... 그 아이를 제게 주세요..."

 "안..안돼..안돼!!!!"

 연희는 마구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아이를 달라니... 친동생같이 정이 든 수정이를... 이 어린 아이를...

 "울지 말아요, 아가씨.. 이건 정해진 일이랍니다.."

 "안돼.. 안돼....!!!"

 "아아...."

 남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혼잣말 같은 소리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가씨는 내 모습을 봐서는 안되는 거였어요... 나는 누구의 눈에도 띄어서는... 나는 원래대로라면 아가씨를..."

 남자는 연희가 있는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푸른 불꽃 같은 것이 남자의 손에 다시 맺히기 시작했다. 연희는 공포에 질려서 있는 힘껏 몸을 뒤로 밀었으나 딱딱한 벽이 굳세게 막고  있었다. 연희는 이제 말을 잇지도 못하
고 수정이를 안은 채 눈물을 흘리며 다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가씨! 어서  그 아이를 줘요!  아이에게 해를  끼치려 하는게 아니랍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그러나 연희는 고개를 저었다.

 "어서요!!!"

 남자가 소리를 치자 남자의 전신에서부터  푸른 불꽃 같은 것이 폭풍우 처럼 터져 나왔다.  터져 나온 불꽃은 허공에서 엉키며  커다란 뱀과 같은 두 줄기의 형상을 이루면서 연희에게 달려 들었다. 연희는 아찔해져서 눈을 감
았으나 더더욱 힘차게 수정이를 부둥켜  안았다. 미친 듯이 고개를 젓자 검은 머리칼이 사방에 물결치면서 흐트러 졌다. 두 갈래의 푸른 기운은 막 연희가 있는 쪽으로 덤벼들 듯이 몰아쳐 가다가 남자가 한 번 손짓을 하자 아슬아슬하게 연희를 스치듯 피해서 다시 남자의 등 뒤로 돌아가 사라졌다.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이런... 내가... 내가 어쩌다가..."

 연희가 다시 눈을 떴다. 커다란 눈은 겁에 질렸으나 눈물에 젖어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아... 나..나는... 이건.. 아..."

 남자는 말을 더듬거리면서 알아 볼  수 없는 손짓을 했다. 뭔가가 조금 이상했다. 남자가 갑자기 큰소리로 고함을 쳤다.

 "하하하하핫!!!!"

 남자가 소리를 치자 아파트의  커다란 유리문이 와장창 바깥쪽으로 부서질 듯 흔들리며 집안의 물건들이 지진을 맞은 것처럼 우르르 흔들렸다. 연희는 남자가 엄청난 힘을 쏟는 것을 보고는 어쩐지 남자가 무섭다는 생각이 조금줄어들었다. 다만 왜 자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남자가 다시 연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나는 이 작은 아이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이 아이는 재질이 있습니다. 위대한 힘을 가질 수 있는... 봐요!"

 남자가 한 번  손짓을 하자 남자의 손에서 이번에는 사람의 손 모양을 한 푸른 불덩어리 같은 것이 확  퍼져 나왔다. 그 손은 마루 저편에 있던 커다란 테이블을 성냥갑처럼 들어 저  쪽에다가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손 모양은 테이블 위에 확 하고 다시 엉키더니 어느새 붉은 장미 꽃다발로 변했다.

 연희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건 마술인지, 아니, 이건 귀신의 속임수라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두려운 기분에 연희는 기도문을 생각나는 대로 읊어댔으나 남자는 오히려 그 소리를 듣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이것 봐요.. 그런 쓸데 없는 소리를 할 이유가 없어요. 그건 단지.."

 남자가 다소 익살스러운 눈빛으로 뭔가 이야기를 하려 하는데 이번엔 갑자기 꺄아아악 하는 소리를 울리면서  은빛 물건이 제비처럼 날아 들었다. 마루의 유리문이 퍽 소리를 내면서 조금 부서져 나가자 남자는 대번에 기색을 바꾸면서 고함을 쳤다.

 "이건!!!"

 삼시간에 남자의  모습은 다시 푸른 불덩어리로  바뀌었다. 그리고는 계속 비명소리를 내면서 달려드는  은빛 물건을 아슬아슬하게 꿈틀거리면서 피해냈다. 그러더니 그  불덩어리는 연기 처럼 맞은 편 벽 속으로 빨려 들듯이
사라져 버렸다.

 "다음에 봐요! 이쁜 아가씨!!"

 은빛 나는 것은 다시 소리를 지르면서 벽을 향하다가 다시 휘잉 돌아서 공중에 섰다. 이제 거의 연희는  기절할 지경이었으나 품에 안고 있는 수정이를 생각하고는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뜨고 있을 따름이었다. 연희는 계속 눈
물이 흐르는 눈으로 허공에 떠 있는 것을 지켜 보았다. 그것은 작은 칼이었다. 연희는 그 칼이 더 무서웠다. 이건 도대체... 갑자기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우당탕탕  두 사람이 들이닥쳤다. 한 사람은 연희의 오빠인
연호였고 또 한 사람은 아까  문의 벨을 눌렀던 남자였다. 연호가 뛰어들면서 소리를 쳤다.

 "연희야! 무슨 일이야!!! 연희야! 수정아!"

 연희는 긴장이 풀리면서 어느덧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희미해지는 속에 허공에 떠 있던 은빛 물체가 다시 날아 뒤에 서 있던 남자의 팔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저럴수가... 엄청난 녀석이군..."

 연희는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버티고 있는 것은 무리일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1. 자정...(3)

 누군가가 냉수 한  컵을 떠다 주어서 연희는 뭐가 뭔지 모를 혼돈 속에서 다시 제 정신을 차렸다. 연호 오빠였다. 그리고 마루 저만치 구석에서 아까의 남자가 생각에  잠긴 채 서 있는 것도  보였다. 수정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빠! 수정이! 수정이는??"

 정신이 들자마자 소파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키려는 연희를 연호가 제지했다.

 "아무 일도 없단다. 수정이는 자기 방에 눕혀 놨어. 잠 들었단다."

 "으응... 그래.."

 연희는 안심하면서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대다가 문득 벽에 걸려 있는 뻐꾹 시계를 보고는 다시 소스라쳤다.

 "오..오빠! 저 시계! 저 시계는..??"

 "음?"

 "저건 분명히 내가 떼어서 치워 놓았던 건데...? 오빠가 걸어 놓았어?"

 "음? 아니?"

 "그러면 저게 왜!!"

 "제가 걸었습니다."

 저쪽에 있던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왔다. 남자의 얼굴은 아직도 무표정했으나 두 눈만은 반짝이고 있었다.

 "왜죠? 무서워요! 그 시계는..."

 "무서워할 것 없습니다. 저 시계... 제가 조사해 보았습니다."

 남자는 이야기 하면서 오른손에 쥐었던 것을 펴 보였다. 그건 뻐꾹시계 안에 들어있던 듯한 건전지였다.

  "이게 문제입니다."

 남자가 뭔가 오른손에 힘을 가하는 듯 하자, 건전지에서는 아까 보았던 그 푸른 불길 같은 것이  바지직 하면서 일어났다. 연호도 눈이 휘둥그레졌고, 연희에게서도 탄식 같은 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아..."

 남자가 손에 다시 힘을 주자 손에 아지랑이같은 기운이 생겨나면서 건전지에서 일어나던 불길 같은 것은 다시 건전지 안으로 찌그러져 들어가는듯 하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 약간 눈썹을 찌푸리며 건전지를 힐끗 훑어보고는 건전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도망쳤군요. 방금 보인 그 불꽃은 유체 입니다. 엘리멘탈..이라 하는 것이죠. 아가씨는 이상한 일을 많이 보셨겠지요? 저 시계가 이상한 동작을 한 것도 다 이것의 작용입니다."

 연희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물어 보고 싶은 것이 많아서 오히려 말문이 막히는 것이었다. 연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이분은.. 우리가 어제의 이상한  일을 당한 것을 알고 나를 찾아오신 분이야. 성함이..."

 "현암이라 합니다. 이현암..."

 다시 한 번 언뜻 연희의 눈에 들어온 뻐꾹시계의 정지된 문자판은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2. 유체....(1)

 자신을 퇴마사라고 밝힌 현암은 연희와 연호에게 어제의 일을 자세히 물었다. 남자의 모습이 벽으로 들어 갔던 일, 그리고 뻐꾹시계가 건전지 없이도 가고 제 스스로 벽에 걸렸던  일, 수정이의 몸이 허공에 떴던 일과 그 푸른
불꽃, 불꽃이 행했던 이상한 일들... 현암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어제의 그 남자가 수정이를 데려가야 한다고 했었습니까?"

 "예...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위대한... 위대한 힘을 가지게 해 주려는 거라고 했어요.."

 "위대한 힘...그러면서 이상한 이적을 보였다 했지요?"

 "예... 믿어지지 않는... 몸 전체에서 푸른 불꽃같은 것이 일어나고.."

 "그것이 바로 유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자유자재로..."

 "그런데.. 유체가 무엇이죠? 귀신인가요?"

 "사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스스로의 분신이라고나 할까요? 육체와 영혼의 중간단계 정도라 할 수 있지요..."

 현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벽을  통과하고, 몸 전체가 푸른 불꽃으로 바뀌었다가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면  분명 이 집으로 들어온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놈 자신이 아니고 그의 유체였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유체를
이용하여 비록 작은 꼬마였기는 하지만  한 사람의 몸을 들어서 옮기고, 마루의 무거운 테이블을 유체 중의  한 줄기를 나누어서 끌어 당기며, 유체를 다른 물체의 모습으로 마음대로 바꾸어서 보일 수 있다면, 그 자의 능력은
놀랄만한 경지에 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놈의 유체는 작게 갈라져서 따로 행동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건전지 속에 숨어서 시계를 멋대로  가게하고 장난을 부린 작은 유체가 그 증거
였다. 현암이 공력을 가하자 그 유체는 다시 원주인에게로 이동해 간 듯 했고,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 정도의 유체를 몸에서  자유로이 뽑아내고, 그리고 그것으로 물리력을 직접 행사할 수 있다면 보통 사람은 아닙니다. 그 능력은 참으로..."

 현암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가 왜 수정이라는 아이를 데려가지 않고 연희에게 설명을 하려 한 것일까? 그 자가 그러면 악인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러나  영적인 능력을 함부로 사용하여 어린아이를 꾀어내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게  봐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연희 스스로의 이야기에서도 유체 두 줄기가  수정이를 안고 있을 때 덤벼 들다가 사그라졌다는 대목이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연희를 꼼짝 못하게 하고 수정이
를 데려가는 것은 간단했을터인데...

 "그런데... 어째서..."

 현암은 잠시 말을 멈추고 알  수 없는 공포로 얼굴이 하얗게 된 연희를 지켜 보았다. 특별히 꼬집어서 오밀조밀하게 잘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커다랗고 검은 눈과 잘 조화를 이룬 선량하고 특이한 얼굴이었다. 뭔가 장난 스러운 어린애 같으면서도 너무나도 착하고 차분한 듯한 얼굴... 거기에 길게 허리까지 늘어뜨린  머리와 늘씬하고 훤칠한 키가  특이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특히 지금 눈을 크게 뜨고 현암을 지켜보는 검은 눈동자는 마
치 빨려 들어갈 듯한 착각을 주었다.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하고 간 말이 어떤 것이었죠?"

 "저... 그건... 다음에 봐요. 이쁜 아가씨...라고"

 연희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으나 현암의 기분 탓인지 연희의 양 뺨이 불그레하게 되는듯 했다. 현암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연희에게 반했다는 말인가? 단 한  번 보고? 의심이 들었지만 현암은 다시 그렇
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영능력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천부적인 자질도 물론 이지만 엄청나게 고되고  혹독한 수련을 해야 한다. 그러한 과정을 겪은 자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힐끗 본 여자 때문에 마음먹은 것을 못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현암은 그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걸 알아내야 해요."

 현암은 다시 수정이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희와 연호가 채 말도 하지 못하고 현암의 뒤를 따랐다.  현암은 상단전이 막혀서 자세히 투시할 수는 없었지만, 태극패로 비추어보면 뭔가 수정이에 대해서는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태극패의 빛으로  감추어진 영의 진면목을 투사하는 수법은 근래에 현암이 다시 수련하여 과거 보다는 많이 발전 되어있었다.

 수정이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는채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현암은 수정이의 머리맡에 서서 태극패를  꺼내 들고 공력을 가했다. 그러자 태극패의 동경 부분에서 온화한 푸른 빛이 나와서 수정이에게 비춰졌다.

 "앗!!"

 연희와 연호는 빛 사이에 보이는 모습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거기에는 또 하나의 수정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투명하게 비추어진 수정이의 유령과 같은 모습이었으며 은빛처럼 보이는 줄 같은 것이 한가닥 번쩍이고 있었다.  현암이 공력을 쓰지 않는 왼손으로 두 사람에게 조용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연희는 오늘 정말  이상한 것을 너무 보아서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으나  현암의 손짓에 이를 악물고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았다. 연호의  얼굴도 침중했다. 현암은 두사람에게 설명을 미리 해줄 걸 잘못했다고 생각했으나 별 수 없었다. 현암은 계속 빛을 투사하면서, 잠이 들어서 빠져 나온 수정이의 유체를 살폈다. 사람이 잠을 자면서 유체가 빠져 나오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유체와 자고 있는 수정이의 몸 사이에서 밝게 빛나는 듯  보이는 것은 수정이의 유체와 육신을 연결하는  은줄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있었
다. 어딘가...


2. 유체....(2)

 연희가 신음성 같은 것을 흘리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연호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몸을 떨고 있었고, 현암은 계속 눈에 온 신경을 쏟고 아물아물하게 보이는 수정이의 유체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정이의 유체는 계속 수정이 자신의 몸에서 간헐적으로 멀어졌다가 가까와지기도 하고, 형체도 흐릿해졌다가 다시 또렷해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어서 좀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현암은  자세히 본 결과 어디가 이상한 것
인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제서야  대강 짐작이 가자 현암은 연희와 연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공력을 끌어모았다. 현암 자신도 무섭게 긴장이 되고 있었으나 옆의 두 사람이 눈치채서는 곤란했다.

 "연희씨?"

 현암은 빛이 사라지지 않도록 조심한  채 고개를 돌려서 연희의 귓전에 대고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예..예...?"

 "조용히... 낮은 소리로요.. 자, 안심하세요. 별 일은 아닙니다."

 연희도 불안해져서 최대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뭐죠? 저 건.. 아아.. 너무 무서워요.."

 "차차 말씀드리지요. 일단은.. 수정이를 깨우세요."

 "깨우라고요?"

 "예... 아? 어서.. 어서요."

 "어떻게요?"

 "조용히..  조용히 부르세요.  놀라게 해서는  안됩니다.  침착, 침착하게요.."

 "뭐라고.. 해야... 아아..."

 "자자.. 침착..침착하셔야 해요. 그냥 조용히.. 아침에 깨우듯이.. 조용히요.."

 연희가 울먹일 듯  망설이다가 뭔가 마음을 새롭게  먹는 듯 했다. 연희의 입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수정아..? 수정아..?"

 연희가 무의식 중에 손을 뻗어  수정이를 깨우려는 것을 현암이 재빨리 왼손으로 제지했다. 현암은 말  없이 고개를 저으며 눈짓을 보냈다. 건드리지는 말라는 의미였다.

 "수정아... 일어나렴.. 수정아..."

 연희는 울고만 싶었다.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왜 갑자기 자신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인가?  그리고 지금 자기 눈 앞에 보이는 이 이상한 일들은 또... 연희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수정아!!!"

 갑자기 수정이의 유체가 연결 되어있던 은줄이 팽팽해지면서 수정이의 유체가 왈칵 몸 쪽으로 쏠렸다. 그러나 수정이의 몸은 뭔가에 걸린 듯, 몸 쪽으로 당겨지지 않고 있었다. 현암이 눈을 빛내면서 왼팔을 허공으로 떨치자 월향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꺄아아아악!!"

 월향의 귀곡성이 울려퍼지자 연희는  얼결에 침대 가를 부여잡았고 연호는 놀란 나머지 수정이에게 달려 들려고 했다.

 "수정아!!"

 쏘아져 나간 월향은 수정이의 위쪽의 허공 같아 보이는 공간으로 예리하게 날아갔고 갑자기 월향이 날아 간  허공중에서 푸른 불꽃 같은 것이 확 나타나면서 둘로 갈라졌다. 연호의 손이 막 수정이에게 가 닿을려는 찰라, 손이
자유롭지 않은 현암은 급한 나머지 연호를 발로 차서 밀어내 버렸다.

 "연희씨! 어서! 어서 수정이를 깨워요!! 어서!"

 월향은 재차 허공을 돌아서 자신을 피한 푸른 불꽃 뭉치에게 다시 달려 들었으나 푸른 불꽃은 다시 넷으로  갈라졌다. 네 개의 불꽃이 수정이의 사지 쪽에 엉키는 것이 보였다. 월향은  다시 한 번 허공에서 귀곡성을 질렀으나
행여 수정이의 유체를  상할까봐 그러는 것인지, 잠시  허공에 머물고 있었다. 현암의 목소리에 놀란 연희가 다급하게 소리를 쳤다.

 "수정아!! 수정아앗!!!"

 연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수정이의 유체가 쭈욱 몸 안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네 개로 나뉘어진 푸른 불꽃들은 안간힘을 쓰는 듯 했으나 수정이는 드디어 잠에서  깨어 나려는 듯, 수정이의 유체는 몸 안으로 거의 다 들어가고 있었다. 현암은  태극패를 쥔 손에 공력을 다시 모으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현암의 머리에서도  어느 틈엔가 빗발같은 땀방울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푸른 불꽃들은 다시 수정이의 왼손에 뭉쳐서 수정이의 유체를 당기는 것 같았다. 현암은 속으로 제길! 소리를 냈다.

 "연희씨! 수정이의 손을!!"

 "예?"

 "어서요! 다른 방법이 없..."

 연희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수정이의 손을 잡자, 몸에서 바깥으로 당겨지는 듯 하던 수정이의 유체의 손이 순식간에 몸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푸른 불꽃의 뭉치는 위로 튕겨나 버렸다.

 "야아아앗!!!"

 수정이의 유체가 태극패의 빛에서 다시 몸 안으로 들어가자 현암은 기합성을 발하면서 태극패에 공력을 집중했다. 태극패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돌연 밝아지면서 푸른  불꽃은 전기에 감전 된  듯이 움찔하면서 파르르 떨었
다.

 "꺄아아악!!!"

 월향검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푸른 불꽃 덩어리로 쏘아져 나가서 정통으로 한 가운데를 꿰 뚫었다. 갑자기 푸른 불꽃이 순식간에 빛으로 화한듯, 폭발하듯한 섬광으로 방은 가득  메우더니 사라져버렸다. 연호와 연희는 창졸간
에 엄청난 빛이 눈에 들어오자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눈을 감은 연희의  귀에 털썩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정이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앙... 언니..오빠.. 모야아아아?? 아아앙..."

 연희는 힘겹게 눈을 떠서는  수정이의 침대로 갔다. 수정이가 무섭다는 듯이 몸에 안겨왔다.

 "언니이이... 나 무서운 꿈 꿨어..아아앙..."

 연호도 눈을 뜨고는 현암을 바라보았다. 현암은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채, 침대 머리맡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현암의 머리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는 거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수정이는 조금 칭얼거리다가 연희가 달래자 다시 잠이 들었지만 연희와 연호, 현암은 묵묵히 한참동안이나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한참의 침묵이 지나고 연호가 입을 열었다.

 "현암씨는 정말 놀라운 분이군요... 그런데 어떻게 저희의 일을.."

 "우연이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저는 누구에게 소개를 듣고 통역 일을 부탁하려고 여기에 왔었지요. 전화가 통 안돼서요..."

 그리고보니 연희는 어젯밤의 일을 겪고 오늘 영 뒤숭숭한 기분이 들어서 일 의뢰를 받지 않으려고 전화를  아예 뽑아 놓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연호가 끄덕거리는데 현암은 그냥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유체가 이 집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달려 온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너무 성격이 급해서 그만... 아까 실례 했다면 죄송합니다. 연희양..."

 연희는 아까 현암이 이상한 말을 하자 문을 그냥 닫아버린 것을 기억해 냈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정말... 그 때는 너무 놀라서.."

 "아닙니다. 당연한 것이죠...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서...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연호씨를 만나서 같이 온 거죠."

 연호가 아직도 좀 무서운 듯이 현암의 왼팔에 차여 있는 월향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 칼은 어떻게..  스스로 나르고 비명을 지릅니까? 저도 너무 놀라서..."

 "신경쓰지 마십시오.. 이 칼은  월향이라 하지요. 제 분신이나 다름없답니다..."

 "그런데 칼이 어떻게..으으으.."

 연호는 다시 몸을 움츠러뜨렸으나 현암은  그냥 약간 미소만 짓고는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연희가 다시 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아까 보았던 것은 뭐죠? 아까 유체..라는 말을 하셨는데.. 그것이었나요?"

 "예. 누군가... 전에  연희씨가 보셨다던 그 남자의  짓일 겁니다. 대단한 자 같더군요. 스스로의 의지와  영력으로 유체를 만들어내고, 그 유체로 뭔가 일을 꾸미는 것 같아요."

 "무슨 일을요? 그리고 그 유체라는 것은 귀신하고는? "

 "귀신은 아닙니다. 산 사람이나  다름 없어요. 육신만 갖지 않은 분신이라고나 할까요? 아까 연희씨가 묵주를  던졌어도 반응이 없던 것은 그 유체가 아직 살아있는 사람의 유체라는 증거입니다. 너무 겁먹지는 마세요. 상대는
분명 좀 특이한 능력이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니까요.."

 "예... 그러면 죽은 사람의 유체가 남아있을 수도 있나요?"

 "드물지만... 몇 년 정도는 가능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 유체를 백 이라고 여겨서 그 백이 묘소에  남아 후손들을 돌봐준다 믿었습니다. 그래서 풍수를 보고 치성을 드리고 했으니까요...  전통적인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랍
니다..."

 연희는 그래도 끔찍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궁금한 의문점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연희가 막 입을 열려는데 연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왜? 왜 수정이를 노리는 거죠?"

 "흠..."

 현암의 안색이 다소 침중해졌다. 그러나 곧 현암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수정이에게는 뭔가 특이한 능력이  잠재해 있습니다. 아까 저는 희미하게 보았죠. 수정이의 유체 말입니다. 둘로 나누어지려는.."

 "예?"

 연희는 기겁을 했고 연호도  안색이 변했다. 현암은 진정하라는 손짓을 하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염려하지 마세요. 수정이가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원래 잠을 자다가 유체가 잠시 몸을 떠나는  일은 자주 있어요. 그냥 산책하는 정도라고 여기시면 됩니다. 그러나.."

 연희와 연호는 유체가 몸을 떠난다는  것 자체를 처음 들은지라 소름이 끼쳤다. 현암의 확실한 안색을 보고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지만..

 "수정이의 영적인  능력은.. 글쎄요.. 제 생각으로는  그냥 약간의 자질이 있는 정도  같군요. 수정이는 물론 정상적인  아이입니다. 그리고 영력이란 건 누구나 약간 씩은 갖고  있는 것이니 이상하게 여기실 것 없고요.. 그러
나 그런 능력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구태여 들추어낼 필요는 없는데... 그 푸른 유체의 주인은 아마도... 수정이의 그런 능력을 뭔가에 이용하려는 것 같아요."

 "뭐에 이용하죠? 수정이는 그냥 어린 아이에요!"

 "저도 그건 모릅니다. 아무튼... 그 자가 좋지 않은 일을 꾸미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연희는 다시 그 남자의  얼굴을 (진짜 얼굴인지 유체의 얼굴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악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리고 지금 현암의 이야기를 듣고보니 그때도 마음만 먹었으면 수정이를 빼앗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냥 갔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또 왜 그리 사악한 수단을 쓰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남자를 좋게 볼 수만은 없었고 일단 그런  생각은 지워두기로 연희는 마음 먹었다. 충격적인 일들은 너무 많았다. 잠시  유체와 그런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현암은 화제를 돌렸다.

 "서연희씨에 대해서는 백호..씨에게  들었습니다. 놀랄만큼 다양한 언어에 통달하신 분이라 하더군요.  그래서 저희에게 꼭 도움이  될 거라는 소개를 들었지요.."

 "아.. 백호라면... 그 젊은 검사님?"

 "예... 이미 여러 번 중요한 일을 해 주셨다고 말씀들었습니다."

 "저야 뭘.. 그냥 단순히 통역을 해 드린 것 뿐이죠.."

 "겸손의 말씀을.. 10개 국어를 능란하게 하시는 분이 흔합니까? 그것도 각 언어의 고대어까지..."

 연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어학에 재질이 있고, 남들은 놀랄 일이었지만 심심풀이 삼아 12개 국어를 익혀 놓은 것은 (연희는 남에게는 10개 국어만 한다고 이야기했었다.)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바였지만 자신이
그 언어들의 고대어에도 재미를  느끼고 독학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현암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희는 이번에 백호씨와 함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러 나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상당히  비밀을 요하는 것이고, 또 언제 어느때에 생소한 언어나 문구 등에 마주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미 이런 일을 겪
으셨으니 구태여 어떤 일을 하는지 까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저보고 이런 일들을 하러 같이 해외로 가자는 건가요? 세상에..."

 연희는 기가 막혔다.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거기에 해외까지 같이 다니면서???

 "저는 그럴 수 없군요. 죄송합니다."

 2. 유체....(3)

 현암은 한 번 딱딱한 목소리로 연희의 도움을 요청했으나, 연희는 다소곳하지만 냉정한 태도로 거절했다.  너무 무서웠고, 여자의 몸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외국에까지 나가서 가이드 노릇을 해 준다는 것이 아무래도 탐탁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연희의 태도에 현암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일이 중요하더라도 본인의 의사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현암은 여겼으며, 사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코 앞에서 본 이상 더 이상  다른 이상한 일을 보고 싶지 않은 기분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지금의 연희는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거기에 현암 자신의 옛 기억도 조금씩 살아나자 현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오히려 연희 쪽에서 뭔가 현암의 얼굴에 떠오른 어두운 표정을 읽어내었다. 그런 표정은 아무에게서나  떠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거나 실망한  것이 아닌.. 연희는 뭔가  이 남자에게도 아픈 추억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곤란합니다. 부모님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고.."

 분위기가 묘해지는 것을 느낀 연호가 쐐기를 박았다. 현암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암도  묘한 기분이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일을 위해서는 연희의 어학  실력이 꼭 필요했지만 웬지 그 험한 일에 이 착해 보이는 아가씨를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자꾸 들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원래부터 조금 무리한 부탁이었겠지요. 그러면 없던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분을 알아보겠습니다."

 "저..."

 연희는 미안한 마음으로 현암을  쳐다보았다. 현암은 힐끗 연희의 눈동자를 보았다. 연희의 커다란  눈동자는 마치 검은 호수처럼 시선을 저절로 빨아들일 듯 깊었다. 갑자기 팔목쪽에서 월향이 꿈틀 하는 기색이 느껴지자 현암은 연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괜찮습니다. 연희양.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가  큰 신세를... 수정이는 현암씨 아니었으면.."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유체를 보낸 자는 아마도 오늘은 유체가 파괴되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었겠지요. 그러나 그 유체에는 은줄이 없었습니다. 그건 그 유체가 완전한 그 자의 유체가 아니라 본래의 유체에서 갈라낸.. 뭐랄까.. 엘리멘탈이나 염체의  성격을 띈 것이라 할 수 있죠. 그러니 그 자는 회복되는대로 다시 수정이를 노릴지도 모릅니다."

 연호와 연희는 다시 안색이 어두워졌다.  만약 그 자가 또 유체인지 염체인지를 보내어 수정이에게 해코지를 한다면 그건 누가 막는단 말인가? 그러나 현암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염려는 하지 마세요. 제가 다시 오지요. 제 동료 중에는 그런 것을 막을 수 있는  부적을 만들 수 있는 아이도 있고,  축복을 내려줄 수 있는 분도 계십니다. 일단 당분간은 조용할  터이니, 그 사이에 제가 그 사람들과 같이 오던지, 아니면 방법을 강구해서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쪽의 부탁도 받아드리지 않았는데..."

 현암은 간만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받고 주고.. 바꾸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고통을 받거나..."

 현암은 말을 하다말고 몸을 돌렸다.

 "너무 오랜시간 지체했군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이리로 연락을 주세요. 그러면 이만..."

 현암은 명함도 아닌, 종이쪽지에  갈겨쓴 전화번호 하나만을 탁자 위에 놓고 채 인사도 나누지 않고  훨훨 날듯이 문을 나섰다. 연희가 문을 다시 열고  빨리 나가보았으나 현암은  계단으로 내려갔는지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사라져 있었다.  연희는 두어층 계단을 내려가 보았으나 현암의 모습은 마치 귀신처럼 어느새 없어져 있었다. 연희는 다시 계단을 올라와 문을 들어섰다. 그러는 연희의 모습을 오히려 두 층 위로 올라간 계단 위에서 현암은 미소를 지으며  살짝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한 2-3일 간은 별 일 없을 것이라고 현암은 생각했다. 일단 박신부의 부상이 치료되면, 여럿의 힘을 같이 모아 완전히 그 자를 잡아낼 생각이었다.

 3. 자정.... (1)

 연호와 연희는 극도로 피곤해져서 바로 잠이 들었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수정이가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바람에 잠을 깨었다.  이미 오후가 되어 있었고 연호와 연희, 수정이는  하루종일 같이 지냈다. 뻐꾹시계는 이제 예전과 마찬가지로 돌아와 있었고  수정이도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천진하게 행동했다. 또 그렇게 하루의 낮이 지나갔다.

 밤이 되자 연호와 연희는 다시  불안해 졌다. 연희는 수정이와 같이 자기로 했고 연호는 좀 불편하더라도 마루 소파에서 자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연희와 연호 둘 다 머리맡에 전화를 끌어 놓고 여차하면 다시 현암이 알려  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기로 상의했다. 부모님께는 일단 알리지 않기로 상의 했고...

 하루종일 정신  없이 돌아다니는 수정이의 뒤를  쫓으며 연희는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있었다. 수정이를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재우다가 옷까지 그대로 입은 채 어느 덧 깜박 잠이 들었을까?

 품에 안겨있던 수정이가 몸을 뒤척이는 바람에 연희는 잠을 깨었다. 처음에는 눈을 번쩍 떴으나  사방은 조용할 뿐이었다. 연희는 수정이의 등을 조금 다독거려주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남자...유체... 알 수 없는 일들...

 연희는 다시 눈을  뜨고 자고 있는 수정이의  모습을 보았다. 유체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수정이는 단지 고요히  자고 있을 뿐이었다. 연희는 미소를 지으면서 몸을 옆으로 돌리려다가 그만 그 자세대로 얼어붙었다.

 분명히 그 남자의 모습이었다. 방의  저쪽 한 귀퉁이에 서서 뒷짐을 진 채 조용히 자신과 수정이를 바라보고 있는...

 연희는 너무나 놀라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남자와 연희는 그대로 눈이 딱 마주친 것이었다. 남자의 모습은 약간 투명하게 반대쪽이 비쳐보이는 것을 빼면 거의 보통 사람과 꼭 같았다. 약간의 미소를 띄고 있는 입, 그리고  장난스럽게 크게 뜬 눈이 오히려 연희의 공포감을 부추겼다.

 연희는 속으로 다짐했다. 침착하자.. 침착.. 소리를 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런 연희의  표정을 읽은 듯, 남자는  오히려 미소를 띄며 조용히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갖다 대었다. 조용히 하라는 듯, 그리고는 수정이 쪽을 가리키고는 설레설레 양 손을 저었다. 그 행동이 퍽이나 코믹해 보였으나 연희는 지금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마루에 연호오빠가 있고, 머리맡에는 전화기가 있었으나 그 남자의 모습도 바로 두발짝 건너에 있었다.

 소리를 지르면  안돼.. 안된다고 연희는 억지로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았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 도둑이 들었을 때 바로 소리를 지르면 도둑은 강도로 변한다. 막 도둑이  나가려고 문을 반 쯤 나섰을 때 소리를 치면 도둑은 그대로 달아나는  것이다. 지금 소리를 지르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아아... 그러면 어떻게..어떻게...

 연희는 슬며시 손을 움직여서  머리맡의 전화기를 잡으려 했다. 침착.. 침착해야한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남자의 눈은 그런 연희의 손끝을 미소를 지으면서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연희의 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연희 자신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저히 연희는 그 이상의 행동을  취할 수가 없었다. 눈에서 다시 눈물을 쏟을 듯 했다. 연희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 남자는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더니 슬픈 표정이 되는 것이었다.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웬지 그 남자가 무섭다는 생각이 다
시 옅어지는 것을 느꼈으나 그래도 두렵기는 여전했다.

 연희는 계속 그  남자를 원망스러운 듯이 쳐다  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점점 더 주눅이 든 표정이 되면서 점점 조그맣게 몸을 오그리고 있었다. 아니, 몸을 오그리는 것이 아니라 몸 자체가 난장이 처럼 작아지고 있었다. 연희는 그  와중에도 웬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몸은 점점 자그맣게 변해서 수정이 정도의 크기로까지 줄어 들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씨익 미소를 짓더니 다시 확 커져서 거의 천장에 닿을 듯 커지는 것이었다. 연희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마트면 소리를 칠 뻔 했으나 이상하게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남자는 다시 본래의 크기로 돌아오더니 장난기가  철철 흐르는 표정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작별인사라고 연희는 생각했다. 그러더니 남자의 모습은 다시 푸른 불꽃으로 변하면서 꺼지듯이 사라져 갔다.

 한참동안이나 연희는 망연하게 남자가  있던 벽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무섭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아아.. 저건 귀신이다.  이건 도대체가... 잠시나마 자신이 그 남자와  같이 장난을 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내가 어쩌다가 그랬을까?  아니, 내가 꿈을 꾼  것이 아닐까? 헛것을 본 것이 아닐까? 아냐.. 연희는 후다닥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러갔다. 그러나...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 남자가 다시 와서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다가  자신과 장난을 쳤다고? 그리고  자신이 째려 보니 빠이빠이를  하면서 사라졌다고?  이건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도대체... 연희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수화기를 다시 내려 놓았다. 조금 더 두고보아야 할 것  같았다. 웬지 모르게 연희의  뇌리에 그 남자의 웃는 얼굴의 모습이 엇갈려 지나가고 있었다. 연희는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아까 수정이의 유체를 잔인하게 빼앗아가려던 자가 저렇게 장난만  치고 가버렸을 리가 없다.  꿈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 꿈.. 헛것을 본 거겠지...  이상하게 피곤해졌다. 연희는 스스로도 모르는 새에 다시  잠이 들고 있었다. 마루에서  뻐꾹시계가 우는 소리가 한 번, 마치 산속 깊은 곳에서 우는 것처럼 들려왔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간 밤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수정이는 여전히 깔깔 거리면서 뛰어 다녔다. 연호도 밀린 일 때문에 다시 나갔고... 오빠인 연호에게 어제의  일을 이야기 할까 하다가 연희는 웬지 모르게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전날 겪은 일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닌  일이었으니까... 현암에게서도 아직은  연락이 없었다. 괜히 현암에게도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연희는 당분간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냥 지내기로 마음 먹었다.

3. 자정...(2)

 며칠이 지났다. 현암은 웬지 연희의 집으로 다시 간다는 일이 쑥스럽게 여겨졌지만 준후가 만들어 준 부적을 가지고 서씨 일가를 방문 했다.
 준후가 만들어준 부적은 몽몽결의 구절을 응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것을 지니고 있으면 몸에서 유체가 벗어나지  않게 하는 힘을 지닌 것이라 했다. 거기서는 이상한 기운이 좀 느껴져서 그래도 보통 사람보다는 좀 나은 능력의 현암에게도 희미하게는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그 때에는 연희가 지방에 계신 부모님에게 내려가 있었던 때여서 연호가 현암을 맞이 했다. 현암은 연호에게 별 일이 없느냐고 물었고 연호는 요즈음은 평온하다고 이야기했다.  수정이도 아무 일 없이 잘 놀고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연호는 현암에게 조금만  있으면 수정이는 자기
부모들이 해외여행에서 돌아오므로 그리로  갈 것이라고 알려 주었고 현암은 준후의 부적을 조그맣게  접어서 수정이에게 지니고 다니게 하라고 알려 주고는 집을 나섰다. 웬지 연희의 커다랗고 검은 눈동자가 눈 앞에 아른거리는듯 생각났으나 잠시의 일이었다. 그 다음에 다시 며칠이 지났고 그동안에 현암은 서씨 일가에서 일어났던 일을 접어둔 채로 박신부의 간호를 하는 한편 공력을 수련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연호에게서 한 번 아무 일 없다는 전화가 걸려왔고 승희를 시켜서 수정이에 대해 투시를 해보라고 했으나 승희도  수정이에게서 별다른 이상한 점은 알아내지 못했다. 현암은 조금 미심쩍은 면은 있었으나 그냥 그 알 수 없는 남자가 스스로 보낸  유체가 파괴되자 겁을 먹거나  타격을 입어서 포기한 것으로 생각했다. 박신부와도 상의를 했는데 박신부의 말에 의하면 현암이 파괴한 것은 유체라기보다는 염체에 가까운 것일 거라는 말만을 하면서 그런 염체를 만들려면 퍽  오래 걸리는 법이니 그래도 주의를 늦추지 말라는 말만을 남겼다. 그리고  준후는 현암에게 안명부를 몇 개 만들어 주었다. 지난번처럼 힘들여서  유체를 보느라고 공력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현암이 마지막으로  연락을 받은지 한 4-5일이  더 지나서였다. 현암이 혼자 아지트를 지키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현암씨...??"

 수화기에서 울리는 것은 연희의  목소리였다. 퍽 다급하고 울음기가 섞인 듯한 목소리였다.

 "예. 연희씨..?"

 "맞아요... 아아... 어떻게 하나요..."

 연희의 목소리는 이제 울음이 섞여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벌어진 것이라고 현암은 순간적으로 단정지었다.

 "무슨 일이지요? 말씀을.."

 "수정이가... 아아.. 내일이면 부모님께 가는데... 수정이가..."

 현암은 충격을 받았다. 수정이에게  분명 부적을 만들어 전해 주었었는데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수정이가요? 천천히 말씀 하세요! 무슨 일입니까?"

 "수정이가.. 아아... 그  유체가... 아니.. 그럴리가 없..아니아니..아아 도와주세요! 제발요!"

 더 이상 말을 해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현암은 조금만 침착하게 기다리라는 말만을 남기고 재빨리 태극패와 월향검, 그리고 준후가 만들어 주었던 안명부를 챙겨 들고  일어섰다. 시간은 저녁때였고 막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창 밖의 날씨는  금방이라도 비가 몰아쳐 내릴 듯 저녁하늘이 시커먼  구름으로 덮여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준후와 승희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으나 하필 그들은  모두 박신부의 병원으로 막 출발한 때였다. 나중에 연락해야겠다 생각하고는 현암은 일단 문을 나섰다.


 현암이 연희의 집에 도착하였을때  연희는 거의 멍한 상태에서 이미 한참을 울었던 듯  눈이 부은 채로 문을  열어 주었다. 현암은 다짜고짜로 물었다.

 "수정이가 어떻게 된 거죠? 무슨 일입니까?"

 연희는 채 말을 잇지 못하면서 마루의 큰 유리창을 가리켰다. 유리창은 산산히 박살이  나있었고 커튼만이 마구 휘날리고  있었다. 창 밖에서는 천둥소리가 울리면서 갑자기 폭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현암은 대강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정이는 전번처럼 유체의 힘에 의해 납치된 것이 틀림 없었다. 현암은 천진하던 수정이의 모습을 되돌려 생각해 보았다.

 "부적은요? 수정이가 갖고 있지 않았습니까?"

 "모..모르겠어요... 아아.. 모두 제 탓.. 제 탓이에요..."

 현암은 준후의 부적이 무력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현암은 수정이의 방문을 열고 안을 살펴 보았다. 준후의 부적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기운은 수정이의 침대 머리맡에 놓인 줄달린 작은 주머니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아마도 연호가  부적을 주머니에 넣어서 수정이의 목에 걸어 주었던 것 같았고, 수정이가 오늘은 그것을 깜박 잊고 걸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현암은 안타깝게 고개를 저으면서 부적이 들은 주머니를 무심코 손에 쥐었다.

 "아아... 제가 조금 더 경계를 했어야 하는데..."

 "아아.. 아니에요..아아아..."

 연희는 그만 다시 울음을 터뜨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모두가 제 탓이에요... 아아... 그 남자.. 그남자가.."

 "예? 그 남자라뇨? "

 "아아... 제가 속은 거에요. 그러나... 그러나 믿었었는데.."

 현암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믿다니?

 "말씀하세요! 연희씨! 무슨 말입니까?"

 연희는 계속 눈물을  폭포수처럼 흘리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남자... 그 남자는 매일 밤 연희를 찾아왔었다. 수정이가 아니라... 연희를...


 떠듬떠듬 이어지는 연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현암 자신도 일에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현암은 연호가 어디갔는냐고  물었으나 연호는 마침 부모님을 뵈러 밤차를 타고  있을 시각이라고 했다. 연희가 서서히 말문을 열기  시작하자 현암도 놀라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현암이 찾아왔던 바로 그 다음날부터 그 이름 모를 남자는 매일 밤 연희의 방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무서웠어요... 그 남자가 제 방 구석에 서서... 가만히 저를 바라보고 있었죠... 그 눈빛... 그러나... "

 그러나 그 남자는 전혀 연희나 수정이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가만히 서서 장난기 섞인 평안한 눈빛으로 연희를 바라보다가 연희가 잠을 깨어 남자가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장난 스러운 몸짓으로 안녕인사를 하고는 사라져 갔다는 것이다.

 " 처음에는 몇 번이나  현암씨에게 전화를 드리려고 했어요. 그러나 그 남자가 별다른 해를 끼친 것도 없고 해서 저 혼자의 착각이나 꿈인 것으로 믿었죠.. 아아..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며칠 동안 그런 일이 반복되자,  연희는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남자가 무섭다기보다는 미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연희는 용기를 내어 그 남자에게 말을 걸고 제발  사라져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너무도 측은한 모습으로 연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테니 미워하지만 말아달라고 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행여  수정이가 깰까봐 조심스럽게... 아아, 그 남자는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 제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기까지 했어요..."

 현암은 말없이  연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이 아가씨가 제  정신인가? 하는 말이 몇 번이나 치솟아 올라왔으나 일단은 연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겠다고 마음먹었다.

 "고민이라뇨?"

 "그 남자의 과거...  그런데도... 그런데도 이런 짓을... 그 말은 모두 거짓이었을까요? 모두가 지어낸 말이었다는 건가요? 아아..."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그  남자의 어린 시절.. 그리고 불행했던 과거의 이야기는  절실했다. 남과 다른 능력을  나면서부터 타고난 사람.. 그러나 오히려 그  능력때문에 남에게 따돌림 받고  배척 받는.. 현암도 그 기분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서커스의 동물을 보듯 자신의 공력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  자신들이 일을 할 때에  그 얼마나 조심을 해야만 했던가? 대부분의 작은 일들의 경우, 그들은 물리치는 영들보다도 그 능력을 본 사람들의  무분별한 호기심과 더 힘겹게  싸워야 했고 자신들이 구해준 사람들을 오히려 두려워  하고 피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신이 얻은 능력때문에 파문까지 당하고 교단에서 배척받는  박신부,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  슬슬 피하는 따돌림을 당하거나 재주 한 번 보여  달라고 너무나 졸림을 당하여 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게 된 준후, 남의  마음을 읽는 능력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을 피하게 된 승희... 그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몸에서 유체를 자유로이 분리시키고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능력... 그로 인해 그 남자는  어린 시절에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서까지 버림을 받고 해외로 거의 강제로 입양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자신도 모르게 능력을 발휘하게 되고...

 "가엾은 사람이에요... 그 능력... 잠이  들어 꿈만 꾸어도 그 힘은 저절로 발휘된다는 거에요. 보고 싶은 사람에게 저절로 찾아가게 되고..."

 현암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미 그  남자의 힘은 남자 자신의 마음으로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단계에 온 것이 분명했다. 힘을 가지면 그 힘을 사용하고  싶어지는 것이었고, 그 힘을 사용하다보면 그 힘에 오히려 자신이 얽매이게 되는 법이었다.

 "아아... 가련했어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남자는 솔직히 내게 말했죠.. 자신이 나를 매일 찾는 것은 이제 자신도 어찌 할 수 없다고요.. 그래서.. 그래서  그 남자는 매일 밤마다 내게 왔었어요.. 매일.. 자정만 되면..."

 현암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 아가씨는 어느새 그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틀림없었다. 세상에!! 그리고 연희 스스로도 그 남자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 남자는 결국  수정이를 데려갔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요..."

 "그러지 않겠다고 했는데... 절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도 그 남자를 믿는다는 말입니까?"

 "아아..모르겠어요! 그 남자는 원래 블랙써클 이라는 곳의 명령으로 자질이 있는 아이들을..."

 갑자기 현암은 흠칫하면서 몸을 떨었다. 블랙써클? 그건 지난번 좀비들을 부리던 호웅간이 무의식 중에 내 뱉은..

 "잠깐만요! 연희씨! 그 남자가 블랙써클이라는 말을 했단 말입니까? 또 다른 말은 없었나요?"

 "그냥... 그  이야기만... 그러나 이제는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고... 남에게 아무 피해도 주지 않겠다고 저와 약속을..."

 "아아!! 연희씨!! 블랙써클!! 저도 그 단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때문에 우리가 외국까지 나가려 하는 거에요! 블랙써클에 속해 있는 자라니!!"

 "그러나.. 그 남자는..."

 "블랙써클이 어떤 곳인지 아세요?  오, 물론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그곳에 있었다는 주술사와 한 번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아아... 이거 정말 큰일이군요! 그곳은 정말 엄청난..."

 연희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을 했다. 현암은 지금 불같이 성질이 달아올라 있었다. 지금의  사건을 일으키는 이 남자의 영적 능력도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마저도 블랙써클이라는 곳과 연관이 있다니!

 "그 남자는  분명 악인입니다! 간사한  말로 연희씨를  속인 것이 틀림없.."

 "아니에요!"

 갑자기 연희가 고함을 쳤다.  현암은 눈썹을 찡그렸다. 연희는 그 검고 큰 눈에 눈물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  사람의 눈은 맑았어요... 거짓말이 아니었어요... 그 사람의 말은... 절대로..."

 현암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히려 자신이 연희의 믿음에 눌리는 듯 하기까지 했다. 연희의 눈이 눈물에 젖어 더욱 빛나고 있었다. 현암 자신의 눈매는 원래가 날카로와서 사람들에게  쏘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했으나 연희의 눈과 마주 대하자 자신의  시선이 그대로 빨려 들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냉냉한 현암마저도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을만큼 그 눈매에는 선량함과 깊은 안온함이 있었다.

 "믿어요... 분명히... 나는.. 나는.."

 현암은 마음을 다잡아  먹고 간신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세요! 수정이는 분명 유체에게 통째로 들려서 납치되었습니다. 그 남자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아아... 그러나..."

 연희의 고개가 다시 숙여지며  다시 어깨가 들먹거리기 시작했다. 현암은 왈칵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간신히 억제했다. 연희에게서는 믿을수 없을 정도의 선량함이 배어나오고 있어서 마음을 돌같이 굳힌 현암마저도 뭉클하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구나... 이렇게 선량하고 똑똑한 아가씨가...'

그러면서 현암은 이런 여자를 속인 그 악랄한 자를 용서하기 싫다는 기분마저도 들었다. 현암은 승희에게  연락할 까 하다가 아예 자신이 박신부가 입원한 병원으로 찾아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제가 추적하겠습니다. 제 친구의  힘을 빌리면 됩니다. 반드시 수정이를 찾아오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잠시만요!"

 "예?"

 현암이 돌아보자 어떤 결심을  한 듯 싸늘한 기운이 비추어지는 연희의 얼굴이 보였다.

 "제가... 그 남자가 있는 곳을 알아요..."

 현암은 연희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연희는 애써 냉정한 표정을 취하고 있었으나, 고통의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자신의 믿음이 배신당한 것에 대한 복수의 감정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현암은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잃어버린 수정이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었다면 연희가 말을 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를 납치하면서 자신이 숨은 곳을 밝힌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듯 했다.

 "어떻게 알았죠?"

 "그 남자의 이야기로요... 저와 같이 가요. "

 "연희씨도요? 안됩니다. 위험한 일이에요. 그 남자의 힘이 어떤지는 보셨지 않습니까?"

 "꼭... 가고 싶어요. 제발요! 안그러면 저는 그 곳을 알려주지 않을 거에요!"

 "그 남자가 정말 그곳에 있을지 확신도 없잖습니까?"

 "분명 그 곳에 있어요! 틀림 없어요!"

 연희의 눈이 다시 현암을 향하자 현암은 연희의 말이 맞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아무  근거없는 생각이었지만, 연희의 눈빛에서 현암은 확신 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승희에게 찾아가면 정확하게 찾을 수 있고 준후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었고 지금 연희와  가면 시간은 단축할 수  있었지만 혼자 싸워야 한다.

 "좋아요.. 갑시다."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3. 자정...(3)


 이제 연희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차에 올라탄 다음, 길을 묻는 현암에게 방향만을 손짓으로  일러 줄 뿐, 더 이상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현암은 연희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운전을 하면서도 간간이 연희의 표정을 살폈다. 연희의 눈은  슬픔과 같은 기색으로 흐려졌다가 또 싸늘하게 굳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현암은 속으로 한숨을 지었다.

 '저 아가씨는 그 남자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었구나.. 저런..'

 현암의 마음 속에도 알 수  없는 연민의 감정이 떠 올랐다. 매일 밤 벽을 뚫고 들어오는  유체와의 사랑이라니... 그러나 현암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제 아무리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종잡을 수가 없다고는 하지만, 동생을 납치하려고  했고 끔찍하고 무서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서 그렇게 빨리 정을 느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현암은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릴 수는 없었지만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연희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떠 올리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블랙써클과 연관이 있다면 아직 잘알지는 못해도 분명 악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는 자일텐데... 저 선량한 아가씨가 어쩌다가...

 연희가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키자 현암은 다시 제 정신이 들었다. 다시 연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현암은 차를 모는데 그리고 보니 지금껏 차를 달려 온 것은 가까운  거리였는데도 연희가 지시하는 방향은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게 되어있어서 마치 빙빙 돌아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방향이 맞습니까?"

 연희는 다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제 연희의 얼굴은 마치 조각으로 바뀐 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얼굴은 무표정해져 있었다.

 "금방 올 수 있는데도 계속 작은 길로 가는 이유가 뭡니까? 혹시.."

 "금방 찾을 수 있어요..."

 연희가 조용히 말했다. 현암은 좀 불만스러웠지만 하는 수 없이 계속 연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현암의  표정이 좀 불만스러운 듯이 보이자 연희가 슬쩍 차갑게 웃었다.

 "제가 길을 괜히 도는 것 같은 가요? 저를 못 믿나요? 후후.."

 "아닙니다. 믿지요. 그러나..."

 현암은 연희의 웃음소리에 뭔가 철렁한 느낌을 받았다. 그 웃음은 너무도 처절하게 들렸다. 믿음..믿음이라...

 "그래요.. 저도 믿어요. 믿고 있지요. 지금도.."

 연희가 잠시 말을 끊었다. 현암은 연희의 감정이 위험할 정도로 증폭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으나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저도 그 남자가 어디 있는지 정확한 위치는 몰라요. 다만.. 전에 한 번 내게 보여주었어요..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의 쓸쓸한 모습을... 그 남자는 나를 믿었던 거에요."

 "그런데.. 보여 주었다고요?"

 "그 사람은 못 만들어내는 것이 없어요. 환영이랄까? 신기루랄까요? 후후..."

 잠시 연희는 쓸쓸히 웃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힘이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니,아니.. 그렇지 않았으면 만날 수도 없었지... 하여간.."

 연희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는 그 남자가 만들어낸 영상  속에서 그 건물을 본 적이 있어요. 그리고 그 뒷산에 넘어가는 저녁 노을.."

 현암이 눈썹을 찡그렸다.

 "저녁 노을?"

 저녁노을을 방 안에서 보여줄 수 있다는 말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건..

 "예.. 저녁노을요.. 붉게  넘어가는 저녁노을.. 나는 보았어요. 그건.. 마치.."

 현암은 혹시 연희의 유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남자와 함께 빠져 나간 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그 남자는 매일 자정에 연희에게 찾아왔다고  하지 않는가? 노을이 질 시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유체..라고 했던가요? 아무튼 연기  같은 것이 방에 퍼지고... 그리고 나면 모든 것이 거기에 비추어졌어요. 자신의 어린 시절... 그리고 기억에 남은 광경들..."

 현암조차도 믿기가 어려웠다. 연희의 말이 정말이라면, 그 남자는 자신의 유체를 스크린처럼 펼쳐서 자신의 기억을 거기에 투사해 내는 능력까지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생각해보니 영능력자들 중에는 자신이 본 것을 사진필름에 그대로 찍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많았고, 그 남자 정도의 능력이라면 자신의 유체를 이용하여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했다. 연희는 다시 지나간 며칠동안의 추억에 잠기는 듯, 시선을 위로 향한 채 중얼거렸다.

 "해지는 모습.. 무심한  군중들.. 그러나 그 안에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자신이 숨어있는 건물 너머로 매일같이 오고가는 사람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속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건 완전한 바깥의 세상.. 자신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그래서.. 그 사람은... 그리고 나는.."

 연희의 말을 들으며 현암은 숙연한  기분을 느꼈다. 힘을 가진 자의 고독이라고나 할까? 현암도 동감할 수 있는 기분이었다. 연희도 그런 기분을 느꼈을까? 10개 분야의 언어에 통달한 언어학의 천재... 현암이 백호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연희는 조용하지만 무척 까다롭게 일을 고른다고 했다. 물론  현암이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연희의  일을 잘 맡지 않는 습관도 그런 심정의 발로였을까?  현암은 다시 연희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했으나 연희는 다시 냉정을 찾아가는 듯, 중얼거림을 맺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저 산... 그  부근이에요. 이제... 이제는 곧 보일 것 같군요... 수정이를... 구해야 해요..."

 연희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나지막한 산이 검게 서있었고 그 앞에는 낡아서 곧 허물어질 것 같은 건물 한 채가 서 있었다. 유리창들이 깨어져 나간 퀭한 창문들이 곳곳에 금이 가고 낡은 벽에 박혀 있어서 마치 빤히 응시하는 듯이 보였다.  연희의 얼굴이 더욱더 밀랍처럼 희게 되었고 표정은 오히려  이상하게 상기되어 거의 미소 띈 얼굴이 되어갔다.

 "저 산..  어둡죠? 그러나 그때는.. 아름다웠어요.. 저녁 노을과 그리고... 그리고..."

 비록 내색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연희의 마음 속은 지금 여러 가지의 착잡한 생각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을 현암은 눈치챌 수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좋아하게  된 남자, 그에 대한 마음, 그리고 귀여운 동생 수정이의 납치, 그에  대한 분노, 그리고 배신당한 것에 대한 슬픔...연희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묘한 힘이 있었고 지금이 거의 절정일 것 같았다. 현암의  마음도 이 아가씨를 위해 무엇이든 해 주어야 한다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타고난, 그리고 때묻지 않은 선량함...

 " 저 건물도... 한때는 새 것이었겠죠? 깨끗하고.. 흠 간데 없는..그러나..."

 현암은 더 이상 참고 들을  수가 없었다. 이 여자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현암은 결심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저 곳입니까? 연희씨?"

 현암은 나직하게 연희에게 물어보았다. 현암도 저 곳이 그 남자가 은신하는 곳이라는 사실은 눈치채고 있었다. 이미 현암은 준후에게서 얻은 안명부를 사용했고 희미한 영기가 텅 비었음직한 건물에서 흘러 나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연희에게서 대답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하나의 승낙을  받는 것이었다. 연희의 흰 얼굴이 정말 더 이상 희어질 수 없으리 만치 희게  변하면서 오히려 연희는 멍한 듯한 환한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저 곳이에요..."

 현암은 더 이상 연희의 얼굴을  쳐다 볼 수가 없었다. 멍하니 앉아있는 연희를 차에 남겨 둔 채, 현암은 입술을 깨물고 빠른 걸음걸이로 건물로 들어섰다. 현암의 왼팔에서 월향이 조용히 울었다.


 4. 결투...(1)


 건물 안은 정말 몹시도  어두웠고 보수를 하려다가 포기 했던듯 쓰레기며 건축자재들이 사방에 흐트러져 있어서  한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현암은 잠시 침침한  어둠속을 안명부로 주술을 건 눈에 힘을 주면서 둘러 보았다. 영기..  사방에 영기가 느껴졌다. 현암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현암에게 당한 뒤 경계를 하기 위해서 쳐 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영기가 느껴지는 장벽 같은 것이 건물의 초입을 가로막고 있었다. 진세같은  것은 아니었고 단순히 매복 정도라고나 할까? 현암은 코웃음을 쳤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솟아 올라왔다. 비록 현암 자신과 관계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리도 선량한 여자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농락한, 그리고  어린아이를 강제로 납치한 자...

 현암은 여동생인 현아를 잃은 뒤부터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특히 여성에게 몹쓸 짓을 하는 자들에 대해 매우 화를 잘 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더욱 노기가 치미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맞닥뜨리게 될 그 자는 연희라는 여인의 마음에까지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었으니...

 현암은 싸늘한 얼굴로 뚜벅뚜벅 걸었다.  갑자기 한 편에 있던 빈 드럼통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쭈욱 저절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밀려 왔다. 경고의 표시일까? 현암이  다시 눈에 기운을 집중하고 보니 희미한 염체가 드럼통 뒤에 붙어  조종을 하는 듯 했다. 박신부의 말에 의하면 그 자가  만들어내는 것은 직접 자신의  유체를 분리시키는 유체와 사념의 힘으로 별도로 응결시킨 염체가 있다고 했다. 아마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염체들인 듯  했다. 현암은 위협하듯 밀려오는 드럼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오른손을 뻗어 드럼통을  막고 '폭(爆)'자 결로 공력을 오른손에 집중시켰다. 태극기공의 18자 구결 중에서도 너무 난폭해서 잘 사용하지 않던 술수였다.

 쾅!

 드럼통은 현암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움푹 찌그러지면서 부서져서 조각을 날렸다. 드럼통에 스며있던 작은 유체의 기운이 같이 사그러져 가는 것을  현암은 언뜻 보면서 코웃음을 치고는 나직하게 소리를 질렀다.

 "나와라...!!"

 현암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면서 빈 건물 안에 메아리치자 그에 응답하듯이 영기를 띈 유체가 곳곳에 흩어져 숨어들어갔다. 현암은 냉소를 머금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사방에 널려있던 나무토막이며 망가진 자재들이 꿈틀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암은 여전히 까딱도 않고 있었지만 내심 적수의 능력에 경탄을 했다. 영도 아니고 자신이 만들어낸 염체만을 운용하여, 그것도 이렇게  강한 염체들을 만들어 물리력까지 쓰게 한다는 것은 거의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법이었다.

 갑자기 녹슬은 철근 한가닥이  뱀처럼 허공중에 부웅 소리를 내면서 달려 들었다. 현암이 오른손에 공력을 집중시키면서 철근을 그대로 맨팔로 잡자 철근은 쇳소리를 내면서  현암의 오른팔에 감겨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염체 하나하나의 힘은 보통 사람 한명의 힘만도 못한 것 같았다. 현암은 재차 팔에 감긴 철근을 그대로 휘둘러서 반대쪽에서 날아오는 나무토막들을 후려 갈겼다. 와장창 소리를 내면서  나무토막들은 철근에 부딪히면서 저쪽 구석에 가서 쳐박혔다.

 "언제까지 장난할 셈이냐?"

 현암은 팔에 감긴 철근에 힘을 주어 떨쳐 버리고는 다시 산산히 흩어지는 염체들의 단편에  눈을 돌렸다. 염체들은 이제  계단 께에 있는 철제 사다리에 한데 뭉치고 있었다.  그러자 녹슨 철제 사다리가 갑자기 생명을 얻은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개로 접어진 사다리가 접혀졌다 펴졌다 하면서 마치 네 발 동물이 달려 오듯 다가오는 모습은 보통 사람이라면 거의 기절할 정도로 흉악했다.

 현암은 오른손으로  태극패를 꺼내며 기합을 넣으면서 왼팔을 뻗었다. 그러자 익숙한 귀곡성을 울리면서 월향이 쏘아져 나갔다. 월향은 똑바로 사다리의 중심부에 엉켜 있는 염체의 더미를 향했고 현암은 거기에 다시 공력을 집중한 태극패를 비추었다. 염체를 묶어두는 것이었다.

 펑!!!

 월향에 정통으로 꿰뚫린 염체들은  허공 중에 폭죽과 같은 빛을 내면서 순식간에 무화(無化) 되어 갔고 사다리가 두 쪽으로 갈라진 채 양쪽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쓰러져 버렸다.

 현암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비록 아무것도 아닌 염체들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공력을 낭비한다면 계속 상대하기는 힘들었다. 돌아온 월향을 받아쥐어 다시 왼  손에 꽂고 현암은 후다닥  계단을 올라섰다. 위쪽 층이 더 영기가 짙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현암의 마음 속에서 근래에 드물었던 호기가 일었다. 현암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이건 고대의 결투와 비슷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려라... 일대일로 상대해 주마...'

 연희는 현암의 차 안에서  서서히 반쯤 넋이 나가있던 상태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건물 안에서  뭔가가 부서지고 깨어지는 듯한 소리들이 울려퍼지고 있어서 더 정신이 금방  든 것인지도 몰랐다. 뭔지 모를 몽상 같은 기억들 속에서 연희는 자신이  왜 그 이름도 모르는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하는 이유를  떠 올렸던 것 같았다.  물론 그 남자는 연희에게 친절했고, 많은 놀랍고 신기한 재주들을 보여 주기도 했고, 어린아이 같은 감춰진 순진한 마음을 연희에게 모두 열어 보였다. 그러나.. 이제 그 남자는 자신의 믿음과 마음을 저버리고  자신의 동생을 납치 해 간 악한이었다. 도대체 그 짧은, 며칠  되지 않은 나날들 사이에 연희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쏠리게 된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연희는 미처 현암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에 떠 올렸다. 양쪽 가지가 닳아 없어진 낡고 자그마한 구리 십자가... 그건 그 남자의 유일한 선물이었고 그 남자의 단 하나의 소유물이기도 했다.

 '내 모든 좋은 기억은 거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나같은 놈을 믿어주다니... 받아 주세요.'

 연희는 그 작은 십자가- 이미  십자가라고 하기도 뭣한 막대기 같은 것이었지만 - 를 꽉 쥐었다. 그 남자는 진실하다고 연희는 생각했었다. 그 남자에게 호감이 갈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는 없었고, 연희의 눈에 그 남자의 진실은 엄청난 크기로 다가왔었다. 연희는 천성적으로 진실을 외면하지 못했다. 자신도 진정으로 그 남자와 이야기 했고, 설득하려 했으며, 그 남자가 마음을 돌렸다는  것을 믿었다. 물론 둘 사이에는 아무런 접촉도 없었고 아무런 특별한 표현도 없었지만 연희는 그 남자를 믿고 있었고, 그 남자도 그렇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끝이었다. 그 남자는 원래가 그런 사람이었을까? 연희는 다시 낡아서 허물어져가는 건물로 눈을 다시 돌렸다. 이 건물도 원래는...

 연희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그 남자를 다시 미워하는 척 하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그 남자에게 호의를 계속 가질 수도  없었다. 연희는 차문을 열고 나섰다. 이제 싸우는 소리는 위쪽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고, 연희가 건물을 들어서자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싸움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잠시 밖에 보지 못햇지만, 저 현암이라는 남자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었고, 아무  이유없이 자신을 위해 저렇게 힘들게 싸워주고 있었다. 연희는 자신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십자가... 연희는 조용히  그 닳은 십자가를 한 번 다시 만져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도로 돌려 주어야 해...'

 아직도 연희는 그 남자가 그 십자가를 자신에게 주면서 했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니  돌려 주어야 했다. 그의 좋은 기억의 한 편린이라도 다시 되살려주고  이별을 고하는 것이 연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것 같았다.  위층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 같은 것이 길게 들려왔다.다시 위층으로 올라가는 현암의  앞길에 두 가닥의 염체가 뱀처럼 도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 개의 염체는 서로 배배꼬이면서 마치 협박하듯이 현암 쪽으로 끄덕거렸다. 이미 현암은 4개나 되는 염체들을 분해시켜버리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염체는 순수한 사념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했는데  이렇게까지 기묘하고 자유자재로  힘을 발휘하는 염체들은 아직까지 들어 본 일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정도에 겁을 먹을 현암도 아니었지만...

 "비켜라.."

 현암은 마음과 함께 목소리로 앞을 막고 있는 염체에게 말했다. 말했다기 보다는 의사표현을 한 것이었다. 염체는 애당초 만들어질 때 만든 자의 생각을 그대로 담고 있었고, 이 염체 또한 앞에 현암이 겪은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역할을 하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말로 타이르려 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암이 태극패를 쥔 손에  힘을 주자 염체들은 재빠르게 옆으로 갈라지면서 검은 색으로 바뀌어갔다. 염체의 색은 그 염체가 만들어질 때의 의도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놈들은 매우 악독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두 가닥의 염체는 실처럼 가는 수백가닥의 긴 줄 모양으로 바뀌면서 마치 회오리 바람처럼 현암의  둘레를 휘감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분명 머리가 되는 부분이 있을 텐데 너무 빨리 염체가 주변을 도는 바람에 현암은 중요한 부분을 찾을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아무데나 공력을 집중할 수는 없었다. 그 남자의  능력은 이런 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었으니 공력을 아껴 두어야 했다.

 주변을 돌던 염체 들이 갑자기 일제히 현암의 쪽으로 짓쳐들어왔다. 현암은 할 수 없이 자신도 몸을 한바퀴 돌리면서 태극기공의 18자 구결 중에 '단(斷)'자 결을 응용하여 오른손에 들고 있던 태극패를 그대로 그어갔다. 태극패에서 섬광이 비쳐  나오면서 현암이 몸을 돌리는 데에 따라 소용돌이 모양의 빛줄기가 허공에 그어졌다.

 현암에게 쳐들어오던 염체들이  파파팍 소리를 내면서 허공에서 어지럽게 폭발하여  기화 되어갔다. 대부분의 염체가  사라졌으나 역시 시커먼 기운을 띈 좀 굵어보이는 염체 한가닥이 빙그르르 돌면서 현암의 머리 위로 솟구쳐 갔다. 현암은 몸을  돌리던 자세 그대로 왼 손을 위로 뻗었다.

 "꺄아아악!"

 다시 한 번 월향의 울부짖음이 들리면서 현암의 머리 위에서 팍 하면서 불 빛이 번쩍했고 월향은 다시 호선을 그리면서 돌아와 현암의 왼손으로 들어갔다. 월향도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현암이 돌아가던 몸을 가볍게 멈추고 다시 기수식의 자세로 계단을 등 뒤로 돌리고 서서 심호흡을 한  번 하는데 위쪽에서 한 줄기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

 조금 톤이 높은, 장난스러운 듯한 갸날픈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훌륭합니다... 하하..."

 현암은 고개를 돌리고 나직하게 소리쳤다.

 "이리 내려와라..."

 위쪽의 목소리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어조로 들려왔다.

 "아니아니, 누추하더라도 이곳의 주인은 나니깐. 손님이 올라오시지요.. 하하"

 "무슨 수작을 부려도 소용없다. 이제는..."

 "하하하하... 나를 그렇게 잡아 먹고 싶은가요? 하여간 올라오세요. 밤바람이 상쾌 하답니다... 하하"

 현암은 도대체 저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죄우간 내려오지 않겠다면 이쪽에서 올라가는 수 밖에 없었다. 현암은 성큼 계단 위로 한 걸음 올라서기 시작했다.


 4. 결투...(2)

  위층에서 폭죽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펑펑 들려오고 전에 보았던 칼의 비명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연희는 서둘러서 윗 층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주춤하고 자리에 멈추어 섰다. 두려웠다. 무슨 일인지 이미 벌어지고 싸움이 끝난 것일까? 연희는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그 남자와 현암의 모습을 번갈아 떠올렸다. 그러자 두 명의 남자가 각기 알 수 없는  이상한 방법으로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다가 피를 흘리고 쓰러진 환영이 머릿속에 떠 올랐다.

 "아아... 그건.. 그건..."

 서둘렀어야 하는데 하고 연희는 생각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수정이는 구해진  것일까? 아아, 어쩌면 그 남자는 수정이에게 다른 짓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현암이 쓰러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 차갑고 냉막하고 무뚝뚝했지만 항상 의연하고 믿음직할  것 같은, 그리고 자신의 부탁이 거절당했는데도 아무런 댓가도 없이 목숨을 걸고 싸워준 사람. 그리고 그 남자... 아무리 마음을 차갑게 굳히려 해도 연희는 그 남자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용서한다거나 홀려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남자를 이해
할 수가 있었기에 가련하다고 느끼는 것인지도... 남자가 현암에게 맞아서 쓰러져 있는 광경도 다시 뇌리에 떠올랐다. 아니, 그 무서운 칼로 두토막이 났을지도...

 마음은 급한데도 연희는 계단을  올라갈 수 없었다. 아니, 도리어 연희는 몸을 떨면서 뒷걸음질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다시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아.. 이것이  아니었어... 이러지 않았어야  하는데... 내가.. 내가 나빴어...'

 연희는 자기 혼자 이곳을 찾아왔어도 그 남자가 선선히 수정이를 도로 내어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현암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 때문에 둘이 싸우게 되었고 지금 조용한 것을 보니 둘 다 아니, 어느 한쪽은 죽었거나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만약.. 만약 그렇다면...

 연희는 눈을 감고  다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연희의 큰 눈에서는 다시 맑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한 연희의 아랫쪽 계단에서 한줄기의 검은 염체가 엉겨가고 있는 것을 연희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현암은 마지막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곳은 옥상이었다. 오층 건물의 옥상. 그 주변 가까이에 불이 켜져 있는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만이 거세게  불고 언제부터인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멀리서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옥상의 저너머에 무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현암은 비를 맞으며 몇 발자국 앞으로 나서서 나직히 말했다.

 "네가 장본인이지? 바로 그..."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번갯불이 번쩍하면서 곧이어 천둥소리가 우르르 울려왓다. 남자는 피식피식 맥 없이 웃는듯, 어깨를 흔들거렸다.

 "전에 보았던 그 분이군요. 대단하십니다. 정말..."

 현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조용히 공력을 모으면서 말했다. 얼굴로 머리칼을 모두 적신 빗물이 줄줄줄 흘러내렸다.

 "블랙써클의 하수인, 그리고 철 없는 아이의 납치범. 그리고... 연희씨를.."

 말을 이으려다가 현암은 그만 두었다. 사실 연희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공연한 짓 같아서였다. 남자는 연희의 이름이 나오자 움찔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평범해  보이는 용모였으나 어울리지 않게  눈이 크고 맑은듯이 보였다.

 "연희씨..? 그래.. 연희씨가 이 곳을 가르쳐 주었군.."

 현암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다시 입을 열었다.

 "블랙써클은 무엇이지? 도대체 어떤 일을 꾸미고 있지?"

 그러나 남자는 그 말은 대꾸도 하지 않고 고통스러운 듯이 웃을 뿐이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럴거야... 물론 그랬겠지.. 언제나 처럼.. 나는 항상 그래왔었지.. 항상.."

 "블랙 써클은 무엇이지?"

 갑자기 남자가 하늘을 보면서 와하하하 큰 소리로 웃어댔다. 갑자기 남자의 몸에서 세 가닥의 푸른 불줄기 같은 것이 뻗어 나왔다. 이번의 것은 분명 단순히 만들어낸 염체가 아닌 남자 자신의 유체였다. 유체는 몸에서 은줄로 연결되어있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이 유체는 은줄이 아닌 그냥 길게 늘어진 형태로 연결되어 있었다. 안명부로 주술력을 싣고 있는 현암의 눈이 화끈해 질 정도로 거센 기세였다. 세 가닥의 기운은 허공을 미친듯이 떠돌며 솟다가 서로 엉키고 허공에 왕관 같은 모양을 만들어 내었다. 의아해서 현암이 가만히  쳐다보니 그 왕관 모양은 하트의 형태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하트의 빛이 갑자기 붉게 변하는 듯 하더니 퍽 하면서 산산히 부서져서 다시 허공에 거대한 손 모양을 만들어갔다. 현암이 흥 하면서 코웃음을 치자  남자가 다시 이상하게 뒤틀린 듯한 목소리로 킬킬거리면서 말했다.

 "유치하지...? 그래..  나는 유치한  놈이지... 모두들  그러더군.. 나는.. 나는 말이야... 사실  허공에 수놓는 무늬를 만들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했지.. 이렇게... 하하하..."

 "블랙 써클은 무엇이지?"

 현암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태도로 남자의 말을 묵살하고 다시 물었다. 남자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급할 것 없지 않은가? 그렇게 나를 잡아 먹고 싶나? 흠흠... 아니, 내가 그렇게 쉽게 이야기 해줄 줄 알았나?"

 "마지막으로 묻겠다. 블랙써클은 무엇이지?"

 "하하하... 복수의  단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단체! 미움과 증오의 단체! 재창조의 단체! 이거면 됐나? 푸하하하"

 남자는 크게 소리를 지르다가 갑자기 번득이는 눈으로 현암을 노려보았다.

 "연희씨를 불러줘."

 "그게 다인가?"

 "아니면.... 너는 내 손에  죽는다. 연희씨가 보낸 사람일지라도... 묻고 싶은 것이 있으니 어서 불러... 어서!!"

 "블랙써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남자는 대꾸하지 않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자 두 줄기의 유체가 뿜어져 나와서 현암에게 덮쳐 들었다. 그런데 현암은 한 줄기의 유체의 방향이 약간 자신에게서 빗나가 있는 것을 알아챘다. 틀림없이 한 가닥은 이곳을 빠져 나가 연희에게  가려고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암은 왼팔을 뻗어 월향검을  떨쳐 내면서 무섭게 닥쳐드는  한 줄기의 유체를 공력을 실은 오른손의 태극패로 막아 내었다.

 굉음과 함께 두 줄기의  힘이 맞부닥치자 보이지 않는 폭발이 일어나면서 현암은 뒤로  몸을 휘청하면서 꺾었고 남자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꿈틀 하면서 몇 발자국을  비틀거렸다. 월향검은 다른 한 줄기의 유체의 앞길로 날아가면서 귀곡성을 지르자 유체는 꿈틀 하면서 다시 뒤로 돌아 남자의 몸으로 되돌아갔다. 현암은 온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유체라고 해서 아까 상대한 염체보다 조금 강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부딪혀보니 거의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강한 힘이었고 충격도 컸다. 그러나 상대도 비슷한 타격을 입었을 것 같았다. 현암은 재빨리 기운을 조절하면서 선수를 쳐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블랙써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

 "집요하구나. 너는..! 연..연희..."

 남자는 말을 하다말고  울컥 입에서 피같은 것을  흘렸다. 아까 현암과 맞부딪히면서 유체의 한가닥이 소실되어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 현암은 한 걸음을 내디디면서 다시 물었다.

 "수정이를 알지? 그 아이에게..."

 "인제 그 이야긴 그만햇!!"

 남자는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몸에서 다섯가닥의 유체를 쏘아냈다. 거의 이판사판인 듯 했다.  현암도 화가 치밀어 올라 월향을 빼들었다. 귀곡성과 함께 우우웅 소리를 내면서 시퍼런 검기가 주욱 뻗어 나왔다.

 "뉘우친다면 어서..."

 "더 이상 뭘 어쩌라는 말이냥!!!"

 남자는 악에 받친 듯한 소리를 지르고는 양 팔을 좍 뻗었다. 갑자기 다섯 줄기의 유체가 풍선 처럼 부풀어 오르면서 두 줄기는 현암 위의 허공으로, 두 줄기는 현암의 양  옆으로, 그리고 마지막 한 줄기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발 밑으로  스며들어갔다. 현암은 의아했으나 일단 머리 위로 덮쳐드는 두 줄기의 유체를 향해 월향을 휘둘렀다. 두 줄기의 유체는 마치 불꽃 놀이를 하는 것처럼  검기가 닿기 전에 확하고 가늘게 퍼졌으나 현암의 검기는 그 쏘아지는 기운으로  직접 닿지 않은 유체들의 가는 자락까지 후두둑 잘라 버렸다. 잘라진 유체들은 다시 팍팍하며 플래쉬같이 어지러운 불꽃을 남기면서 사라져 갔다. 그러나 현암의 옆구리를 향해서도 두 가닥의 유체가 달려  들고 있었다. 현암은 몸을 비틀려 했으나 갑자기 발 밑이 출렁 하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피하지 못했다. 아까 숨어
들었던 한가닥의 유체의 짓이었다.

 퍼퍽!!

 현암은 양 옆구리에 마치 쇠망치  같은 타격이 오는 것을 느꼈다. 입에서 저절로 크윽 하는 숨이  새어나오는 것을 느끼면서 현암은 손에 들고 있던 월향을 아래를 향해  내리 찔렀다. 검기가 콘크리트 바닥에 박히면서 번쩍하는 섬광을 내고 멀쩡한 콘크리트가 폭발하여 움푹 패인 자국을 만들었다. 바닥으로 숨어 들었던 유체가 정통으로 파괴되자 그에 연결되었던 두 가닥의 유체마저도  공중에서 부르르 떨었다. 현암은 중심을 잃고 쿵 하고 쓰러지면서 남자의 몸도 같이 넘어지는 것을 보았다. 현암은 그 짧은 사이에도 허공중에 끝이  잘려서 멎어 있는 한가닥의 유체를 향해 월향검을 날렸다. 다시  허공 중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일어나면서 남자의 몸은 넘어지면서도  다시 펄쩍하고 꺾였다.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현암은 일단 우당탕 나가 떨어지면서도 다시 몸을 굴려 재빨리 몸을 일으켜 반쯤 앉은 자세를 취했다. 비록 두 가닥의 유체를 산화시켜 큰 타격을 주기는 했지만 현암의  타격도 몹시 컸다. 공력으로 몸을 보호하는데도 유체는 현암의 몸 속으로 일부분이 투과해 들어가 직접 몸 속에 충격을 준 것 같았다. 아마  보통 사람같았으면 즉사했을 것이다. 다시 돌아오는 월향검을 손에 받아  들고는 현암도 울컥 피를 토했다. 월향검의 느낌도 좋지 않았다. 검으로  치는 순간에 유체가 너무 격렬하게 폭발하여 월향의 혼도 충격을 받는 것 같았다.

 현암이 한 번 심호흡을 하는  동안 남자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는 사이 연희가 옥상에 발을 디디며 올라오다가 움찔했다. 현암과 남자 모두가 비에 젖은 얼굴에다가 입가에 선혈을 흘리고 있어서 그야말로 참담해 보였다. 신음소리 같은 것이 연희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그만해요! 그만!!!"

 현암은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않았으나 남자는 연희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억지로 미소를 띄는 듯 했다.

 "연..연희씨..!!"

 "그만해요! 그만! 제발 그만둬요! 제발! "

 "연..연희씨.. 내.. 내가 그렇게도..."

 연희의 눈이 현암을 향했다. 현암은 침중히 말을 않고 공력을 운행하고 있었으나 연희의 눈에는  현암이 훨씬 극심한 상처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만둬요! 내게서 떠나요! 어서! 어서!"

 연희는 소리치면서 들고 있던 닳은 십자가를 던질 듯 하다가 남자의 쪽으로 내밀었다.

 "이젠... 제발...수정이를..."

 "으아아아아아아!!!"

 갑자기 남자의  입에서 광폭한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푸른 기운이 열 두개나 솟아 나왔다. 분노라고 할까? 아무튼 흥분한 것 같았다. 엄청난 기운이 훅하고 덮쳐오는 것을  느낀 현암은 공력을 운행하다 말고 번쩍 눈을 뜨면서 연희 쪽으로 몸을 날려 앞을 막아섰다.

 "조심해요! 저 자는.. 지금.."

 현암은 저 남자가 필생의 힘을 다 쓰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유체를 여러가닥으로 분할 한다는것은 한꺼번에 수십배의 힘을 당겨서 쓰는 것과 같았다.  열 두개로 유체를 나눈다는 것은 거의 목숨을 건 일 같았다. 현암은  연희의 손에 들린 십자가를 보지 못했고 따라서 저 남자가 연희가 손을 내밀자 갑자기 흥분하는 것을 현암은 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왜? 왜? 왜?"

 남자의 유체들은 놀랍게도 각각이 소리를 지르면서 허공중에서 점차 형태를 갖추어 엉겨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 남자 자신의 형상이었다. 삽시간에 열 두명의  남자로 불어난 듯 했고  열두명의 남자들은 모두 왜? 라는 소리를 지르면서 현암과 연희 쪽으로 덮쳐 들었다.

 현암조차도 경악을 금할 수 없었고 그 많은 수를 미처 대적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지난번  강화도에서 대선사 묘운의 영이 분신술을 쓰는 것과 대적할 때의 기억이 떠 올랐다.

 "부동심결!!"

 현암은 연희의 앞으로 재빨리 몸을 내밀며 월향을 허공에 던지고 양 손을 합장하듯 마주 붙였다. 열 둘의 유체가 무서운 기세로 덮쳐드는 것과 동시에 현암의 몸에서는 황금색 광채가 마치 태양 빛처럼 폭발되어 나왔다.

5. 그녀를 위하여...(1)

 현암의 몸에서 폭발처럼 솟아나온  광채에 연희는 얼결에 눈을 감았다. 채 연희는 보지 못했지만,  부동심결의 발휘로 쏟아져 나온 광채는 사방을 가득메우고 달려들던 남자의 유체는 마치 눈사람처럼 그 빛에 휩쓸려 허물어져 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 아니면 감추어진 듯, 오로지 밝은 빛만이 사방을 메꾸고 있었다.

 갑자기 천둥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는 바람에 연희는 눈을 떴다. 연희의 눈 앞에는 그 남자가 멍하니 마치 허수아비와 같은 몰골로 서 있었고 열 두개의 분신들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현암은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채, 처음의  자세 그대로 뻣뻣하게 서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냥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사이에서 생명을 걸고 전력을 다해 싸웠던 두 사람은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연희는 뭐라고 할 말을 잊고  있었다. 그렇게도 밝은 빛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눈은 부시지 않았다. 연희는 문득 자신이 손에 쥐고 있었던 닳은 십자가의 감촉을 다시 손에  느낄 수 있었다. 연희는  서서히 마치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그 남자의 쪽으로 다가갔다.  남자의 몸은 마치 그 잠깐 사이에 오그라든 것처럼 삽시간에 앙상해져  있었고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었으나
그 눈에는 이미 번뜩이는 분노나 흥분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마치고 난 것  같은 안도감과 이유모를 슬픔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 남자의 눈에 흘러 내리고  있는 것은 빗물이 아닌 눈물이었다는 것을 연희는 느낄 수 있었다. 연희의 목에서 흐느낌 소리가 배어 나왔다.

 "아아.. 왜.. 왜 이렇게까지..."

 남자는 선 채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 같았다. 남자의 시선만이 조용히, 그러나 몹시 힘겹게 움직여서 연희의 손을 향했다. 거기에 들려있는 닳은 십자가... 연희는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를 쳤다.

 "왜..? 도대체.. 왜?"

 현암이 간신히 눈을  떴다. 계속 쏟아져서 찬  기운으로 몸을 식혀주는 비가 아니었더라면 현암은 기혈이 들끓어서 혼절했을 것이었으나 다행히 간신히 정신은 차릴 수 있었다. 현암은 안간힘을 다해 말했다.

 "이제... 수정이를... 내 놓으시오..."

 연희도 소리쳤다.

 "아아.. 왜 그랬나요? 수정이를 왜.. 도대체 왜!!!"

 남자의 몸이 갑자기 짚단처럼  허물어져 땅에 맥없이 쓰러졌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남자의 눈에 스쳐가는 당혹과 놀라움의 표정을 연희는 읽을 수 있었다. 그건... 아니.. 만약 그렇다면..

 "당..당신이 한 짓이 아니었나요? 그렇다면 대체 누가 수정이를..!!"

 남자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현암도 놀라서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현암이 앞으로 풀썩 무릎을 꿇으면서 동시에 외쳤다.

 "아니.. 그러면.."

 "케..케이..케이인..."

 남자의 입에서 힘겨운 목소리가  꾸르륵 거리면서 흘러 나왔다. 연희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다시 냉정을 찾았다. 연희는 다시 물었다.

 "케인? 사람 이름인가요?"

 남자가 힘없이 눈만을 위 아래로 움직였다. 그렇다는 표시였다. 연희는 냉정하게 사태를 판별하려 애썼다.  케인.. 케인.. 외국인 의 이름 같았다. 누굴까? 그렇다면 케인 이라는  그 자가 수정이를 납치해 간 사람이란 말인가? 이 남자는 여지껏  아무와도 알고 지내는 사람이 없다 했다. 그러나.. 이 남자가 속해 있는 곳이라면 단 하나..

 "블랙써클의 사람인가요?  그렇다면 그 사람도 당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남자의 눈이 슬프게 허공을 향하면서  눈을 위 아래로 떴다. 연희는 미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제 삼의 인물이 있었다는 말인가? 이 남자와 같은 능력을 가진,  그리고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그렇다면 이 남자는 단순히 예전에 수정이를 납치하려 했던 일만을 염두에 두고 추궁받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고.. 모든 것은 오해였다. 연희는 가슴속으로부터 슬픔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오해에 의해서 일어난 일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아아... 내가 나빠요.. 믿지 못하고...믿지 못하고.."

 현암이 주춤거리면서 힘겹게 다가왔다.  현암도 연희의 말을 듣고 사태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현암도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 그 남자는 채 말할 기력도 없는 듯 했다. 남자는 현암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마치 시합에서 깨끗이 진 자가 약간은  쑥스럽고 멋적어서 느끼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현암은 남자의 등에  손을 대고 이를 악물며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끌어 모아 남자의 몸에  밀어 넣었다. 남자의 입에서 다소 숨을 돌린 듯한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아..하아.. 그.. 그 것.. 받..받아..."

 연희는 남자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연희의 손에 들려 있던 닳은 십자가... 남자의  눈은 다시 어린아이가 친구의 눈을 가릴 때와 같은 장난기와 기대감이 어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받..을 거죠?..."

연희는 간신히 미소를 짓고 다시 그 십자가를 꼭 쥐면서 말했다.

 "소중히 간직할께요... 소중히.."

 남자가 웃는 얼굴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현암은 공력을 있는대로 운행하여 부동심결을 사용한 후,  다시 남자에게 힘을 밀어 넣어주자 머리 속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수정이는 찾아야만 했다.

 "그러면 수정이는? 누가 그랬는지 말해 주게..."

 "케인... 나와 비슷한 자라면.. 케.."

 남자는 말을 잇다 말고 갑자기 놀라는 소리를 내면서 연희를 옆으로 휙 잡아 당겼다. 현암도 남자의 등  뒤에 있던 참이라 미처 어떤 수를 쓰지 못했다. 연희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한  덩어리의 검은 염체가 날아 들어 남자의 가슴을 쳤고  남자는 뒤에 있던 현암과 한꺼번에 뒤로 주르르륵 밀려났다. 놀란  연희가 몸을 일으켜서 뒤  쪽을 보자, 옥상의 입구로 비쩍 마르고 검은 옷을 입은 외국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서히 걸어 올라왔다.

 "케...케인!..."

 남자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소리쳤다. 외국인 남자는 싸늘하게 웃으면서 손을 위로 치켜들자 그의 등 뒤로 검은 색 염체들이 무더기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자의 입에서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의 빠른 외국어가 흘러 나왔다. 현암은 한마디도 알아 들을 수 없었으나, 연희는 그 말의 내용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희안하게도 이들은 에스페란토 어를 쓰고 있었다.

 "배신자... 너는  블랙 써클의 명령을 어기고 우리가 원하는 아이들을 모으라는 사명을 저버렸다...  애당초 마스터(Master)는 너를 믿지 않았어... 너의 장난기 많고 소심한 성격이 일을 그르치게 할 것이라 생각하시고... 그래서  나를 같이  파견하여 너를 감시하게  한 것이지...후후후.."

 연희의 머릿속에 과거의 일이 갑자기 봇물처럼 떠 오르면서 의심스러웠던 부분들이 비로소 모두 해결 되는 듯 했다. 맨 처음 남자가 그냥 수정이를 놔두고 사라진 후, 바로 수정이의 유체를 끌어당겼던 것은 바로 케인의 짓이었던 것이다. 유체를 자유롭게 운용할 줄 아는 사람이 이 남자 뿐이었던 것으로 믿은 연희는 후에 남자에게 수정이를 왜 데려가려느냐고 물었으나, 그 남자는  아마도 자신이 처음에 수정이를 몸채 데려가려 했던 일을 연희와  현암이 이야기 하는 것으로  오해 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오늘 비로소 수정이를 다시 몸 채로 데려간 것도 케인의 짓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 남자는 왜 현암과 싸우는 것을 피하지 않았을까? 연희가  자신과 대적할 사람을 데리고 와서 자신을 쫓아버리려 한 것으로 믿었고 그래서 목숨을 거는 듯이 싸웠단 말인가?

 현암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모양이었으나  너무 강한 충격을 받았는지 채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남자의 입에서도 빠른 에스페란토 어가 흘러 나왔다. 연희가 그 말을 알아듣는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들의 억양은 매우 특수하게  단련이 되었는지 속도가 매우  빠르고 악센트가 거의 없이 흐르는 듯 하여 연희도 알아듣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럼.. 네가 수정이를 납치한  것인가? 나는... 나는 그것도 모르고.. 매일 밤 찾아가는 내가 귀찮거나  두려워서 나를 쫓아내려 저들이 온 것으로..."

 "흐흐흐... 네 놈의 능력은  마스터도 인정했듯이 나보다도 한 수 위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는 매우 강한 자들이 많더군.. 내내 관찰 했었다. 바보 같은 놈... 네가 가진 그런 엄청난 힘을 너는 쓰잘데 없는 환영을 허공에 그리고 장난감 같은  염체들을 만들어 노는 데에만 낭비했지? 너는 스스로 가진 힘을 낭비하는 죄를 지은 거야. 거기다가 마스터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저따위 여자에게 홀려서 일을 그르쳐? 흐흐흐...내 작전은 성공했지... 흐흐흐.. 두  놈이 서로 싸워서 내 손에 모두 죽게 되었으니.. 하나는 배신의 처벌이고, 또 하나는 블랙써클 진출에 방해가 될 자
를 미리 제거 하는 것이다. 흐흐흐흐.. 하하하핫!!"

 남자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돌며 눈썹이 위로 쫙 찢어졌다.

 "저 따위.. 여자??"

 케인은 대꾸하지 않고 흉한 목소리로 웃으면서 검은 염체들을 쏘아냈고 이를 본 현암이 일단 입술을  깨물고는 월향을 파사신검 제 사식으로 둥글게 던져 내었다.  월향의 기운도 많이 빠져 있었으나, 그래도 월향은 귀곡성을 내고 허공에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면서 회오리처럼 돌아서 날아오는 염체들과 부딪혀 나갔다.

 "꺄아아악~"

 허공 중에서 불꽃놀이처럼 월향의 검기에 휩쓸린 염체들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중의 몇 개는 마치 세포분열을 하듯이 갈라져서 현암에게로 짓쳐 들었고 두 가닥의  검은 염체는 연희를 향하여 달려 들었다. 쓰러져 있는 남자는 연희 쪽으로 염체가 뱀처럼 날아가는 것을 보고는 입을 벌려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이미 극심한 상처를 입은 몸은 움직여 지지  않는 것 같았다. 현암은 몸에 남아있던 진기를 그나마 끌어  올려서 염체들에 몸으로 부딪히면서  연희 쪽으로 달려가려 했으나, 몸에 부딪혀 오는 염체들의 힘은 생각보다도 강했다. 현암은 마음과는 달리 채 연희가 있는 곳까지 가지 못하고 염체 들에게 밀려서 우당탕 구석으로 나가  떨어졌다. 월향은 아직도 염체의 무리들과 공중전을 벌이는라 여념이 없었고..

 연희는 눈을 똑바로 뜨고  다가오는 염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케인이라는 그 남자를... 케인은  연희가 두려움 없이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웬지 켕기고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인정사정도 없는 케인이 단순한 보통의 여자인 연희와 눈이 마주치는 것에 왜 저리 당황하는지 알 수 없었다. 케인의 입에서 이를 가는 듯한 소리로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심연의 눈... 망할.. 그래서 저 놈도 홀린 거구나.."
 
 케인이 연희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자 두 가닥의 염체가 아슬아슬 하게 연희를 피해 지나갔다. 연희는 케인이 왜 자신을 심연의 눈.. 이라 하는지는 몰랐으나 지금 현암과 남자 둘이다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연희의 입에서도 에스페란토 어가 흘러 나왔다.

 "내 동생을 돌려 줘..."

 주춤거리던 케인이 다시 자세를 추스리면서 악을 썼다.

 "내가 정말로 너까짓 것을 두려워 하는줄 아느냐? 하하핫!!!"

 케인이 소리를 치자 남아  있던 염체들의 무리가 일제히 연희의 쪽으로 향해갔다. 그러나 쓰러졌던 현암이 간신히 손짓을 하자 월향이 날아왔다. 일부의 염체들은 월향에  의해 가로막혔으나 아직도 몇 개의 염체들은 연희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현암으로서도 더  힘을 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때...

 푸른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형상을 한 유체가 길게 번쩍이는 은선을 이은 채 연희의 앞을 막아섰다. 유체는 날아드는 염체들을 향해 손을 뻗었고, 오히려 염체들은 유체의  속으로 삼켜지듯이 흡수 되어갔다. 케인의 입에서 어억 하는 의문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연희는 영력이 모자라 자신의 앞을 막아선 유체를 눈으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뭔가 친숙한 느낌을 그 유체에게서 받았다. 그건 분명 그 남자의 기운이었다. 연희는 뭐라고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이번에 나타난 남자의 유체에서는 뭔가 결연하고 엄숙한 듯한 기운이 있었다. 생명을 건 듯한..

 "아아.... 당신은.."

 안명부의 효력이 아직 남아있는  현암의 눈에는 모든 정황이 또렷이 보였다. 남자의 몸은 이제 거의  미이라같이 마른 채 쓰러져 있었고, 이번에 남자의 몸에서 뻗어 나온  것은 아까처럼 길게 늘어난 형태의 유체가 아닌, 은줄로 몸과 연결 되어 있는 유체였다. 분신이 아닌 남자 그 자신의 순수한 유체임에 틀림없었고  연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에너지를 모두 쏟아서 나온 것임이 분명했다. 현암도 뭔가 뭉클한 생각이 들었다. 저 상태로까지 육체를 쇠잔하게 해서 유체를 끌어내어 힘을 쓴다면, 거의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남자의 순수 유체에게 달려들던  염체들은 그 즉시로 남자의 유체로 녹아 들어갔다. 순수한 사념의 에너지로만 만들어진 염체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을 그 남자는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고 케인이 만들어진 염체들은 맥없이 남자의 유체 앞에서 흐트러지고 있었다.

 "야아아아아아앗---!!!"

 케인의 스스로의 염체들이 없어지자 분노의 고함을 지르면서 눈을 감고 땅에 털썩 주저 앉았다.  케인의 몸에서도 회색빛의 음울한 유체가 분리되어 나왔다. 케인이 저 이름모를 남자에 비해서 약간 능력은 떨어지는 듯, 몸의 정신을 유지한 채  유체의 분신은 만들 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이 유체의 기세만은  아까 현암과 싸우던 남자에  못하지 않게 기세등등 했다.

5. 그녀를 위하여...(2)

 막상 유체들끼리의 싸움이  벌어지려하자 현암은 기운이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끼어 보려고 했으나 현암의 쓰러진 몸을 향하여 케인의 남아있던 염체들이 우르르 쏟아져 오기 시작했다. 귀곡성을 울리면서 월향검이 다시 현암의 쪽으로 날아왔으나 이미 현암의 공력을 주입받은지 오래 되어서인지 아니면 계속  폭발되는 염체들과의 싸움에서 충격을 입었는지 월향의 기세도 신통하지 않았다. 월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암의 몸 주위로 닥쳐드는  염체들과 공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현암도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공력을 끌어모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케인과 남자의 두 유체는 허공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아무리 유체여도 중상을 입고 쓰러져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쪽이 불리할 것은 자명했으나, 남자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케인이 다시 빠른 에스페란토 어로 말하는 것을 연희는 들었다.

 "바보같은 놈... 너는 이제 목숨까지 걸고 저 여자를 지켜 주려는 것인가? 그리고, 위대한 블랙써클의 명령마저 거스르고 이젠 나와 대적까지? 죽는 것이 두렵지 않으냐?"

 "내 행동은 내가 좋을 대로 하는 것이다. 블랙써클이니 뭐니 애당초 내가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그들의 요청에  의해서 였다. 그러나 아무도 내 편은 아니다. 아무도..."

 남자의 유체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막아주고 있는 연희를 향해 맑은 눈으로 미소를 보낸 남자는 잠시 연희에게 속삭였다.

 "어서 피해요. 그리고 수정이를 찾아보세요. 놈은 어떤 호텔에 묵고 있을 테니 도움을 받아 조사하시면 될  거에요. 아직 별 일은 없을겁니다.."

 "싫어요! 당신은...아아.."

 "어서 가요. 염려 말아요. 지지 않겠다고 약속할께요. 있으면 내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남자는 말을 잇다가 말고  푸른 광채를 몸에서 뿜어내면서 몸을 움츠렸다. 앞쪽에서 케인이 문어발같은 촉수를  만들어서 뻗어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그 회색의 촉수들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몸에서 불꽃을 일으키면서 맞받았다.

 "어서 가요!"

 연희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으면 정말  그 남자가 마음대로 싸울 수 없을  것 같았다. 방금도 분명 남자는  그냥 피할 수 있었지만, 뒤에 있는 연희가  맞을까봐 자신이 몸으로 케인의 공격을 받아낸 것이 틀림없었다. 저쪽에서는 현암이 꼼짝도 하지 못하는 듯 앉아있었고, 잘 보이지 않는 검은 덩어리들과 은빛의 칼이 무섭게 허공에서 엉켜 싸우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런 처지에  있는 두 사람을 버려두고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연희는 거의 발을 동동 구르다시피 하면서 주변을 둘러 보다가  저만치에 앉아 있는 케인의 몸을 보고는 한가지 생각을 떠 올렸다...

 "지지 말아요! 꼭!!!"

 연희는 남자의 유체에 한 마디를 남기고 남자가 주었던 십자가를 한 번 꺼내 보인다음 계단 쪽으로 서둘러 뛰어갔다. 남자는 비로소 만족한 듯, 오므렸던 유체를 넓게 펴면서 푸른 불꽃을 사방에 흩뿌렸다. 케인의 회색빛 유체도 지지않고 남자의 유체를 덮치려는 듯 하다가 다시 방향을 돌려 연희를 뒤쫓으려 했다. 그러나 남자의 푸른 유체는 종이처럼 넓게 퍼져가면서 케인의 유체를 온통 둘러 싸버렸다.

 허공중에서 두개의 유체가 뒤엉켜 싸우는 동안에 연희의 모습은 문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남자의 유체가 힘이 빠진 듯 펑 하면서 뒤로 밀려났다. 한 때  밝았던 푸른 빛은 힘을 다 소모했는지 하늘색으로 엷어져 있었다. 케인의 회색 유체가 분노한 듯 서서히 몸을 폈다.

 현암은 펑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 공력은 하나도 끌어모으지 못했으나 사태가 급박해지는듯  해서 더 이상 모른체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염체들은 거의 다 월향이 처치한 후였으나 월향은 이제 너무도 기진맥진한 듯, 금방이라도 땅으로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현암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을 내밀었고 월향은 희미하게 소리를 지르면서 현암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현암은 오른 손으로 월향을 잡은 채 왼손의 식지 끝을 이빨로 힘껏 깨물었다.

 케인의 회색 유체는 분노의 눈으로 남자의 거의 사라질 듯한 유체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이제 거의 체념한 듯이 보였다. 케인의 양 손부분에서 이글거리는 자주색 불덩어리 같은  것이 맺혀갔다. 불의 염체인 듯 싶었다. 남자의 유체는 이제는 다시 돌아갈 기력도 없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막 케인의 유체가 불의 염체를 내 쏘려는 순간, 유체가 갑자기 출렁하면서 흔들렸다. 케인의 유체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뒤쪽에 있는 자신의 몸으로 눈을 돌렸다.

 연희였다. 연희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척 하다가 계단 가의 창문을 넘어 옥상의 뒤쪽으로 다가온 것이고 저 쪽에서 아무 힘 없이 앉아 있는 케인의 몸을 밀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이곳은 5층의 옥상이었다. 아마도 케인의 몸을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면 케인의 유체도 온전할 리가 없었다.

 "캬아아악!!"

 케인의 유체는  분노의 고함을 지르면서 불덩어리의 염체를 연희 쪽을 향해 내 쏘려 했으나 그러나 어느 새 남자의유체가 날아와 케인의 팔에 엉겨 붙었다. 자주색 염체는 케인의 손에 들린 채 폭발해 버렸고 남자의 유체와 케인의 유체는 서로 충격을 받은 듯 뒤로 한참을 물러섰다. 그러나 케인은 나머지의 한 개의 염체를 다시 연희를 향해 던져 내었다.

 현암은 월향에 피를 먹이는 최후의 방법을 쓰고 있었으나 연희가 급해진 것을 보고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한 번만 더 버텨다오!'

 현암은 월향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날아가는 염체를 향해 월향을 내 쏘았다. 월향은 다시 휘청거리는 듯 하면서도 놓치지 않고 염체를 향해 날아가 박혔다.

 허공중에 다시 불덩어리같은 폭발이  일어났다. 이번만은 더 버티기 어려웠는지 월향은 더 이상 날지 못하고 튕겨져 나와 근처의 벽에 푹 박힌채 칼자루를 부르르 떨었다. 연희는 이를 악물고 케인의 몸을 옥상의 가에까지 밀어내고 있었다. 케인의 유체는 비명 같은 것을 지르면서 연희의 쪽으로 다가갔으나 연희는 기합소리 같은 것을 지르면서 케인의 몸을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고 케인의 유체는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연희는 뒤로 털썩 주저 앉았다. 자신이 사람을 해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건  정당방위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옥상 너머로 케인의 몸이 쑥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연희는 비명을 질렀다.

 현암도 놀라서 그 쪽을 보았다. 케인의 몸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가만보니 케인의 유체가 재빠르게 케인의 몸을 받아 든 것이었다. 케인의 유체는 몹시 힘겹게 자신의 몸을 들어올리는 듯 싶었으나 그 눈길에는 차가운  조소와 분노의 기색이 역력했다. 연희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했다. 더 이상은... 어쩔 수가...

 남자의 유체는 남자의 쓰러진 몸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이제 완전히 탈진하여 몸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분명했고 월향검도 벽에 박힌 채 날을 빼내지 못하고 있었다.  현암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른 손만이 간신히... 그러나 도저히 케인과 맞서 싸울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아..!!!'

 현암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준후가 만들어주었던 부적... 수정이에게 걸어주라고 연호에게 남겨주었다가 무심히 주머니에 넣고 온 부적.. 부적을  그려주면서 하던 준후의 말이 떠 올랐다.

 '이건 몸에서 유체가 분리되지 않도록 해 주는 부적이에요...'

 '그래! 몸! 유체!!!'

 더 이상 겨를이 없었다. 케인의 유체는 자신의 몸을 지고 있는 힘을 다해 위로 올라오고  있었고, 이제 조금만 있으면  케인의 몸을 도로 올려 놓을 것 같았다. 현암은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오른 손으로 부적을 꺼내 들고 있는 힘을 다해 케인의 몸을 향해 집어 던졌다.

 "아아아아악!!!!!"

 부적이 몸에 닿자 케인의 유체는  비명을 지르면서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은 허공중이었고, 받쳐주던 유체가 케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자 케인의 몸은 마치 돌덩어리처럼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고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희는 놀라서 난간 너머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케인의 몸은 땅에 공사를 하느라 비죽비죽 솟아 있던 철근들에 우르르 꿰뚫린 비참한 모습이 되어있었고 연희가 차마 그 모습을 보기 힘들어 눈을 돌리려 할 때, 갑자기 케인의 주변 허공에서 검은 기류의 소용돌이가 물결치면서 일어났다. 연희는 공포에 질렸으나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케인의 죽은 몸은 갈기갈기 찢어지면서 검은 원 안으로  흡수되어 갔다. 연희는 무서움과  알 수 없는 비감함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저것이... 블랙써클..?"

 어느 덧 케인의  몸을 자취 하나 없이 흡수 해 버린 검은 원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계속 퍼붓던 비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남자는 이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몸을 움직이지도, 눈 하나 깜박거리지도  못하고 단지 간신히 호흡만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남자의 몸 바로 위에 평평히 누운 자세로 죽은 듯 떠있는 남자의 유체 또한 쇠잔해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유체와 몸을 연결하는 은줄이 마치 실낱처럼 가늘어져서  금새라도 끊어 질 듯 해진 것을 보고는 현암도 뭐라 말할 수 없는 비감한 심정이 되었다. 연희는 남자의 손을 잡고 그  깊은 눈으로 남자의 얼굴을 응시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을 떠요... 제발..."

 연희의 눈물이 남자의 얼굴에 떨어지자 남자의 유체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빛은  너무도 희미해서 안명부를 이용하고 있는 현암만이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현암은  조용히 하나의 부적을 꺼내어 연희에게 들려 주었다. 연희의 눈이 잠시나마 환히 빛났다.

 "아..."

 남자의 유체는 이제  물리력으로 말을 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몸은 이제 금방이라도 숨을 멎을  순간이었고... 다만 얼굴에 슬픔과 그 특유의 포기한 듯한  미소를 어리면서 가만히 연희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연희는 울먹였다.

 "내가... 나 때문에..."

 남자의 유체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최후로 힘을 짜내는 듯, 다시 푸른 빛으로 일렁이면서 허공에  커다랗게 퍼져갔다. 현암도 그 광경을 똑똑이 볼 수 있었다. 그녀를 위하여 저 남자는 최후로 무언가를 영상으로 보여주려 하는 것이었다. 현암은 블랙써클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지금의 이 순간을 방해한다면  현암 자신이 영원히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허공 중에 커다란  영상들이 마치 실물과 같이 나타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가 현암에게  얼핏 자신은 그 영상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발전시켜온 것이라 말햇던 것이 생각났다. 저 남자는 어쩌면 진짜 예술가 였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소외시킨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길을 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현암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저 남자가  보여주는 것 외에 알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영상이 지나가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아마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남자가 최후로 많은 것을 보여주기 위한 마지막 작업인지도 몰랐다.

 남자의 얼굴.. 그리고 버림 받은 어린 아이의 모습.. 영상 속에 영상이 겹치고, 환영 속에 환영이 겹쳐갔다. 연희는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로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암도 거의 눈이 부신 것을 느꼈다.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은 기억의 색채들이었고 아름답고, 비장했고, 미어지도록 슬펐으며, 소리 없이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환영은 계속 흘러갔다. 낙조.. 계절의 바뀜.. 외로움.. 비오는 밤... 장난으로 만들어낸 염체들의 춤... 자기가 지닌 모든 기억을 한  번에 보여주려 하듯, 환영의 속도는 점점 빨리지고 극명하게 나타나 사라지고  어우러져 갔으며 연희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비오듯 흘리면서  환하게 미소를 띄어갔다. 보여주는 자와 보는 자.. 현암은 둘의 모습이 완전한 일치감 속에 있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허공의 환영이하나의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그려내면서 느려졌다. 엄숙했다. 연희는 직감적으로 남자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기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궁핍.. 고독함.. 피곤함...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상황.. 어울리는 색채와 모습을 분간하기 어려운 부정형의 형체들이 어우러지며 숙연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갑자기 영상 가운데로 하나의 고운 손이  나타났다. 희고 고운.. 당시 남자가 처해있던 어려움과 궁핍의  분위기를 갑자기 돌려 버릴 것  같은 그런 손.. 그 손에 들려 있던 것은 연희에게  낯익은 작은 구리 십자가.. 그리고 하나의 미소가 환영으로 나타났다.  그윽하고 깊은... 안온함을 절로 느끼게 하는 눈동자... 그 눈동자는 누구의 것인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전의 일이었던  듯, 오로지 눈동자의 이미지만이 생생하게 살아있었고 그 눈은  연희의 깊은 눈과 놀랄  정도로 닮아 있었다. 처음으로 어느 여인의 고운 목소리가 환영 속에서 울렸다.

 "힘을 내요. 그리고 좋은 기억만 생각해요..."

 연희는 더 이상 터져 나오는 슬픔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 남자가 자신에게 했던 말..자신에게 주었던 것은 너무도  오래 어루만져서 가지가 닳아버린 바로 그 십자가  였다. 연희를 처음보고 남자는 어리고 힘들었을 때의 그 기억을 떠 올린 것이었을까? 남자의 아주 어렴풋한 목소리가 울렸다.

 "내 단 하나의 좋은 기억,  그 십자가... 그 고운 눈매를 가진... 그리고 나 스스로의 분노에서 빚어진 악행으로부터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있게  해준...  연희씨.. 감사...  그러나  이제는... 이제는 너무 늦은 일..."

 목소리가 울리는 사이  남자가 만들어 낸  환영들은 어느 새엔가 사라져 버렸고 남자의 유체만이 불면 꺼질  것 처럼 남아서 창백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연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가면.. 안돼요.. 가면.."

 "내 마지막 쇼.. 잘 보셨나요? 더 잘할 수도 있었는데.. 후후.."

 "아아... 이름.. 이름이라도.."

 "부질 없죠..이름 같은 건 기억할 것 없어요..후후.."

 남자의 유체가 스르르 몸 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남자의 몸은 이제 호흡이 멎으려는 듯 했다. 현암도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갑자기 남자의 머리 쪽에서 조그마한 염체 하나가 튀어나와서 연희가 들고 있던 십자가 속으로 스며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남자의 몸은 서서히 편안한  듯 식어가며 최후의 호흡을  하는 듯 보였다. 현암은 조용히 눈을 감았고  연희도 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다만 그 닳은 십자가를 조용히 어루만지며 중얼거릴뿐이었다.

 "잘가요... 부디... 부디..."

 연희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리자 현암은 더 늦기 전에 간신히 몸을 일으켜서 월향을  찾아들고 계단을 내려 섰다. 마지막 인사는 둘만이 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납치 되었던 수정이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승희의 투시로 별 상처 없이  정신을 잃고 있던 수정이가  발견 되었고, 백호의 조사에 의해 케인의 신원과 입국  경로 등이 조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박신부도 이제는 거의 쾌유  되었고, 박신부는 연희의 이야기를 듣고는 기도를 올려 주었다.  승희는 남자의 최후가 퍽이나  아름답다고 말했고 준후는 몹시 아쉬워 했다. 그러나 어쨋든  일은 다 끝난 것이었다. 문제는 블랙써클.. 아직도 제대로  정체를 알수 없는 그  집단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일동이 모두 모여 있는 곳에서 현암이 말했다.

 "블랙써클은 복수의 단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미움과 증오와.. 재창조의 단체라고 했어요. 그리고  케인이 죽었을 때는 다시 전번의 호웅간과 비슷한 검은  원이 나타나 그 자의  몸을 삼켜 버렸다고 했구요... 뭔가 알 수 없는 음모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요..."

 박신부도 중얼거렸다.

 "밝혀 내야지.. 밝혀 내야만  하네.. 현암군... 백호의 말에 의하면 케인의 현 국적은 불가리아라고 했어. 분명 유럽 전체에 걸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세. "

 승희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리아... 아이고.. 말도 통하지 않겠네요.."

 "아무래도 연희누나 같은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면서요? 왜 연락이 없는지..."

 "글쎄다... 워낙 험한 일을 겪은 뒤이니... 우리가 요청한 일은 연희라는 아가씨의 판단에 맡기자꾸나.. 우리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니?"

 불만스러운 듯한  목소리의 준후를 박신부가 달래는 동안 현암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남자에게서 튀어나와 십자가로 들어간 염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케인이  연희에게 말했다던 심연의 눈.. 이란 건 무엇인지..? 그리고 블랙써클의 정체와 그들이 자꾸 한국에 나타나는 이유는..? 갑자기 전화벨이 울려서 현암은 전화를 무심결에 받았다가 미소를 지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연희의 약간은  아직도 주저하는 듯한, 그러나 결심을 한 것 같은 단호한 목소리가 맑게 울리고 있었다. 현암은 직감적으로 연희가 도움을 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느꼈다. 현암의 씩 웃으며 돌아다 보는 얼굴을 보고 퇴마사  일행들도 덩달아뭔가 흐뭇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 퇴마록 세계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