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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 Zenol

[한페이지단편소설] 버번 스트레이트

zeno 2009. 10. 24. 22:34

오늘도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늘 그러했듯이, 어제도 버번에 기대 잠을 잔 탓이다. 방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좁고 너저분한 그의 공간에는 그의 흔적이 묻어 잇는 동거녀의 속옷이 널려 있을 뿐, 그녀의 자취는 간데없다.

그가 이 생활을 한지도 벌써 3년하고도 7개월째다. 라스 베가스 북편에 덩그러니 흐릿한 불빛을 내뿜는 사하라 호텔의 카지노 기계수리공.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무턱대고 찾아온 라스 베가스에서 그가 얻을 수 있는 직업의 한계였다. 하루에 30달러 남짓 벌 뿐이지만, 카지노 한 구석에 몸 누일 공간이 있고, 1달러를 받고 맥주나 위스키 따위를 날라주는 서버걸들을 통해 술과 음식을 얻을 수 있기에 그는 특별한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30달러면 하루 종일 먹고 마시고 일하는 데 충분하다.

그의 인생에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매일 드넓은 카지노를 돌며 고장 난 기계를 고치며 시간을 때우는 것이 유일한 일이다. 아무 생각 없이 기계를 분해했다 조립했다, 전원을 껐다 켰다를 반복하면 이뤄지는 그의 일은 시간만 필요로 할 뿐, 어떠한 능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게 그가 살아가는 이유이다.

오하이오에서 그녀가 결국 그를 떠나가며 한 ‘이건 아니다’라는 이야기는 그에게 영원한 미스터리이다. 그건 그가 뉴욕에 가서 반년 그녀를 찾아 헤매다 내린 결론이었고, 그는 그 이후 아무런 미련 없이 라스 베가스로 날아왔다. 수리공 생활을 시작한 뒤 그의 일상은 단순했다. 항상 똑같았으니까. 한 가지 다른 점은 무시로 그와 함께 사는 여자가 바뀌었다는 것 정도.

그는 그녀에게 ‘왜’라고 묻고 싶었다. 그 한마디를 묻기 위해서 뉴욕으로 건너갔었고, 홈리스 생활을 전전했다. 하지만 그는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냥 그건 그런 거라고. 그녀가 답을 해주더라도 그는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그래서 그는 그의 동거녀들에게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다. 그가 그녀를 이해할 수 없듯이, 그도 그녀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테니까. 그저 그는 순진함을 가장해 단조로운 이 생활을 즐길 뿐이다.

그래서일까. 이따금 습격하면서도 항상 같은 그의 꿈은 언제나 같은 지점에서 끝나고 만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의 침대에 함께 누운 그녀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더니 그가 ‘왜’라고 묻자마자 차갑게 나가 버리는 그 꿈. 그는 매번 한심한 자신을 탓하지만, 그의 입은 언제나 기계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다. 왜 그랬냐고.

그 날 이후로 그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아무 것도 영원한 건 없다. 입은 사실을 말하지 않고, 몸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매 순간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돈도 그 순간 동안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나마 조금 오래가는 건 버번의 여운 뿐.

그가 이성과 신을 믿었던 그날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잔인했고, 세계는 더 냉정했다. 어느 날, 버번이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다가 죽더라도, 인간과 세계의 본성은 변할 리 없었다. 그냥 그렇게 가는 것일 뿐이었다. 순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정수라고 생각했던 순수는 비정했다. 참담함만이 남았다.

이제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버번을 마시면 그 다음날은 머리가 아프다는 사실 뿐이다. 자신이 하루 종일 만지는 슬롯머신 역시 불가해한 존재다. 시간을 잡아먹을 뿐 아무것도 토해내지 않는다.

오늘도 기계음이 울리고, 버번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