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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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읽기 / 무적 초딩의 현주소 / 김별아 (소설가)

zeno 2009. 3. 4. 18:02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내 기억에는 여전히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이 선연한데, 벌써 열네 살이란다. 더는 엄마 손을 놓칠세라 종종걸음치던 어린애가 아니란다. 아이가 주먹을 옥쥐고 눈을 부릅뜨고 말대꾸를 하기 시작했다. 몇 마디 잔소리에 식탁에 컵을 탕탕 내려놓고, 제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린다. 몸의 성장 속도를 따라 좇지 못하는 마음, 치기와 혼동되는 미숙한 열정, 시시때때로 회오리바람처럼 그를 휘젓는 불균형한 욕망까지 … 아, 바야흐로 질풍노도, 주변인, 이유 없는 반항의 사춘기가 왔다. 전국의 사춘기 아들딸을 둔 엄마들과 함께 이 고통의 축제를 만끽하리라!

그러니 이 조숙한 아이들의 초등학교 졸업식 풍경이 부모세대와 전혀 닮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다. 엄마가 사진을 찍어주는 것마저 ‘쪽팔려’하며 고개를 모로 꼬는 아이 때문에 속상했던 마음이, 부모가 건네는 꽃다발마저 받지 않으려고 투덜대는 다른 아이를 보며 얄궂게도 위로받는다. 이마에 여드름이 돋기 시작하고 변성기에 접어들어 목소리까지 걸걸한 그 녀석은 사진기 앞에서 “집에 가서 찍자니까!”라고 소리친다. 졸업기념 사진을 집에 가서 찍자니, 이보다 더 황당할 수 없는 까탈에 붉으락푸르락하는 부모의 얼굴은 동병상련의 심정 때문에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

이처럼 천하에 제어할 자 없는 ‘무적 초딩’들이 주인공이 될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아이들이 졸업장을 받는 동안 졸업식장 대형 스크린에는 아이들의 스냅 사진과 좌우명, 장래 희망 따위가 일일이 영상으로 게시되었다. 잘못하면 미래에는 세상에 온통 환자와 죄지은 자들이 넘쳐나겠다. 하지만 의사와 판검사 변호사가 되겠다는 아이들의 호기는 차라리 애교스럽다. 슬그머니 풀이 죽은 듯 적힌 ‘회사원’이라는 장래 희망은 왠지 마음을 짠하게 한다. 좌우명도 제각각이다. ‘먹어야 산다!’라는 지극히 원초적인 욕망의 선언으로부터, 도대체 어디서 들었는지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할래?’라는 씁쓸한 협박성 잠언까지.

그런데 빠르게 슬라이드 영상이 지나가는 가운데 가장 많이 발견되는 좌우명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다시 한 번 이들의 나이를 상기한다. 아이들은 열네 살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스물네 살도, 인생의 몽근짐을 추스르는 중년의 마흔네 살도 아닌, 열네 살. 그들이 도망치려도 도망칠 수 없고 피하려도 피할 수 없어, 끝내 어금니를 질끈 물고 즐기는 체라도 해야 하는 것들은 대체 무엇일까? 그처럼 힘들고 재미없는 일이라면, 아직은 어디로든 도망치고 때로는 피해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 아닌가?

3월10일로 예정되었던 ‘일제고사’가 31일 이후로 미뤄졌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출제범위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새 학기 수업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준’을 평가하여 그 결과를 어디에 써먹겠다는 건지, 아이들도 모르고 부모들도 모르고 교사들조차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정체모를 불안에 아이들을 꾸역꾸역 학원으로 몰아대고, 학교와 교육청은 애꿎은 운동부원들을 시험에서 제외하고 성적을 조작해서라도 그놈의 ‘수준’을 높이려고 한다. 거짓의 모범을 보이고, 기만을 가르친다.

이 무섭고 잔인한 서열화의 광풍을,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할까? 졸업식장에 메아리치던 축사가 이제 본격적인 입시경쟁의 문턱에 들어선 아이들의 모습에 오버랩된다. 축하의 말은 공허하고, 무적 초딩들은 슬프도록 비장하기만 하다.