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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새로운 ‘시민’에게 ‘세계’로의 진입을 허하라! / 참여사회연구소 발간 반년간지 <시민과 세계> 제15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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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새로운 ‘시민’에게 ‘세계’로의 진입을 허하라! / 참여사회연구소 발간 반년간지 <시민과 세계> 제15호

zeno 2009. 10. 26. 23:37

처음 <시민과 세계> 제15호의 독자투고를 부탁받았을 때엔 적잖이 어리둥절했다. 어리둥절함은 이제 글을 쓰려고 하니 난처함으로 바뀌었다. 한 편의 글을 쓰기에는 제15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워낙 방대해 필자의 부족한 능력으로 이를 모두 아우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만히 헤아려보니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일천한 필자에게 원고 청탁이 들어온 까닭은 필자 같은 새로운 입장에서 <시민과 세계>는 어떠한 잡지인가를 묻기 위함인 듯 하다. 해서 필자의 최근 관심사인 ‘20대’ 혹은 ‘학생’이 느끼는 <시민과 세계>로의 진입장벽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시민과 세계>는 “정기구독 안내”에 따르면 “시민사회의 속 깊은 고민과 진지한 대화”를 담은 반년간지이다. 이 잡지의 지난 상반기의 고민은 제15호 목차에 따르면 크게 보아 권두의 글과 시, 진보적 시민사회운동의 현재 위치와 미래, 최근 전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사회적 기업, 도시재개발 문제, 그리고 대한민국사 논쟁, 한국과 일본의 시민운동 현장의 사례, 세계적 흐름, 시민정치론, 서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다 발행 주기가 짧은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이 시의적 문제를 다루는 데 반해 반년간지답게 진피에 위치한 본질을 건드리는 내용들이다. 서로 다른 수십 명의 저자들의 합동저작물인 탓에 권두언과 권두시, 서평을 제외한 글들의 문투와 구성방식이 논문에서 에세이까지 제각각이고, 추상적 담론상의 논의에서부터 구체적인 사례나 데이터에 기반한 논지전개까지 구성물들이 참으로 다양하다.
  한편, 수록된 글들의 대부분이 각 분야의 ‘전문가’에 의해 쓰인 탓인지 가독성이 일부 떨어진다. 즉, 잡지의 높은 수준이 독자에게 일종의 ‘진입장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과연 <시민과 세계>는 독자로 상정하고 있는 ‘시민’이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잡지인가. 맑스의 <자본>이 노동계급에게 읽히기 위해 쉽게 쓰였다는 사실은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만약 <시민과 세계>의 대상 독자가 일반 시민이 아니라 ‘학계’의 전문가들이라면 잡지의 제호는 <전문가와 세계> 따위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물론 참여연대에서 내는 <참여사회>라는 회원용 월간지가 따로 존재한다. 하지만 참여연대의 부설기관인 참여사회‘연구소’라는 이유로 ‘시민’운동이 아닌 ‘전문가’운동을 지향한단 말인가?
  굳이 예상 독자와의 괴리가능성을 지적하는 까닭은 전문가가 아닌 시민의 일원인 20대 혹은 학생의 입장에서 보건대 <시민과 세계>의 진입장벽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일례로, 아직 비전문가인 20대나 학생의 입장에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제15호에 수록된 글은 대부분 대학원 박사 이상의 전문가들이 미거시적으로 사회 현안에 대해 짚어낸 결과물이다. 여기서 20대나 학생의 존재는 전무하다. 물론 시민사회운동의 현안을 다루는 잡지의 특성상 경험이나 식견, 그리고 지식을 갖춘 필진의 수준에 버금가는 20대나 학생 필자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웹 2.0 시대를 맞이하여 한국에서는 ‘블로그’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신진 필자들이 대거 발굴되고 있고, 그 중에서는 한윤형, 노정태 등과 같이 스스로의 입지를 쌓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이 있다. 물론 20대나 학생이 한국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진 집단이라는 이유만으로 지분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문제의식을 가진 젊은이들이 <시민과 세계>에 참여할 길이 봉쇄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15호 전체를 아무리 뒤져봐도 ‘외부투고를 기다린다’는 내용의 광고가 없다. 물론 이는 잡지의 편집 주체의 권한이기에 일개 독자로써 훈수를 둘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하지만 <시민과 세계>의 소극성이 2009년 현재 시민사회운동이 20대 혹은 학생이라는 집단과 쉽게 교류하지 못하는 현실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서 하는 이야기다. ‘88만원 세대’라는 호칭은 이제 ‘386 세대’만큼이나 진부해져버렸지만, 그에 상응하는 세력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시민과 세계>에 투고하는 등 진보적 사회운동계에서 글이라는 방식을 통해 실천하고 있는 30대 이상이 ‘386 세대’ 혹은 그 이전의 ‘유신 세대’를 구성하며 학생 혹은 20대 시절의 집단적 운동 ‘성공’ 경험을 공유하는 것과 달리, 88만원 세대 구성원 중 대다수는 그러한 경험 없이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흐름 아래 각개격파당하여 각개약진해야 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들에게 <시민과 세계> 등을 통해 시민사회운동의 담론계에 유의미한 문제의식을 제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들은 2000년대 후반의 88만원 세대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2010년 후반이 되어서야 그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전문가’가 되어 시민사회운동 담론의 수면위로 떠오를 것이다.
  이는 시민사회운동과 88만원 세대, 양자 모두에게 결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리 없다. 운동 담론계에 후속 세대가 진입하는 것이 운동 현장에 그/녀들이 진입하는 것과 등치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오피니언 리더’라 불리는 이들의 존재는 분명 현장으로의 ‘젊은 피’ 수혈에 효과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88만원 세대의 입장에서도 운동 담론계로의 진입은 자체 세력화의 좋은 전기가 될 수 있다. 인터넷 공간 상에서 각개약진 하고 있는 이들을 하나의 담론 공간으로 결집시키는 것은 실천의 갈증에 목말라 있던 그/녀들의 독자들을 담론계로 이끌면서 동시에 새로운 논자들의 등장을 앞당기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도는 자칫 ‘전문가’운동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힘들 수 있는 시민운동이 새로운 시민 집단을 수용함으로써 그 외연과 내포를 고루 확장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비전문가’들이 ‘전문가’들과 논쟁하는 등의 참여를 통해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시민운동의 목표 중 하나가 아니던가?
  사실 20대나 학생 집단의 사회운동담론으로의 참여는 굳이 <시민과 세계>라는 매체를 거치지 않고서도 가능하다. 이미 그/녀들의 인터넷을 통한 사회참여는 다음 아고라 청원, 2008년의 촛불집회 참여, 취미로 모인 커뮤니티 내에서의 정치사회적 이슈 논쟁 등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한 여론 형성은 그 엄청난 폭발력만큼이나 휘발성이 강하다. 지난 5월 말의 조문정국에서 재확인되었던 인터넷 여론의 민첩성은 다시 표면 아래로 가라 앉았고, 대통령의 지지율이 50%를 오르내리며 20대 문제로 제시되었던 등록금, 청년 실업 등의 문제들은 진척이 지지부진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88만원 세대의 결집이고, 세력화다. 이에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민과 세계>이다.
  이상의 논의가 필자 같은 이들이 동년배인 88만원 세대를 팔아 운동 담론계로 진입하며 일종의 ‘등단’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려는 시도로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글의 초점은 ‘88만원 세대의 오피니언 리더를 영입하라’가 아니라 지금까지 운동 담론에서 주체로 서지도, 인정받지도 못했던 이들이 비록 비전문가일지라도 당사자의 입장에서 사회 모순을 증언하고 해결을 위해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는 것이다. 작년 100여 일 동안 진행되었던 촛불집회에서 찬양되었던 것이 바로 기존의 운동집단과 다른 이들의 등장이었고, 아쉬움으로 남았던 것이 이들의 ‘지속적 관심’을 담보하는 세력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아니었던가. ‘88만원 세대’ 역시 한국 사회라는 ‘세계’를 구성하는 ‘시민’이다. <시민과 세계>는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이 새로운 ‘시민’에게 ‘세계’로의 진입을 허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