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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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 Zenol

090315 불편한 냉소주의

zeno 2009. 3. 16. 05:05
  냉소주의는 비겁함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어느 한 곳에도 정체성을 고정시키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는 탓이다. 일례로, 집단 속에서는 개인을 지켜야 한다며 버티는 한편, 파편화된 인간들 사이에서는 공동체의 복원을 주장한다. 결국 개인주의자도 아니고, 공동체/집단주의자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서 균형 잡기를 시도하는 탓에 냉소라는 '제3의 길'로 빠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스스로 인간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항상 헷갈리곤 한다. 어쩔 때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다가도, 어느 새 팩 토라져 인간들을 저주하고 욕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양 극단에서 진동하며 살아가는 바, 늘 그 종착역은 적당한 '거리두기'가 되기 일쑤다.
  이런 개인의 성격은 살아가는 환경이 바뀌어도 지속된다. 특히, '기숙사'라는 공간에만 들어가면 수 많은 데자뷔를 느끼곤 한다. 항상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명제를 정언명령으로 삼고 살아가고자 머리로 노력하지만, 가슴은 싫어하는 사람을 만들어내기 급급하다. 그 결과, 상대에 대한 미움을 이성으로 통제하고자 노력하는데 애먹는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내가 싫어하기 시작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먹기 시작할 때, 더 큰 갈등이 시작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현상을 수 차례 겪었다. 일 대 다수, 혹은 소수 대 다수로 나뉘어 다수가 '숫자'라는 본성에 불과한 이른바 '여론', '대세'를 타고 수적 소수를 억압하는 일을. 그 때, 보통 내 입장 역시 도덕적 이유에서 소수에 대해 비판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 때 문제는 그 소수가 엉뚱한 집단주의 탓에 탄압받는 것을 보기 불편하다는 것이다. 평소의 냉소주의적 태도라면 으레 그저 양 쪽을 비판하고 지나가면 되겠지만, 소수가 다수에 의해 부당하게 비난당하는 이상 어줍잖은 정의감 탓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결국 이 글 역시 그럴 때 소수의 편을 들겠다는 자기다짐을 위해 쓰는 것이다. 난 소수의 내용이 싫다. 그/녀의 오만함, 무례함, 무지함 등등 많은 부분이 싫다. 하지만 '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자본주의 내의) 최소한의 '상식'이 통용되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볼테르의 뒤를 쫓아보려는 노력을 조금이나마 할 수 밖에 없다. 냉소주의자가 이렇게 살려고 하니 불편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