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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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원신문] 당신 서재의 나침반 / 번역의 탄생 / 로쟈(이현우)

zeno 2009. 3. 30. 16:24

책으로만 하는 공부를 사람들은 대개 높이 치지 않지만 적어도 대학원생의 공부라면 8할은 책으로 시작해서 책(혹은 논문)으로 끝난다(인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필독 목록에 있는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정리하고, 정리한 내용에 대해서 발표하거나 토론하는 것이 대학원생의 일상사다. 한데, 그 책은 어떤 책인가? 책의 분야가 아니라 분류를 묻는다. 책은 출판지와 쓰인 언어에 따라 국내서, 국외서, 번역서로 분류된다. 아무리 종류가 많아도 이 세 가지 범주로 분류 가능하다. 이 중 국외서(원서)를 논외로 하면, 대학원생이 읽는 책의 절반 이상은 번역서가 아닐까 싶다.  

그런 추정에 근거를 대보자면 이렇다.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에 따르면, “해마다 통계가 들쭉날쭉하지만 우리 출판물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3분의 1 정도다. 의미 있는 인문사회과학서는 그 비중이 훨씬 높다. 언론에서 크게 다루는 인문사회과학서의 경우 번역서가 3분의 2 가까이 된다. 또 해마다 베스트셀러 상위에 오르는 책의 절반쯤은 번역서다.”(<번역출판>, 머리말) 그 결과 어떤 경우엔 번역서 출간 속도에서 일본을 앞지르기도 하며, 전체 출판물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세계1위’다!   

  

말하자면 한국은 ‘번역 대국’이다. 한데, 이 ‘번역 대국’은 곧바로 ‘번역 강국’이기도 할까? 얼른 ‘그렇다’고 말하기가 좀 어렵다. 그 ‘강국’의 척도가 ‘주체적 역량’ 혹은 ‘자신감’의 문제라면 말이다. 예컨대 ‘real politics’란 말을 ‘현실 정치’라고 옮기는 것이 아니라 굳이 ‘현실 정치(real politics)’라고 괄호 안에 원어를 넣어주면서 옮기는 것은 ‘친절한 번역’이기는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번역’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의 번역에서도 “배차(拜箚)에 참여하지 아니한 옥당들도 체직하였다”라는 식이라면 한문을 모르는 독자의 난감함은 여전할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 때문에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에서 저자는 “해방 이후 두 세대가 지났지만 아직 한국은 정신적으로 독립국이 아니다 싶을 때가 많다”라고까지 토로한다. 번역서에는 한갓 번역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소위 ‘학문후속세대’로서 이 번역의 문제와 함께 학문 주체성의 문제도 고민해보는 것을 어떨까.   

먼저 우리가 쓰는 개념어들의 기원과 실상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이겠다. 야나부 아키라의 <번역어 성립사정>(일빛, 2003)이 시사해주는 바대로, 사실 우리가 쓰는 학문과 사상의 기본 용어들은 주로 메이지 시대에 서양어에 대응하는 번역어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시대 일본의 지식인과 번역가들이 ‘society’를 ‘사회’로 ‘individual’을 개인으로 ‘modern’을 ‘근대’로 옮긴 것이므로 이 말들이 모두 당시로선 ‘신조어’였다. 가령 ‘individual’이란 단어는 처음에 ‘독일개인(獨一個人)’, ‘단일개인(單一個人)’ 등으로 영일사전에서 풀이되다가 ‘일개인’으로 번역되었고 그 뒤에 ‘일’이 떨어져나가 ‘개인’으로 정착됐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에겐 일본어 문헌과 영일사전을 베낀 영한사전 등을 통해서 유입되었다. ‘개인과 사회’라는 개념틀 또한 프랑수아 기조의 <유럽문명사>에 나오는 것이며, 우리는 기조의 영향을 받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입수했다. 이들 개념어가 사고의 도구상자 역할을 하는 한, 우리가 정신적으로 ‘독립국’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일본식 개념어(한자어)들을 우리말로 ‘순화’하는 것이 해결책일까?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2007)에서 고종석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순수한 한국어’란 없으며 모든 언어는 서로 섞이고 스며들기 마련이라는 생각에서다. 가령, ‘쓰메끼리’는 ‘손톱깎이’로, ‘벤또’는 ‘도시락’으로, ‘쓰리’는 ‘소매치기’로 대체한다지만 일본어에서 훈독을 하는 단어들, 예컨대 ‘다치바(立場)’에서 온 ‘입장’을 ‘처지’로, ‘데쓰즈키(手續)’에서 온 ‘수속’을 ‘절차’로 바꾸는 것이 과연 효과적인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같은 유형의 일본제 말들인 엽서(葉書: 히가키), 입구(入口: 이리구치), 출구(出口: 데구치), 할인(割印: 와리비키), 취소(取消: 도리케시), 조합(組合: 구미아이), 견습(見習: 미나라이) 등은 대체할 말도 마땅치 않다고 말한다. ‘순수한 한국어’란 오히려 언어민족주의자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깨비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물론 그러한 언어 현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보다 자연스러운 한국어 번역의 의의가 줄어들 수는 없겠다. <번역의 탄생>에 나오는 예를 들자면, 가령 일본에서는 10년쯤 전에 헤겔 <정신현상학>의 새로운 번역이 화제가 됐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헤겔의 저서를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가령, “자연적 의식은 자신이 지(知)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실재적 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자증(自證)할 것이다.”란 옛날 번역을 역자는 “자연 그대로의 의식은, 지(知)는 이런 것이라고 머리에 떠올릴 뿐이지, 실제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옮겼다. 또 “즉자적이며 대자적으로”란 표현은 “완결무결한 모습으로”라고 옮겼다. 직역 그대로 ‘들이밀기’가 아니라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의역하는 ‘길들이기’가 번역의 기본방침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경우도 개항 이후 외국의 문물을 일방적으로 수입하던 시절에는 원문 중심주의와 딱딱한 직역투를 용인했다. 하지만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가 도약하고 자국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커지면서 원문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본어 번역을 선호하게 됐다고 한다. 말하자면, 번역에서 직역이냐 의역이냐 하는 것이 번역의 방법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 나라의 경제 수준, 그리고 문화적 자신감과 연관된 문제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미국으로 숭배대상이 바뀌었을 뿐, 아직도 '어륀지' 사대주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우리의 처지를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사무침>(푸른사상, 2008)과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고마움>(채륜, 2009)은 현재의 여건 속에서 어떻게 ‘주체적’ 학문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다시 일깨워준다. 우리사상연구소에서 펴낸 <우리말 철학사전 1-5>(지식산업사)와 이기상의 <우리말 철학>(지식산업사, 2003)은 그런 고민이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사회과학자들이 펴낸 <우리 안의 보편성: 학문 주체화의 새로운 모색>(한울, 2006)도 마찬가지다. <우리 학문 속의 미국: 미국적 학문 패러다임 이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한울, 2003)과 함께 일독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학문을 할 생각인 이상, '우리말로 학문하기'는 학문의 또 다른 화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역시 번역 문제를 지나칠 수 없다.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를 읽다 말았는데, 일단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에 눈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